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성전 되게

예레미야 71-11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성전 문 앞에서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 문은 어떤 문인지 모르지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예배하러 성전에 들어가고 있고 그 앞에서 설교를 하게 되는 상황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주하게 성전에 예배하기 위해 마음을 조아리고 경건한 모습으로 성전에 예배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예레미야는 성전전이 성전이 아니라고 설교해야 했습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상황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장소였습니다. 그 규모와 역사는 차치하고 성전이 성전인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설교는 그 하나님의 집이라고 여겨지는 곳을 부인하고 있는 상황인 것입니다. 지금으로 하면 교회당 앞에 예레미야가 서서 교회에 예배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이것이 교회냐고 물으며 교회가 아니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당황스럽고 힘든 말씀을 선포하게 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성전 앞에서 가장 먼저 말씀하신 것이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길이란? 히브리어로 데레크입니다. 그 뜻은 도로, 태도, 방식입니다. 이 중에서 본문에서는 태도방식이란 의미로 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길을 바르게 하라는 의미는 그들의 삶의 태도나 방식을 바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의 바른 길에 대해 바르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백성의 길을 성전에 찾아 나아가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전 예배에 집중했고 그것을 행한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길을 가고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바르게 사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갈 길이라고 여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711절과 12절에서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했다며 책망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행위를 행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길을 말했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바른 삶이 없는 것에 대해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성전이란 길을 통해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도리어 성전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가야할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그 이름을 두신 하나님의 집에 나아가 정성껏 제물을 드리면 자신들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참 된 길을 성전에서 정성껏 드리는 제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종교행위와 종교인의 삶이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슬프게도 성전은 그들의 회개와 변화를 가로막는 근본 원인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길을 바르게 하라고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문제는 행위입니다. 그들은 행위가 바르지 않았습니다. 3절을 좀 더 자세히 묘사하며 말씀하고 있는 구절은 5절부터 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본문에서 행위에 대해 다양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 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씀과 반대의 삶을 살았음을 말씀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행위, 즉 성전에서의 행위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백성의 행위를 다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을 통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단지 성전 안에서의 종교 행위로 만족하고 그것으로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전 안에서의 종교행위 보다 더 힘든 성도의 삶에 대해서는 일부러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거룩한 삶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대로 정의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했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고 다른 신들을 섬긴 것입니다.

 

현대 교인들도 이렇게 행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아니 제 속에도 아주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종교적 행위에만 집중하고 세상 속에서 행해야 할 일들을 소홀히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바르게 행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는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손해를 끼친 행위로 얻은 포도주를 마시며 그들에게서 빼앗은 옷을 입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속여 빼앗은 재물로 하나님께 드립니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데 자신은 교회 안에서 기뻐하며 노래하는 것입니다.

가까이는 배우자에게 진실하게 행하지 못합니다. 다른 이성에게 눈을 돌리고 육신으로는 배우자를 안으면서 마음으로는 다른 이성을 품에 품습니다. 자녀들로 분을 품지 않게 하라고 했음에도 부당한 대우와 부모라는 권위로 자녀를 노엽게 하여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습니다. 또한 부모를 온전히 섬기지 않고 짐으로 여기기에 존중도 없고 사랑도 없습니다. “시월드라는 말이 아무렇지도 않게 쓰입니다. 자식을 위해 10만원 쓰는 것에는 아끼지 않으면서 부모를 위해 1만원을 쓸 때는 주판알을 튕기는 모습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이 모든 행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서 우리의 행위를 바르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전 밖에서 행위는 없고 성전 안에서의 행위로 자신들의 죄를 가리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8절부터 1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보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하는도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무익한 거짓말을 의존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무슨 거짓말을 믿었을까요? 그것은 4절에서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이라는 건물이 여호와의 성전이기에 그곳에서 정성껏 제사를 드리면 자신들은 복을 받고 영원히 보존 될 것이라는 믿었는데 이를 거짓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거짓말을 무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믿음은 무익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전이 있기 때문에 안전하리라 생각하고 건물을 의뢰하고 있었습입니다. 거짓선지자들은 히스기야 왕 당시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해 왔다가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왕하 19:35)는 역사적인 사실을 들어서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는 대대적인 회개운동이 전개되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었던 상황이었고, 지금은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5:1)고 말씀하시는 형편인 것입니다.

 

저들은 성전이라는 건물을 믿을 것이 아니라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여 하나님을 의뢰했어야만 옳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솔로몬에게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다(왕상 9:6-7)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무익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 믿음인 대속을 통한 구원에 대한 믿음보다는 이 땅의 부요와 성공을 주는 하나님으로만 믿는 믿음을 소유한 이들이 아주 많습니다. 이 믿음은 무익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주어진 생명에 대한 믿음과 그 은혜에 감사하여 기꺼이 주의 이름으로 주님께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믿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9절과 10절에서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라고 하심으로 그들이 하나님을 바르게 믿지 않고 있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온갖 더럽고 가증한 행위를 해 놓고서는 하나님의 성전에 와서 우리는 구원을 얻었기에 망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나아가 더 나쁜 행위들을 행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1절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 보라 나 곧 내가 그것을 보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님은 그들에게 반문합니다.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고 말입니다. 이 말씀의 의도는 4절의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는 거짓말과 연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이 성전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11절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안에 들어와 제사하는 사람들로 인해 성전이 성전이 되지 못한 것입니다. 마치 도둑이 이곳저곳을 다니며 도둑질하고 성전에 들어와 제물을 드리므로 자신이 한 모든 짓이 사함을 얻었다고 생각했고 평안을 얻고 있기에 성전은 도둑의 소굴이 된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한 주간 동안 세상에서 온갖 더러운 짓을 행하고 주일 예배에 와서 헌금을 드리고 예배를 드림으로 일 주일 동안의 모든 죄로부터 숨으려고 하는 행위입니다. 이는 구약에서 속죄제는 잘 드리나 속건제는 드리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오대 제사가 등장합니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입니다. 이 중에 앞에 세 개는 자원제이기에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말 그대로 자원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뒤에 두 개, 속죄제와 속건제는 반드시 드려야하는 의무제입니다.

 

이 중에서 속죄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게 되었을 때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속건제는 수평관계 속에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웃에게 해를 끼쳤을 때 그들에게 배상을 하고 돌아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둘 중에 한국교회가 열심을 내는 제사는 속죄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회기도는 아주 열심입니다. 아마도 돈이 안 들어서 그런가 봅니다. 하지만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해야하는 속건제는 잘 드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은 교인들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면서 교회에 가서 예배 한 번 드리고 평안해져 나오는 교인들의 신앙을 좋게 보지 않기에 그들에게 전해지는 복음도 거부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주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들으면 소름끼치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에 대하여 내가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보라

 

하나님께서는 실로에 가서, 보라하십니다. 이 시점에 실로를 언급하시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무엘상 1장부터 4장까지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부패한 엘리 제사장 당시 하나님께서 저들의 죄악을 징벌하시기 위하여 블레셋군의 손에 붙이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자 장로들은 길과 행위를 바르게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삼상 4:3) 하고 언약궤로 막아보려 하였다가 빼앗겼던 비극적인 사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승리를 위한 도구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승리는 주는 도구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것으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고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자신을 상징하는 법궤를 블레셋에게 넘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실로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도시 기능을 잃었고 성막도 예루살렘과 아나돗 사이에 있는 놉 땅으로 옮겨지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런 역사가 있었기에 예레미야는 지금 상황이 그때와 유사했던 실로에 가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3:1) 하심같이 저들이 의뢰하고 있는 성전을 없이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부터 15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성전을 실로와 같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제 너희가 그 모든 일을 행하였으며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실로에 행함 같이 너희가 신뢰하는 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 곧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곳에 행하겠고 내가 너희 모든 형제 곧 에브라임 온 자손을 쫓아낸 것 같이 내 앞에서 너희를 쫓아내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에브라임은 북 왕국의 열 지파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들은 앗수르로 쫓겨났고, 유다는 바벨론으로 쫓겨날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합니까?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성전 중심,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식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과 행위가 없이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종교적인 행위만으로 평안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는 어리석은 자는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실로와 예루살렘이 겪었던 아픔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오늘 제목처럼 성전이 성전 되게 하는 일이 가능해 질까요? 당연히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한 가지가 선행되어야 가능합니다.

 

그것은 듣는 것입니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비참한 상황에 이른 것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듣지 않은 것입니다. 듣지 않았다는 말 속에는 그들의 적극적인 의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들리지 않아서 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귀에 들리나 그대로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듣는다라는 말은 행위를 동반한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듣지 않았다고 하는 말은 귀로는 듣고 있으나 행위가 없었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24절과 26, 27절과 28절에서 네 번이나 순종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4절을 시작하면서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라고 했고

26절에서도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라고 했으며

27절에서도 그들이 너에게 순종하지 아니할 것이요 네가 그들을 불러도 그들이 네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니라고 했으며

28절에서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교훈을 받지 아니하는 민족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듣지 않는 민족, 순종하지 않는 민족이었습니다.

 

반면에 주님은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백성들을 향해 끊임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13절에서는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했다고 했고 25절에서는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는 오직,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울을 향한 사무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삼상15:22,23)라고 한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미가에게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6:6-8)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수많은 재물보다 듣는 것을 원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길과 행위를 바르게 행하면 복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 복은 바로 성전이 성전 되게 하시는 복입니다.

 

주일성수, 십일조, 금식기도 같은 교회 내에서의 종교행위를 통해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10)고 자위하지 맙시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서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예배당을 가리켜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익한 거짓말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령의 전(고전6:19)이라고 하셨습니다. 성전은 성도의 몸입니다. 나아가 구원 얻은 성도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고전3:16)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이 성전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알고 우리의 공동체나 우리의 심령이 도둑의 소굴이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있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이 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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