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게 기뻐하라

스가랴 99-17

 

개혁교회에서는 오늘을 종려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반의 공생애를 마치시고 최후 일주일을 앞에 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날과 절기와 먹는 것이 우리를 정결하게 하는 것과 상관이 없지만 우리는 이날을 기억하고 이날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기억하는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이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유월절에 모인 약 50만 여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던 것에서 유래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기대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었고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 뜻은 여호와여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대하며 외쳤지만 주님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입성하고 계신 날이었습니다.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아니 사람들의 기대보다 더 큰 영혼의 구원을 위해 입성하신 날입니다.

 

이 날은 오늘 본문의 말씀이 예고하였던 대로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서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크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그들이 기뻐하고 즐거워 할 일을 이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그 이유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왕이 임하시는 것과 관계하여 먼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8절인데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쳐서 적군을 막아 거기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 포학한 자가 다시는 그 지경으로 지나가지 못하리니 이는 내가 눈으로 친히 봄이니라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둘러 진을 쳐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표현과 행위는 구약성경에서 계속된 사건과 표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던 아브라함에게 너는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가 됨이니라(15:1)라고 하였고 엘리사 때에 아람군에게 포위되어 있던 도단성도 하나님의 군대가 지켜 주고 계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또한 오늘 본서 25절에서도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듯 예루살렘을 둘러 진을 쳐 주시고 그 불꽃같은 눈으로 친히 지켜보고 계심으로 적군을 막아 포악한 자가 다시는 그리로 지나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은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해 주신 약속입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의 임재로 성취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9절에서 네 왕이 임하시나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왕을 묘사하기를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라고 하고 계십니다.

 

왜 예루살렘에 임하실 왕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 것일까요? 당시 장군은 말을 탔고 왕은 노새를 탔는데 왕으로 임하시는 분이 나귀를 타신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귀는 존귀하지 못합니다. 생긴 것도, 크기도, 역할도 훌륭하지 않습니다. 거기다 새끼라면 더더욱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위엄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귀, 그것도 새끼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겸손하시다는 말은 이전의 통치자들과는 대조됨을 의미합니다. 이전의 통치자들이 억압하고 착취하며 포악한 통치를 했다면 주의 백성에게 임하실 메시야는 겸손으로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스가랴의 예언대로 새끼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추종하고 이제 자신들의 왕으로 추대하려고 할 때였음에도 주님은 말이나 노새가 아닌 새끼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영웅적인 지배자가 아니라 멍에를 맨 섬기는 자로서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최후의 만찬 때도 겸손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13:4)라고 하셨고 평소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듯이 당신이 먼저 당신의 십자가의 멍에를 지신 것입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임하신 주님은 화평을 이루셨습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하나님은 주의 백성들에게 임하실 왕이 임하셔서 하실 일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겸손한 통치에 이어 화평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화평을 전하기 위해 먼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예루살렘은 남유다를 대표합니다. 그런데 이 남북 모두에게서 병거와 말을 끊겠다고 하고 계십니다. 이는 이들을 무력화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하고 있는 시기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만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 할 때이므로 북이스라엘은 아주 없을 때입니다. 그런데도 북이스라엘을 거론하는 것은 과거 북이스라엘이 존재할 때 남북이스라엘이 서로 전쟁하고 갈등하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전에는 그들이 서로 갈등하고 다투었지만 이제 주님의 통치가 임하면 모두가 평화롭게 지낼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화평이 이스라엘 안에만 머물지 않고 이스라엘을 통해 화평이 열방으로 퍼질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갈등을 해결하시고 화평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이 화평은 이스라엘을 넘어 전 세계 열방에 이 화평을 전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통치입니까? 그것은 겸손하고 화평을 이루는 통치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화평을 주신 것에 대해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2:14-15)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서는 이를 상징적으로 표현했는데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11:6-8)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화평을 전하시는 것은 어떤 일을 통해 하신 것일까요?

1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너로 말할진대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

 

이 구절을 현대인의 성경은 내가 너희와 피로 맺은 계약을 생각해서 너희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구출하겠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메시야가 이스라엘에게 화평을 전하고 그것을 이루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피로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24장에서 시내산에서 피를 뿌려 언약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사제도를 통해 짐승의 피를 뿌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계속 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희생 제물 되셔서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목제물 되심을 예표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 중에 가장 강력한 예표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그 피를 바른 자는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피로 맺은 언약으로 인해 우리에게 화평을 주신 것입니다. 이 화평은 상징적이거나 사변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영혼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본 절 후반에서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다고 한 것입니다. 마치 요셉을 구덩이에서 건진 것처럼,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건진 것처럼, 다윗이 블레셋과 사울의 손에서 건진 것처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 실제적인 구원으로 인해 우리에게 화평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기에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 너희는 요새로 돌아올지니라 내가 오늘도 이르노라 내가 네게 갑절이나 갚을 것이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갇혀 있으나 소망을 품은 자들아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일차적인 대상은 바벨론 포로에 있는 자들입니다. 나아가 이 말씀은 육신이 이 땅의 삶에 매여 있으나 영혼은 메시야를 통해 구원과 회복에 대해 소망을 품은 자를 의미합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요새로 돌아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일차적인 요새는 예루살렘입니다. 이것도 궁극적인 요새는 바로 예수님의 품인 것입니다.

 

다윗도 노래하기를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9:9)라고 했고 이사야도 254절에서 주는 포학자의 기세가 성벽을 치는 폭풍과 같을 때에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할 때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 48개의 성읍을 주셨습니다. 그 중에 여섯 개는 도피성으로 허락했는데 이 성은 부지중에 살인한자가 피할 수 있도록 한 성입니다. 이 성에 있는 자는 피의 보복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환란 당한 자들의 요새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대제사장이 죽으며 모든 책임을 면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이도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 피한 모든 자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그 모든 형벌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우리의 완전한 요새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돌아와야 하고 환란 당한 자들을 주님께서 인도하여 영혼의 구원을 얻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여 성경을 기록하였습니다.

 

본 절 후반에 이렇게 주님께 돌아온 자들에게 주어질 은혜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갑절의 회복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돌아온 이스라엘이 과거에 자신의 죄로 인해 당했던 고통과 아픔을 주님께서 적극적으로 위로하시고 회복하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절이나 갚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단지 본문에만 있지 않습니다. 욥이 환란을 당한 후에 회복을 말 할 때 잃어버렸던 것의 배를 받았습니다.

 

요엘은 요엘서 225절에서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대 곧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십니다. 과거의 죄를 묻지 않으십니다. 마치 돌아온 탕자에게 책임을 묻거나 내치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61절로 2절은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요새 즉, 주님이 품으로 돌아온 자는 갑절이나 갚음을 입을 뿐 아니라 강하게 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 여호와께서 그들 위에 나타나서 그들의 화살을 번개 같이 쏘아내실 것이며 주 여호와께서 나팔을 불게 하시며 남방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을 호위하시리니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

 

하나님은 주의 백성에게 승리를 주시는데 그들을 강하게 해주어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유다를 당긴 활로 삼고 에브라임을 끼운 화살로 삼았으니 시온아 내가 네 자식들을 일으켜 헬라 자식들을 치게 하며 너를 용사의 칼과 같게 하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하나님은 헬라 후기 셀류쿠스 에피파네스의 박해 때에 마타디아스와 그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헬라에 대항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이겨 독립을 쟁취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힘을 주시어 골리앗을 이기게 한 것과 같이 그가 미약한 자들에게 힘을 주시어 승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성경 속에 아주 많습니다. 기드온의 삼백 명을 통하여 미디아의 큰 군대를 이겼으며, 아무 힘도 없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철병거 구백 대를 이긴 것 등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15절에서 그들이 원수를 삼키며 물맷돌을 밟을 것이며 그들이 피를 마시고 즐거이 부르기를 술취한 것 같이 할 것인즉 피가 가득한 동이와도 같고 피 묻은 제단 모퉁이와도 같을 것이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원수를 삼킨다는 말은 이긴다는 뜻입니다. 또한 물맷돌을 밟는 것은 대적들이 던진 물맷돌에 해를 당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밟고 전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피를 마심은 대적을 이겼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하여 주셔서 이기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도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1:6)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사야서 4110절은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린 이미 이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탄의 머리를 이미 밟으셨습니다. 창세기 315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 길을 믿음으로 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 성도는 영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 날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자기 백성의 양 떼 같이 구원하시리니 그들이 왕관의 보석 같이 여호와의 땅에 빛나리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양떼같이 구원하심은 자력으로 자기를 방위할 수 없는 양과 같은 자들을 오직 주님의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들이 전적으로 그들의 무능을 깨닫고 하나님을 목자와 같이 볼 때 하나님이 그 능력으로 그들을 돌보십니다. 그 결과, 주의 백성은 왕의 면류관에 보석이 빛남과 같이 하나님의 왕권으로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다스리고 저들은 다스림을 받는 관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세계에 언제나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601절에서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다니엘서 123절은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인도하는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될 것은 그분의 입성과 죽으심 때문입니다. 성도가 승리하고 풍성하게 되는 그 이유는 바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근거한 상상할 수 없는 희생 때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의 형통함과 그의 아름다움이 어찌 그리 큰지 곡식은 청년을, 새 포도주는 처녀를 강건하게 하리라

 

본문의 결론으로 주의 백성의 형통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찌 큰지라고 한 것은 그 백성이 누릴 형통과 아름다움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풍성함이 곡식과 포도주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을 강건하게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통해 말씀하신 당신의 살과 피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곡식은 떡을 의미하는 그분의 살을, 포도주는 주님의 피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의 백성의 영혼은 주님의 살과 피로 살아났고 그것으로 형통하며 아름다워져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크기 기뻐하고 즐거이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4321절의 말씀처럼 이 백성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라고 하신 말씀은 이러한 때를 위해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들어가신 이유, 그것은 한 마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기꺼이 따르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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