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전서 1:1 주 안에 있는 교회

by 하림 posted Feb 1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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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 있는 교회

살전1:1

 

오늘부터 데살로니가서를 강해하려고 합니다. 이 시대가 어둡고 특히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해 오해하거나 도외시하는 경향이 강한 이 때 바른 종말 신앙을 위해 데살로니가서를 강해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신약성경이 모두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해 언급하고 부활신앙에 대해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에 합당한 삶에 대해 강력하게 말하고 있는 성경이 있다면 그것은 데살로니가서와 베드로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일 것입니다.

특히 데살로니가서는 매 장마다 그리스도의 강림이라는 단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데살로니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긍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부정적 영향을 끼쳤던 재림 신앙에 대해 가르친 바울의 가르침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며 신앙 생활해야 하는지를 알고자 합니다.

 

데살로니가는 역사적인 도시입니다. 데살로니가가 처음 생긴 유래는 알렉산더가 죽은 후 그의 부관이었던 카산더가 마케도냐 지역을 차지하고 알렉산더의 이복누이였던 데살로니카와 정략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도시를 건설하고 데살로니카의 이름을 따서 세운 도시입니다.

 

카산더는 주변에 있던 25개의 다른 성읍 주민들도 이곳으로 이주시켰고 BC 146년 로마에 의해 마게도냐가 정복되었을 때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 속주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BC 42년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가 줄리어스 시저를 암살한 부르터스와 교전을 벌일 때 데살로니가는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했고 승리한 후에 자신들을 지지한 데살로니가에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로서 많은 자치권과 특권을 베풀었습니다. 이때부터 데살로니가는 자체의 시 행정장관을 세우고 생활해 가는 자유시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는데 이를 사도행전 17장에서는 읍장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배경에 따라 데살로니가는 로마 정부에 충성을 다 했으며 제국 숭배 사상인 여신 로마를 숭배하였습니다. 또한 황제를 신으로 숭배했습니다. 동시에 데살로니가에는 토속적인 신비 종교들이 성행하고 있었는데 중 대표적인 토착 종교는 디오니소스 숭배와 카비루스 숭배였습니다. 그 결과 우상숭배가 강했고 음란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도시에 바울 일행은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잘해주지 못해서 더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 군대에 보낸 아들에게 그러할 것이고, 돌아가신 부모님께 그러할 것입니다. 그래서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있는 것이겠죠.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데살로니가교회는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시작할 때 그의 계획은 1차 때 세웠던 교회인 갈라디아지역의 교회를 돌아보고 좀 더 진행해서 터기 서부해안의 드로아를 거쳐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흑해 하단부를 거쳐 자신이 출발한 시리아 안디옥으로 오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드로아에 있을 때 하나님은 환상으로 바울을 그리스지역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리스 상부인 마케도냐지역으로 배를 타고 건너갔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도시인 빌립보에서 전도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 교회를 세웠지만 귀신들려 점치는 아이를 고쳐준 사건으로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 그 아랫 도시인 데살로니가에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지역에서도 복음 전하는 일은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쫓아다니면서 바울을 방해하고 죽이려했기 때문에 3주 밖에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 실라는 베뢰아에 남겨 둔 채 바울은 배를 타고 아테네에 이르렀고 후에 고린도에서 일 년 반이라는 세월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테네에 있을 때 디모데가 데살로니가로부터 왔습니다. 그는 바울에게 데살로니가 교회에 당면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보고하였습니다. 이를 들은 바울은 다시 데살로니가로 디모데를 보내어 계속 목회 사역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아덴에서 고린도로 가서 일 년 육 개월을 유하며 주의 복음을 전하였는데 이때 디모데는 다시 고린도에 있는 바울을 찾아가 데살로니가 교회가 짧은 역사에 비해 신앙생활에 모범을 보이며 박해를 받는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믿음을 지켜나간다는 기쁜 소식을 전했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이 편지를 써서 디모데를 통해 데살로니가교회에게 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데살로니가전서는 칭찬으로 가득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대해 잘해 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많았었는데 들려오는 이야기는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말임으로 칭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데살로니가교회에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인사말을 쓰고 있습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기서 실루아노는 실라입니다. 그들은 데살로니가교회에 편지로 인사하면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들의 관계성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다른 서신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을 썼다면 본문은 하나님 안에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데살로니가교회가 그리스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성 속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는 그분의 보호 아래 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가 데살로니가 교회를 감싸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교회 설립과 함께 고난을 당한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을 보면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졌을 때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의 이단정도로 인식했는데 그 이단이 들어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불량한 사람들을 충동질하여 성을 소란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사용되었던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바울 일행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야손을 비롯한 믿는 형제들을 끌고 가 심문을 하고 보석금을 받고 풀어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후서 16절과 7절에서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라고 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바울이 있을 때 뿐 아니라 그가 떠난 후에도 핍박은 계속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핍박 가운데서도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인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환란과 핍박 속에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음을 인식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며 많은 환란과 고난 가운데 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버지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도다 라고 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원까지 지켜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도 사르게 하지 않으시고 물 가운데로 지날 때도 침몰치 않게 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43:1-2). 그분은 수도 없이 많은 곳에서 강하고 담대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따를 표에 대해 요엘서 230절에서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돌보심을 받은 것처럼 주의 백성에게도 성령이 임하여 완전한 돌보심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도 잡히시기 전날 밤에 요한복음 163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호하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다는 말은 그분과 생명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신 사건을 분명하게 인식시켜 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켜 부활의 첫 열매가 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구원받은 우리들에게도 생명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성자 예수님의 죽어주심과 성령의 인쳐 주심으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이어서 21절은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5장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 우리가 아직 연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에게 생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시는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은혜와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우리에게 생명의 사귐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 사귐에 대해 요한일서 13절은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의 관계성에 대해 로마서 831절로 39절은 분명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같이 찾아 읽겠습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렇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어떤 건물 안에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큰 건물도 그 안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모여 있어도 그것들과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단지 모임일 뿐입니다. 우리가 예배당에 오고 헌금을 하며 주어진 일을 하고 있어도 그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으면 그것은 모두 헛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어떤 공동체에 속했다는 의미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분의 일을 하는 것이 그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분과 사귐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하는 행위입니다. 아무리 멋진 설교를 해도 아무리 아름다운 찬양을 해도 아무리 큰 헌신을 드려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지 않고 그분의 뜻 가운데 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그것은 그분의 말씀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10절에서는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15절도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그분의 말씀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 안에 있다는 말은 그분의 말씀을 지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2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시고 사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에게 축복하기를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의 인사말이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은혜와 평강은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과 명예가 있어도 이 은혜와 평강이 없다면 그것들은 껍데기일 뿐인 것입니다.

 

헬라인들은 기쁨이 있기를, 즐거움이 있기를이라는 인사말로 문안을 하였습니다. 반면에 히브리인들은 평강으로 인사말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은혜와 평강으로 인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구약에서 사용된 하나님의 자비와 평강에 대한 병행으로 주로 기도문에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입니다. 이 말은 달리 번역하면 호의, 친절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사도 바울이 사용할 때는 구원과 관련되어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먼저 은혜란 값없이 주어진 구원을 의미하는데 십자가에서 구체화되고 복음으로 선포된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이 은혜는 우리의 삶 전반에 미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 속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는 우리를 구원하고 보존하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말인 것입니다.

 

동시에 평강을 구하는 것은 평강은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 결과물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는 모든 실제적인 복의 근원이며 평강은 그 복의 궁극적인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채워지든 그렇지 않든 그 과정과 결과 속에서 주어지는 은혜의 실체가 평강인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46절과 7절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와 평강은 어떻게 풍성해 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베드로후서 12절에서 답을 줍니다.

기록되기를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더욱 많아진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다. 당연히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분을 아는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분을 아는 것은 그 말씀에 근거하여 그분의 뜻을 이해하고 삶을 통해 경험하는 것으로 그분을 더욱 풍성하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란 에피그노시스라는 헬라어입니다.

이는 이해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에 안다는 단어로 기노스코에피그노시스가 있습니다. 전자는 히브리어 야다에 해당하는 말로 경험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면 베드로후서 12절의 에피그노시스는 어떤 것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여 알 때 더욱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은혜와 평강을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 되고, 잘 먹고, 많이 모으고,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은혜와 평강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처할 줄 안다는 빌립보서 4장의 바울의 고백처럼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함으로 은혜에 감사하고 평강이 넘치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욥이 고난을 당했을 때 그에게는 은혜도 평강도 없었습니다. 오직 학습된 감사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 내면은 원망과 불평이 가득했습니다. 차라리 죽기를 구했고 자신이 이 땅에 태어난 것에 대한 원망만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해가 생긴 후에 진정으로 은혜와 평강이 생겼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고백하기를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으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은혜와 평강이 넘치게 되는 것에 대해 바울은 빌립보서 412절과 13절에서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능성의 신학이나 전능해 질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상황 속에서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받아들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능력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그분에 대하여 바르게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넘치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