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 수가 없겠노라 하겠느냐?

누가복음 111-13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우리가 주기도문이라고 말하는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곧 이어 한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의 친구가 밤중에 찾아왔는데 그가 먹을 것이 없어 이웃집에 가서 떡을 빌리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부탁을 받은 사람은 친구 됨을 인하여는 들어주지 않을지라도 간청함을 인하여는 그 요구를 들어주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과 육신의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줄줄 아는 것처럼 하늘 아버지도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예수님께 나아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보며 제자들도 기도에 대한 욕구가 생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제자들은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는데 당시에 종교 공동체에서는 지도자들이 기도를 가르치는 일은 일반적인 것이었습니다. 랍비들은 자기의 제자들에게 기도문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고 또한 일반 유대인들도 정시에 일정한 형태의 기도문으로 기도를 하였습니다(10:3,9). 지금도 유대인들은 랍비들이 가르쳐 준 기도집을 들고 다니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자들은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그들의 공동체를 특징 지워줄 수 있는 기도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우리가 외우고 모임 때마다 하고 있는 기도인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가르쳐 주신 내용보다 적은 양의 내용을 누가는 적고 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2절부터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주님은 이 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라는 말씀으로 기도의 기본 내용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내용에 대한 해석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이 말씀 다음에 나온 이야기들을 통해 오늘 제목과 관련된 말씀을 중심으로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5절과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주님은 이 후에 몇 가지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더 주심으로 기도의 주체와 기도에 대해 응답하실 하나님과 기도의 자세에 대해, 그리고 기도 응답의 결과에 대해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5절부터 8절까지 한 가지 비유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한 사람이 밤중에 친구의 집에 찾아 온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아마도 친구가 방문한 집은 가난하거나 저녁에 모든 음식을 다 먹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친구가 찾아왔기에 그에게 줄 떡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이 친구가 할 수 있는 것은 곁에 살고 있는 다른 친구의 집을 찾아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친구의 집을 두드리며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부탁하는 친구의 부탁에 대해 부탁을 받은 친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고대 이스라엘의 일반 서민 가정의 잠자리 풍경입니다. 그들은 온 가족이 한 곳에 모여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잤습니다. 그러기에 부탁을 받은 친구는 떡을 주기 위해서는 온 가족이 잠에서 깨어날 수도 있는 불편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친구는 기꺼이 그의 부탁을 들어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후반 절을 보면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좋은 친구이기 때문일까요? 목숨까지 내 줄 수 있는 친구이기에 가족들이 잠을 설치는 불편 정도야 감내할 수 있는 것일까요? 그래서 기꺼이 떡을 주겠다는 말일까요? 그 답은 다음절에 있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벗 됨을 인하여 준 것이 아니랍니다. 단순히 친구이고 그 친구를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기에 떡을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에게 떡을 준 이유는 간청함을 인하여 준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간천함이란 말을 주의 깊게 생각하고 지나가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들에게 간절히 청함이라는 의미로 인식됩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기도에 결부시키면 하나님께 간절히 청하면 응답을 받는 것이라는 의미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것에는 몇 가지 전제가 있습니다.

 

먼저 간청함이란 단어를 생각해 봅시다. 이 말은 헬라어로 아나이데이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부정접두어 '''부끄러움이 없음'을 뜻하는 '아이도스'의 합성어로 수치를 피하기 위함,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함,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함등의 의미의 단어입니다.

 

아나이데이아라는 단어가 간청함이라고 쓰이게 된 것은 사실 교부시대를 거쳐 중세 시대에 들어와서야 간청함, 끈질김 등의 단어로 쓰였지 그 전에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던 단어였습니다.

유대사가 요세푸스의 책 유대전쟁사나 유대 랍비들의 문헌, 그리고 70인역 등을 보면 당시에 아나이데이아라는 단어는 모두 수치를 피하기 위함,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함,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함등의 의미로 쓰였던 단어입니다. 그러다가 라틴어 성경 번역본에서 처음으로 간청함이라는 뜻으로 번역이 되었고, 꼽틱 번역본에서 끈질김등으로 번역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경에 간청이라고 번역된 말을 아나이데이아의 원뜻으로 바꾸어 번역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떡을 안주었을 때 무슨 일을 당하기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 준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문화를 알면 알 수 있습니다.

한 친구가 밤중에 친구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찾아 온 손님에게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그 손님의 생명이 위협을 당하면 자신이 대신하고 손님의 목숨을 건져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문화 속에 살고 있던 시대에 친구가 밤중에 찾아왔고 식사를 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당시 집단적이며 공동체적인 사회문화 속에서 한 가정의 손님이 아니라 당연히 그 마을 전체의 손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문을 받은 친구는 스스럼없이 떡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친구의 집으로 떡을 가지러 갔습니다. 만약 그날 부탁을 받은 친구가 귀찮아서 떡을 내어 놓지 않는다면 그 친구는 물론이요, 마을 전체가 수치와 창피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수치와 마을의 수치는 친구 사이라는 관계를 넘어서는, 모든 행위의 근거와 이유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중하고 당연한 친구사이라 해도 귀찮아서 떡을 안 내어놓을 수는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수치를 당치않기 위해서는 절대로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건 너희들도 아는 것 아니냐?”

 

그러니까 이 비유는 절대로 거부당할 수없는, 어떤 당연한 요청과 그에 대해 당연히 응해야 하는 것임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관계에 있습니다. 요청을 받은 친구가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 떡을 주었다면 주님도 수치를 당치 않기 위해서 우리의 요청에 응답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관계이기 때문일까요? 그것은 여호와는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관계이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며 자녀인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시내산에서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이 송아지를 만들고 자신들을 인도할 자신들의 신이라고 경배할 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백성을 멸하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께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32:11-13)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의 간절한 기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분과 우리의 관계 때문입니까? 그분과 우리의 관계 때문입니다. 그 관계로 인해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면 당신이 당하는 것이라 그 수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근거에 대해 말씀하실 때 수도 없이 자신의 영광 때문에 그 일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37:35)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43:21)

내가 나를 위하여 그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그들은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하시니라”(2:23)

 

나아가 당신이 당신의 백성을 환란과 어려움에서 구원하여 영광을 얻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48:11)

 

예수님은 이와 같은 이야기를 누가복음 18장에서도 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의 원한을 풀어 준 이유를 말하기를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18:5)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도 응답의 근거는 우리의 간절함에 있기 보다는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간절히 기도하지 말란 말일까요? 한두 번 기도하고 매달리지 말라는 말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어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9절부터 12절까지 읽겠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2절부터 4절까지는 기도의 내용을, 5절부터 8절까지는 그 기도가 응답되는 근거에 대해 말씀하였고 9절부터 기도의 자세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간절히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줄 수 없겠노라 하겠느냐고 하신 주님의 자비와 관계에 의해 응답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이테이테'는 동등한 입장에서 구하는 '에로토'라는 헬라어와는 달리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구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기도'와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었습니다.(10:13;18:19;11:24;11:22;3:20). 그러므로 본문의 의미는 '받기 위해서는 구해야한다', '구하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다'로 이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또한 찾으라......, 찾을 것이요라는 말의 의미는 기도한 것을 얻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으로 옮겨야 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는 기도를 문을 두드리는 것에 비유한 예는 랍비들의 가르침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도를 함에 있어서 인내와 끈기를 가져야 함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1절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라는 말씀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의 청을 불의한 재판관이 자신을 날마다 괴롭히는 것이 싫어 들어 주었다는 비유를 들어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18:7)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의 결론부에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18:8)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응답하실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와의 관계성에 근거하여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줄 수 없겠노라 하겠느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이런 질문이 나올 법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나 기도하면 다 들어주시느냐?”라는 질문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야고보사도는 그의 글 43절에서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극명하게 육체의 쾌락과 죄에 관계 된 것은 당연히 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 못 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대부분의 기도제목은 칼로 무를 자르듯이 주의 나라를 위하여 구하는 것과 정욕을 위한 것을 구분하기는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어떤 것은 정욕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구하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생각해 볼까요? 우리가 의식주에 대해 구하는 것은 정욕일까요? 아니면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한 기도일까요?

병 낫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정욕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일까요? 범사에 형통하기를 구하는 것은 정욕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한 기도일까요? 교회의 숫자적 부흥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정욕을 위하여 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한 것일까요?

경제 활성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정욕을 위하여 구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구하는 것일까요? 어떻습니까? 칼로 무를 자르듯이 시원하게 O,X가 결정되십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극명하게 죄에 해당하고 주의 나라와 의를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의 일반적인 기도의 내용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주어진 모든 것을 기도해야 합니다. 그 기도의 내용의 옳고 그름의 결정과 응답은 주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기도를 통해 삶을 결정하고 기도를 통해 성도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얻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병 낫기를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바울이 잘못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요한도 장로 가이오를 위해 기도하면서 강건할 것과 범사가 잘 될 것을 기도했습니다. 잘 못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분명히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구하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819절에서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2122절에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기도의 내용이 확연하게 죄인 것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기도제목과 내용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기도할 뿐이고 그것의 응답여부는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은 그 응답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1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은 11절부터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들어 자녀가 무엇인가를 구하면 아버지는 악한 것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읽은 13절을 통해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육신의 아버지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데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신다는 의미로 성령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묘사하기를 너희”, “하늘아버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의 관계성과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근거하여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께 대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또한 그 응답이 성령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돈을 구하면 돈을, 건강을 구하면 건강을, 명예를 구하면 명예를 주시겠다고 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데 주님은 그런 것이 아니라 성령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주시리라는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미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다시 주신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성령이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응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구하면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 구한 것을 주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주시지 않는 이유에 대해 밝히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병 낫기를 구했을 때를 보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주시겠다는 말씀은 기도한 것을 허락하시든지 그렇지 않으면 기꺼이 그 환경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믿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기도한 것이 어떠한 응답으로 주어지든지 그것을 아멘으로 받을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46절과 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나아가 빌립보서 411절부터 13절에서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도의 내용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일상의 삶과 거룩한 성도의 삶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우리의 주되시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것을 믿고 구하여야 합니다. 오늘 제목처럼 줄 수 없겠노라 하겠느냐는 구하면 반드시 응답하겠다는 강한 긍정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여 성령을 응답으로 받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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