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소문
데살로니가전서 1장 6-10절
옛 속담에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문 하나가 잘나면 흥하기도 하고 잘못된 소문 하나로 인해 망하기도 합니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를 시끄럽게 했던 연예인 타블로 가짜 학위 사건은 그 진위에는 관심 없이 소문이 소문을 낳아 거짓은 진실이 되었고 결국 한 가정을 무참하게 짓밟았습니다. 이뿐이겠습니까? 소문의 위력은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아주 긍정적인 소문의 능력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데살로니가교인들에 대한 소문입니다. 이 소문의 내용과 그 소문의 원천이 무엇인지 보면서 함께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먼저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믿는 자의 본이 된 것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6절부터 8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
데살로니가교인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게도냐는 데살로니가를 중심 도시로 한 그리스 북쪽 지역을 말하고 아가야는 고린도를 중심으로 남쪽 그리스 전 지역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의 거룩한 소문은 그들이 속한 북쪽 지역에서만 퍼진 것이 아니라 바울이 현재 거하고 있는 고린도 지역을 포함한 그리스 전역에 퍼졌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본이 된 것에서 한정하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입니다. 믿음의 소문은 믿지 않는 자와 믿는 자 모두에게 퍼집니다. 하지만 그것이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그룹은 믿는 자입니다. 비록 장기적으로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게 되지만 당장은 믿음의 소문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이상한 것으로 보이거나 심지어는 핍박의 근거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소문의 기본은 “믿는 자들에게”입니다. 나아가 이 칭찬은 믿는 자들의 중심에 존재하는 그리스도께 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인 우리들이 칭찬받아야 할 가장 궁극적인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께 인정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이 인정하지 않아도 그리스도께서 인정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어느 찬송가에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사람 부럽지 않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에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진정으로 인정받아야 할 대상은 오직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서 데살로니가교인들이 믿는 자의 본이 되었다고 말할 때 ‘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폰’인데 이는 망치로 두드려 생긴 자국이나 원래의 모양과 같은 흔적을 새겨 넣기 위해 동전을 만들 때 사용하는 음각 틀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찍어서 생긴 표”, “일격을 가한 흔적”이라는 뜻으로 이는 “똑같이 따르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데살로니가교인들이 믿는 자들에게 본이 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바울 일행이 살았던 것을 그대로 따라 살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또한 바울 일행은 6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그리스도를 본 받아 살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믿는 자의 본이 된 것의 ‘본’은 그리스도입니다. 그 소문이 믿는 자들에게 퍼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는데 있어서 모범을 보인 것은 바울일행에게서 볼 수 있었던 '그리스도의 모범'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기쁨으로 복음을 받아들였고 복음에 근거하여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제가 몇 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씨름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목회가 무엇이냐를 것입니다. 제가 목표를 정하고 성도들을 그리로 몰아가고 어떤 때는 정치적이어야 하고 어떤 때는 강력한 리더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목회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고민하며 제 자신 속에 없는 성품들과 영향력 없음에 고민하며 씨름했습니다. 그러던 중 주께서 제게 보여주신 한 컷의 그림으로 한 번에 해결해 되었습니다. 한 무리의 양떼 앞에서 가는 목자와 그 목자가 따르는 목자장의 그림이었습니다. 목회는 제가 계획하고 양떼들을 몰아가고 정치적이나 세상적 리더십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목회자는 그리스도를 따르고 양떼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목회를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우선적인 초점을 양떼가 아니라 그리스도여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의 거룩한 본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본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와 우리교회는 한국교회와 세계 열방의 교회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보다 앞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성도와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이 소문의 내용에 대해 말합니다.
9절과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이 소문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그 모든 내용 속에는 “어떻게‘라는 말이 들어가 있습니다.
먼저는 바울일행이 그들에게 들어갔을 때 그들이 바울 일행을 어떻게 대해주었는지에 대한 소문이 났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현대인의성경과 공동번역 그리고 현대어 성경은 “이것은 우리가 여러분을 방문했을 때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환영해 주었으며”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일행이 그들에게 들어갔을 때 그들은 바울 일행을 환영하였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식사를 대접하고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울일행이 소유한 복음, 그들이 전한 복음에 대한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꺼이 바울 일행이 소유한 복음을 환영한 것입니다.
이를 비유로 하면 우리가 전도자로 점집에 갔을 때와 손님으로 갔을 때의 대우는 분명히 다른 것과 같습니다. 손님으로 갔다면 환영받겠지만 전도자로 가면 소금을 한바가지 뒤집어 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이 바울 일행을 환영한 것은 기꺼이 그들에게 있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환영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달리 표현하면 영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입니다.
이들이 바울일행을 영접할 때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로 들어간 날은 그에게 있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할 때 비방과 훼방, 박해 등 많은 고난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미 읽었던 6절에서는 “많은 환란 가운데서”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환란도 함께 받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환영하며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담후 1:8)”,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미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영접하였음을 믿습니다. 그 영접과 함께 이전에 없던 고난도 함께 받은 줄 압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고난이 장차 우리가 받을 영원한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바울의 말은 기억하며 기꺼이 참아내며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서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어떻게 섬겼는지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본문에서는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결단을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의 말씀처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결단을 해야 함에도 하지 못합니다. 성도들은 말씀을 듣거나 어떤 도전을 받으면 그렇게 살겠다고 결단을 합니다. 하지만 그 뒤에 따라야하는 삶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결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결정했을 뿐입니다. 결단은 행동과 관련된 말입니다. 지금 이 시대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결정이 아닌 결단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아무리 많은 마음의 결정을 해도 삶의 결단이 없다면 그것은 야고보의 표현대로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결정 뒤에 분명한 결단이 있었습니다. 우상을 버렸습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여신 로마, 디오니소스, 카비루스 등과 같은 우상들을 숭배했었으며 그들의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우상들은 언제나 실존하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각각의 우상들은 그들에게 일상적인 삶의 동반자였고 그 우상들을 거부한다는 것은 그 사회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에게 우상 숭배는 모든 국면에서 자신들의 생활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더구나 데살로니가는 당시 최고의 신으로 알려진 제우스를 섬기는 올림포스산으로부터 불과 80여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우상숭배와 밀접한 생활을 하고 있었 이들이 우상을 버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우상 숭배에 빠져 방황하던 자들이 참 하나님에 대한 복음을 듣고 이제는 이전에 우상을 섬기던 모든 생활에서 돌이켜 거룩한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옛날의 악습들에 대한 단호한 단절, 즉 생의 근본적이고도 전인격적인 전환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버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여기서 돌아왔다는 표현은 ‘회심’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돌아왔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페스트 렙사테”입니다. 이는 “~로 돌아가다, 돌이키다.”라는 뜻으로 이전에 향하던 방향에서 몸을 돌이켜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우상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온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이와 비슷한 단어로 ‘메타노이아’란 말이 있습니다. ‘회개’라고 번역된 말인데 이는 “마음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의 관계는 먼저 마음을 바꾸고 그 결과로 삶을 이전의 삶에서 새로운 삶으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회개하라고 말하고 사람들이 회개 했다는 말은 마음을 바꾸어 먹고 삶의 방향을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진정한 돌이킴, 즉 회개가 있습니까? 이전에 섬기는 세상에서 온전히 돌이켜 주님께로 향하여 나아가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이 진정한 회개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마음을 온전히 바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온전히 바꾸지 않은 이유를 본문은 암시하기를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임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알고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실감하며 만물 중에 하나님만이 참되신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로 돌이킴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해 깊이 있게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돌이킴은 이전 것들로부터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죄 짓는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기 전으로 족하다고 했고 그 모든 것에 죽은 존재 즉 이전의 삶과는 상관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그것과 단절해야 합니다. 술취함과 방탕함, 음란함과 폭력의 삶, 도둑질과 거짓 등의 삶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러한 삶으로부터 온전히 돌이키기 위해 주님의 은혜와 말씀, 성령의 강권적인 역사를 구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향했던 삶의 방향을 포기하고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 자들을 가리켜 베드로는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눅 9:62).”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직 우리가 버리지 못한 우상이 있다면 그에게서 온전히 돌아서서 하나님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마지막으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어떻게 기다렸는지에 대한 소문이 퍼졌습니다.
본문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이 많은 환란 가운데도 신앙의 본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신앙이 재림신앙에 기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설교를 듣고(행17:3)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과 함께 그 뒤에 따르는 재림 또한 분명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재림신앙에는 조금의 문제가 있었지만 재림 신앙을 기꺼이 이 땅의 것들을 분토와 같이 여기게 하였습니다. 명예도 재물도 가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받는 고난에 대해 “잠깐 고난”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인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하면서 자신이 이 땅의 것들, 즉 출신, 학벌, 재물 등을 배설물과 같이 여길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함이니(빌3:10,11)”라고 하였고 자신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신앙, 재림신앙을 소유한 성도는 이 땅의 것들에 잠시 고난을 당하고 그 부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는 하나 그 신앙을 넘어지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딤후2:9).”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그들이 강림을 기다린다고 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한다고 했는데 ‘어떻게’에 답은 ‘기다리는지’라는 단어 속에 있습니다. ‘기다린다’는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나메네인’입니다. 이는 아주 간절한 소망을 의미합니다. 절실한 기다림이라고 표현해야하는 단어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다린다’로 표현하고 있는 다른 곳은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곳 한 곳에서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아주 강력한 기다림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단어를 누군가가 오기로 되어 있는 사람을 인내와 신뢰로써 기다림을 함축하는 개념이라고 말하였으며(Grimm-Thayer)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기대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말하였습니다(Findlay). 그리스의 부활로 말미암은 그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성도가 갖는 최고의 소망이며, 아울러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과 인내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말하면 이단 취급받는 이상한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말하고 기다려야합니다. 재림신앙을 이단들의 전유물로 내어주어서는 안됩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려야 이 땅의 삶에서 온전히 돌이켜 하나님께서 향하는 믿음을 온전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찬양이 있지 않습니까?
1. 하나님의 나팔소리 천지진동 할 때에 예수 영광중에 구름 타시고 천사들을 세계만국 모든 곳에 보내어 구원 얻은 성도들을 모으리
2. 무덤 속에 잠자던 자 그때 다시 일어나 영화로운 부활승리 얻으리 주의 택한 모든 성도 구름 타고 올라가 공중에서 주의 얼굴 뵈오리
3.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우리 알 수 없으니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어서 기쁨으로 보좌 앞에 우리 나가서도록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겠네
[후렴]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부를 때에 잔치 참여 하겠네
나팔 불 때 우리의 이름이 불려질 날을 간절히 소망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소문의 시작, 이 거룩한 일의 시작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읽은 6절 말씀에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이 모든 거룩한 일의 시작은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바울이 들려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여기서 '주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의 예언서에 자주 나오는 말로서 바울 서신에서는 본서(4:15)와 후서(살후 3:1)에서만 나타납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사람들이 굳게 믿고 있는 바가 무엇임을 잘 드러내 주는 표현입니다. 즉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자신들이 선포하고 있는 말씀이 인간 지혜의 산물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말씀을 받을 때에 기쁨으로 받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육신이 원하는 방향이 아니라도 그것이 주님의 말씀이고 우리의 영혼에 약이 된다면 기꺼이 기쁨으로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받을 때 ‘성령의 기쁨’으로 받았다고 말 합니다. 이는 세상이 주는 기쁨과 반대되는 개념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잘되고 흥하는 이야기 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주는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많은 환난이 전재하듯이 고난 속에서도 참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을 의미합니다. 나아가 이 믿음을 성령께서 허락하셨다는 뜻도 포함합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거룩한 신앙의 뿌리는 말씀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바울을 그들을 칭찬하면서 “어떻게”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들의 본이 되는 신앙의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환영하고 그 결과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어떻게 기다렸는지에 대해 칭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주님으로 영접하여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기쁨으로 받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