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택하심
데살로니가전서 1장 4-5
말라기 선지자는 주전 400년경에 활동하던 선지자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 성전을 재건하고 예배를 재개하며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를 기대하던 때였습니다.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처럼 성전 재건과 예배 재개 후에 엄청난 일이 일어나거나 눈에 띄는 나라의 회복이 있지 않았습니다. 성전 재건 전이나 후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예배를 재개하고 십일조를 드려 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배를 등한히 했습니다. 오염되고 흠 있는 재물을 드렸고 형식적인 종교생활을 하는 자들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에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의 바르지 못한 신앙생활을 책망하며 후에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전하는 말라기의 시작부분인 1장 2절과 3절 초반에서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에 첫째인 에서보다 둘째인 야곱을 사랑하셨음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이는 창세기 25장에 있는 말씀을 근거로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아내 리브가의 뱃속에서 쌍둥이 에서와 야곱이 있을 때 말씀하시기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23절)”이라고 하셨는데 그 예언대로 에서는 버림받고 야곱이 그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는 야곱의 선한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선택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개념과 말씀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사야 49장 1절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에베소서 1장 4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도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본문에서 바울을 데살로니가교인들을 향해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라는 헬라어는 “아델포스”입니다. 이는 연합을 뜻하는 “아”와 자궁을 뜻하는 “델프휘스”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형제란 한 자궁을 통해 난 자를 일컫는 것입니다. 이런 형제라는 단어를 바울은 자주 사용합니다.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만 21회나 사용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과 형제가 되었던 것이 혈육에 근거한 관계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단지 친밀함을 나타내는 용어 정도로 사용된 것도 아닙니다. 이 말은 원어의 뜻처럼 한 자궁을 통해 한 피를 나누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고 새 생명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라는 의미의 형제인 것입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집에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었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족들이 밖에 섰다고 말하자 주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고 하시면서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마12:49)”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형제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형제를 수식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입니다.
이 말이 데살로니가교인들의 신앙의 근거였습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칭찬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된 것입니다.
나아가 많은 환란과 핍박은 그들에게 재앙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하나님과의 사랑이 더 깊어지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많이 받았다는 것입니다. 은혜라는 말이 “카리스”, “선물”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의 선물이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있었고 계속해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쓰인 “사랑하심을 받은”에 해당하는 헬라어가 “에가페메노이”인데 이는 현재완료분사로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미 완전하게 주어졌으며 현재에도 여전히 주어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도 그분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어도 그 시간을 통해 죄를 끊고 하나님과 새롭고 성숙한 관계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들이 현재 당하는 환란과 고난까지도 그분의 사랑인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고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혀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었기에 형통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사는 “이 풍랑인하여 더 빨리 갑니다.”라고 찬양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이 곧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본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을 형제라고 한 바울은 덧붙이기를 택하심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형제, 곧 그리스도의 형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구원함을 위해 택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은 성도를 가리켜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으로 구원을 얻기 위해 택하심을 입은 존재인 것입니다. 이 택하심에는 우리의 공로나 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장 12절과 13절에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택함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기업에 원서를 넣었을 때 택함을 받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수많은 남자와 여자가 있는데 사랑하는 배우자가 자신을 택해 주었다는 것도 행복한 일입니다. 하다못해 게임을 할 때 팀장으로 뽑힌 이가 자신을 팀원으로 선택해 주는 것도 행복합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무 공로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 좀 가난해도, 이 땅에서 지위가 높지 않아도, 자신이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여 주셔서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할 일이라 이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로 택하심을 입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가 바랍니다.
다음에서 이어지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아 택하심을 받은 형제가 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선택받은 형제가 된 원인으로 “복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시작은 “복음”으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 즉 복음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시작된 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적인 원인은 바울을 통해 전해들은 복음인 것입니다. 그들은 이 복음을 들음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열매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나아가 이 복음을 로마서 1장 16절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음을 듣는 일이야말로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복음을 읽고 듣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본문에서 “우리”라는 말로 수식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한 모든 일”이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전했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 했으며 예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우리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안 그런 복음도 있다는 말씀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갈라디아교회를 향한 편지에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복음”이란 말로 정의되었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내용을 말합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전해졌던 다른 복음은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며 행위를 내세웠던 거짓 복음입니다. 유다서에는 영지주의, 디도서에는 유대주의, 히브리서에는 천사숭배, 골로새서는 금욕주의 등으로 들어나는 모든 비복음이 다른복음입니다. 이런 바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르지 못한 복음에 근거해 신앙생활을 하면 그 신앙생활의 결국은 바울의 저주를 받겠다는 말처럼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6,7장은 산상수훈입니다. 이 가르침의 결론부인 7장 마지막을 보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본문에서는 반석 위에 지은 집에 대해 묘사하기를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말씀처럼 바꾸면 바른 복음, 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한 바른 복음에 근거한 신앙생활입니다. 반대로 다른복음에 근거하여 신앙 생활하는 자는 모래 위에 지은 집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은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며 비가 오면 무너지는 자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에 근거한 바른 복음관을 소유해야합니다. 교계가 혼탁해서 비복음이 복음보다 더 인기가 있는 지금 분별의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가르침과 삶의 모습이 성경에 근거한 것인지를 바로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생활이 복이 되고 나아가 우리가 하는 전도가 생명을 구하는 전도가 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전한 복음이 말로만 하지 않았다고 하는 의미는 성령의 감화나 감동이 없는 상태로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단어를 사용하고 설득력 있게 선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슴이 아닌 세치 혀에서 나온 말이라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바울이 이 글을 고린도에서 썼습니다. 그는 고린도에 오기 전에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는 자신의 학문과 언변으로 사람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리 큰 열매를 맺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에 왔을 때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 경험을 가지고 있던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 그가 드로아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마케도냐 지방의 빌립보에서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었습니다. 그곳에서 매를 맞고 풀려나 다음 전도지로 삼았던 데살로니가에서도 열심히 전했습니다. 그랬기에 박해를 받았고 3주 만에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말로 전하지 않았습니다.
구약에서 최고의 말씀학자라면 에스라를 들 수 있습니다. 그도 말씀을 전할 때 세치 혀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 할 때 그가 예루살렘에 가서 할 일에 대해 다짐하면서 한 말은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보며 그 살면서 경험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다(스7:10)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복음 증거자입니다. 세상을 향해 외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데 복음은 세치 혀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전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에 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입니다.
능력과 성령, 그리고 확신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능력은 성령께서 일하심의 외적인 표현입니다. 또한 확신은 성령께서 일하심의 내적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능력과 확신의 원동력이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요소인 ‘능력’을 단지 신비한 이적이나 현상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도 포함 될 수 있으나 그것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적과 신비한 현상의 능력은 부수적인 것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능력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령의 임하심으로 드러나는 거룩한 영성을 의미합니다. 영성을 구체적으로 하면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이적과 삶을 달리표현하면 은사와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열매를 맺는 것의 시작이 성령의 감화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심령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3절을 통해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하였고 이어서 정신을 차리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성이고 능력인 것입니다.
두 번째 요소인 ‘큰 확신’은 복음이 제시하고 있는 진리에 대한 분명하고 강한 믿음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확신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플레오포리아’라는 말인데 이는 문자적으로 ‘충만’, ‘풍부’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큰 확신을 달리 표현하면 복음이 그들의 심령을 충만하게 채우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믿음에 흔들리지 않고 그 믿음을 위해 기꺼이 삶과 생명을 드릴 수 있는 사람들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그러했고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죽음의 순간에도 매우 분명한 확신으로 천국을 소망하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그가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 죽음을 앞에 두고 쓴 서신인데 그 글의 서두에 자신을 가리켜 “생명의 약속을 받은 자”라고 소개합니다. 이 말은 죽음 앞에서 했다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는데 고백하기를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1:12)”고 했습니다.
또한 고백하기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2:11-13)”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가장 강력한 확신은 4장에 있습니다. 고백하기를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4:7-8).”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단에 드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11:9).”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큰 확신으로 믿음을 지켰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도 말씀을 큰 확신으로 믿는 신앙인이 되어 환란과 고난 중에도 나아가 이 세상의 수많은 유혹 중에도 요동하지 않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 번째 요소는 성령입니다.
본문에서는 순서상 두 번째 기록되었지만 능력과 큰 확신의 원인이 성령이기에 세 번째 요소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성도의 구원의 모든 과정에 관여하시는 분입니다. 성도에게 예수님을 믿게 하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도우며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요엘서 2장은 성령이 임하면 표적이 따른다고 하면서 “피와 불과 연기”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 세 가지 표적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졌던 것들이었습니다. 피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장자의 죽음을 면한 것을, 불과 연기는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한 주의 백성에게 따르는 표를 달리 표현하면 구원과 인도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가셔서 다른 보혜사로 각자의 심령에 임하셔서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시고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구원의 과정을 주관하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2장 3절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도 사도행전 1장에서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정말 약속하신 대로 성령이 임했고 그 결과 담대히 나가 복음을 전하며 주를 위해 기꺼이 죽는 존재가 되었으며 거룩한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보며 거룩한 능력과 큰 확신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5장 18절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무엇보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택하심을 입은 형제라고 부르시면서 그 일이 성령의 역사로 된 것이며 외적으로는 믿음의 능력이 내적으로는 큰 확신이 있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데살로니가교인들처럼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택하심을 입어 성령을 통해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내외적인 표식인 거룩한 삶의 능력인 영성과 내적인 큰 확신이 있어 천국 가는 그날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승리로 있는 주의 백성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