잔을 받으신 예수님

요한복음 181-40

 

예수님과 제자들은 감람산에 도착하셨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이곳에서 겟세마네의 기도를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요한은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고 가룟 유다의 배신으로 인해 예수님께서 잡히신 것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군병들을 끌고 와서 예수님을 넘겼고 이에 분노한 베드로는 칼을 빼들어 말고라고 하는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말고의 귀를 고쳐주시면서 자신은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마셔야 한다고 말씀하시고 잡히셨습니다. 먼저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 안나스의 뜰에 끌려가 심문을 당하시고 후에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이런 와중에 예수님의 예언대로 베드로의 부인이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끌려가 심문을 당하셨는데 이 때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잔을 마시게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먼저 1절부터 4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가셨습니다. 그곳은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들러 기도하시던 곳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가룟유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군병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들은 등과 횃불 뿐 아니라 무기를 들고 왔던 것입니다. 이 일을 당하신 주님은 이일에 대해 미리 알고 계셨다고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당할 일을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에 그들은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했고 예수님은 내가 그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이 너희가 찾는 나사렛 예수라고 했을 때 예수님을 잡으러 온 자들이 뒤로 물러나서 땅에 엎드려졌습니다. 이는 그들이 예수님을 여호와 하나님과 잠시 동일시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내가 그니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출애굽기 314절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면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면서 하신 말씀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말이었는데 본문에 내가 그니라라는 말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는 말을 연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군병들은 놀라 뒤로 물러가 엎드렸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놀라 엎드러져 있는 그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누구를 찾느냐라고 말입니다. 이에 그들도 전과 동일하게 나사렛 예수를 찾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질문하고 답을 들으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 가지 요구를 하십니다.

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군병들에게 두 번이나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 이유 중에 하나가 8절에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들이 잡으러 온 자는 바로 나이므로 제자들은 안전하게 돌아가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심은 자신을 내어 놓고 제자들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만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마가복음 1450절에서 언급되는 제자들의 도주와 대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한이 공관복음서 저자와 달리 제자들이 도망친 것이 아니라 예수의 지시에 따른 것임을 밝혀 제자들이 도망 간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끝까지 생각하고 계심을 나타내려 한 것입니다. 이미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이 당신을 모두 떠날 것을 아셨기에 그들이 떠나게 되는 것을 이해하시고 제자들의 마음을 가볍게 하심인 것으로 여겨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사건은 아주 중요한 영적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죄로 인하여 형벌 받는 것을 볼 수 없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이 모든 것을 담당하시고 제자들은 그 형벌로부터 놓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절인 9절에서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은 예수님은 이미 요한복음 1011절에서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라고 하셔서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을 위해 죽으실 것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이 후에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어려움을 당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기에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을 당신이 받는 것과 동일시 하셨습니다. 달리 표현하면 체휼하실 뿐 아니라 계속해서 함께 고난을 당하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겠다고 다메섹으로 갈 때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심으로 성도를 핍박하는 것이 자신을 핍박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잡히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의 호기가 발동하였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칼을 빼들고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말고의 잘린 귀를 다시 붙여주셨(22:51)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칼로 저항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먼저 칼을 꽂으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 하신 후에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한 후에 제자들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원칙을 제공하였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박해를 당할 때 그 박해에 대처하는 방식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강력한 박해를 당해도 절대로 칼을 들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죽이려고 했을 때 자신이 살겠다고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주후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 할 때까지 교회는 단 한 번도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겠다고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인해 죽임 당함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나옵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으로 인해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협박을 당하며 풀려 날 때 제자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했다(5:41)고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초대교회성도들이 잡혀 원형경기장에서 검투사들과 싸워야 할 때도 그들은 상대 검투사에게 칼을 들지 않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현대를 사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가 세상으로부터 공격을 당한고 무시를 당한다고 해서 세속적인 힘을 의지하여 이기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종종 선거 때가 되면 세속적 권력을 얻어 기독교나라를 만들겠다는 사람들이 일어나지만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이룰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방법은 이미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 절에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김은 잔을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이 잔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 죽음만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음으로 이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을 사는 주의 백성들의 삶도 분명한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마신 잔을 우리도 마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음의 잔을 마셨다면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이 잔을 마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말씀으로 매일 매순간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요구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명예에 대해, 쾌락에 대해, 육신적 욕구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죽는 것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는 것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의 입을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1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린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인해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 백성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일들이 점점 확대됨에 따라 그것이 필경은 로마의 공격을 초래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원들이 어찌할지를 고민할 때 가야바가 했던 말이었습니다. 요한은 이 말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가야바는 1150절을 보면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했었습니다. 이렇게 한 말을 요한은 해석하기를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11:51,52)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죽으실 것을 가야바의 과거 행적을 거론하며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생각하며 죽음의 길로 나아가실 때 제자들의 모습을 대변한 한 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베드로입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25절부터 27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잘린 사람의 친척이라 이르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는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예고하신대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제자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죽음의 길을 걷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위해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행하는 것을 위해 40일 동안 모세와 행복한 대화를 하고 계셨다면 그 백성들은 자신들을 위해 자신들을 인도할 송아지를 만들어 송아지 앞에서 뛰놀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여전합니다. 예수님은 하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시고 우리들은 우리들의 육적 이익을 위해 주를 부인하고 썩어질 이익을 취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탄식으로 기도할 때 우리들의 영적 귀가 닫히고 눈이 감겨 주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세상과 짝하여 세상을 하나님 섬기듯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이 오늘 본문의 베드로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리스도인답게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고 교회 안에서의 믿음과 교회 밖에서의 삶의 모습이 다른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생명의 주관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분명한 생각이 없어서입니다. 세상은 우리를 죽일 힘이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3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이 말씀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이끌고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예수님을 죽여 달라고 부탁할 때 사람들이 한 말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사형권이 없었습니다. 당시 사형권은 오직 로마에게만 있었기 때문에 총독에게 끌고 갔던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입으로 자신들의 한계를 말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과 빌라도와 대화 때에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과의 대화하면서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19:10)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19:11)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은 예수님의 목숨을 거둘 수 있는 힘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그렇게 말씀하시 않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028절에서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정한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니엘서 4장에서 느브갓네살이 고백한대로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러한 주님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세상 속에서 거룩한 삶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주관하시고 생명을 주시기도 거두시기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세상의 휘둘림에 끌려 다니는 비참한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눈은 이 땅의 권세가 아닌 하늘의 권세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고 그 눈으로 기꺼이 이 땅의 박해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36절과 3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주님은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약 이 땅에 속한 것이라면 이 땅의 방법대로 군대를 동원해 자신을 구원해 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 땅의 방법과 이 땅의 가치관대로 살거나 이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 땅에 방법은 세속적인 힘을 많이 소유한 자가 강한 것입니다. 재물이 많고, 권력이 높고, 인기가 많은 것이 강한 것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그것으로 세상을 이긴다면 주님은 우리들에게 넘치게 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땅에 속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이 땅의 가치관으로 이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주님의 나라는 하늘에 속하였으며 이 땅에 오신 것은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왕으로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왕으로 오셨지만 세속적인 왕의 통치를 하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심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1절로 3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진리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본서 146절에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라 하셨습니다. 그 자신이 진리인 예수는 세상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을 진리이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통해 예수님의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리에 속한 자만이 진리이신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 구절은 다음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보내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께 올 수 없다는 사실(3:27;6:44, 45, 65)과 본 절은 잘 조화됩니다. 따라서 본 구절은 예정론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두 번째로 본 구절은 영적 진리에 무지한 빌라도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음을 암시합니다. 예수는 진리의 왕으로 진리를 말하고 있으므로 만일 빌라도가 진리에 속한 사람이라면 예수의 말씀을 이해했겠지만 그는 결코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니었기에 예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주의 백성만이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오셨고 죽으신 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잔을 받으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과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열정에 감동받아 죽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열정과 헌신에 근거하여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근거하여 죽음의 잔을 받으셨습니다. 그 잔은 예수님께는 죽음을 안겼지만 우리에게는 생명을 주신 잔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항상 기억하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리 안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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