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기쁘시게

데살로니가전서 23-5

 

에스겔은 당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34:2-3).”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당시 목자역할을 해야 할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이 백성들을 돌보진 않고 그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안위만을 추구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거짓목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당시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도 종교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이 동일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칭 지도자라고 하는 이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국민이나 성도, 직원들의 삶을 돌보기보다는 그들을 이용해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그 모든 이들을 가리켜 거짓목자, 자신의 배만 위하는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우리는 교회의 거짓목자 됨을 돌아보며 스스로 비판하고 그러한 모습에서 돌아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믿지 않는 사람이 말하기를 교회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건물을 키우고 목사들의 배만 불린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또 어떤 글에는 교회는 부동산에 가장 집착하는 종교라는 비판하였습니다. 교회가 건축을 하다가 부도가 나면 속해있던 성도들이 집과 재산을 담보하고 빌려 교회에 드린 이유로 거리에 나앉기도 합니다. 이 모든 부끄러운 모습은 한국교회의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군가 말 한다고 알고 하지 않는다고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는 초대교회 사역자들의 사역이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고 돌아서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한 것을 두고 세 단어를 사용하여 진실하게 전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간사함’, ‘부정’, ‘속임수라는 단어입니다.

 

먼저 간사함플라네스라는 말로 이는 오류라고 번역했으면 더 좋았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오류가 없는 진리임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전하는 내용이 진리인지 비진리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전합니다. 얼마 전 교계신문에 교회 내에 무당과 박수무당이 이단보다 더 무섭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는 교회 내에서 복음적이지 않은 행위와 가르침으로 영혼들이 상처받고 세상으로부터 지탄을 받는 교회의 현실을 말한 것입니다. 이단은 교회 밖의 문제라고 여겨 질 수 있지만 교회 내에서 바르지 못한 가르침은 성도를 죽이고 교회의 영향력을 잃게 합니다.

 

개혁교회가 개혁교회가 되게 된 이유는 카톨릭의 오류 때문이었습니다.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을 하기 전에도 이미 많은 사람들이 카톨릭의 오류에 반기를 들어 피를 흘렸고 그 열매를 루터와 칼빈의 때에 맺은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21세기 개혁교회를 보면 루터와 칼빈이 통곡을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갖 오류가 교회 내에서 진리인양 선포되고 인간의 욕심을 교회의 비젼이라 선포하며 옳고 그름의 분간 없이 모두가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런 모습에 대해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을 간사함’, 오류가 없다고 말입니다.

 

다음으로는 부정입니다. 이는 아카다르시아라는 단어로 불결의 의미입니다.

이는 제의적인 불결 뿐 아니라 윤리도덕적인 불결을 말할 때 쓰여 집니다. 이방종교들이 그들의 종교를 전하면서 부도덕한 행위를 함께 전했고 그러한 행위로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사람들의 죄성을 자극하여 자신들의 종교로 끌어들였고 교세를 확장시켰습니다. 이러한 모습도 언제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들은 자신들의 욕심으로 복음을 왜곡시킵니다. “성공해야 하나님의 영광이다.”고 말하며 그것을 위해 모든 수단이 합리화 됩니다. 물론 실패한 것보다야 성공하는 것이 낫습니다. 물론 가난한 것보다는 부요한 것이 낫고 공부 못하는 것보다는 잘 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립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아닌 죄로 오염되고 과정이 바르지 못한 성공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복음전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욕심과 죄악이 복음에 첨부되어 전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 이 땅의 것을 누리는 것도 복이라고 말하며 누리는 복을 말했습니다. 당연히 주께서 주시는 이 땅의 것을 누리는 것은 복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감추는 말로 사용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 사기입니다. 누군가 평안한 것이 응답이다고 했습니다. 그런가요? 복음을 전하고 바르게 살려 할 때 주어지는 두려움과 갈등은 응답이 아니랍니까?

 

이렇게 자신의 육체가 원하는 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며 신앙 생활하는 자들을 가리켜 예수님의 동생 유다는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그러한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하는도다 ....... 그들은 이성 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그들은 기탄없이 너희와 함께 먹으니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 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1:8-13).”라고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속임수입니다.

개역성경은 궤계라고 했습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돌로스입니다. 이는 본래 '미끼, 유혹물, 가짜 미끼, , 올가미'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교활, 술책, 기만, 계략, 간계'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용하지 않은 방법의 마지막으로 속임수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지혜자들이나 마술사들이 자신들의 지식과 마술적 속임수로써 부정한 이욕을 채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짓된 종교의 대부분은 어떤 열광적인 긴급성을 띠고 메시지를 선포하며 이로 인해 많은 이득을 취하나, 자신은 결코 거짓이나 부정에 근거하지 않으며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복음만을 전파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이단들과 사이비 기독교도들, 그리고 개혁교회 안에 있지만 전혀 복음적이지 않은 말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사람들 속에 있는 욕심과 두려움을 자극하여 자신들의 노예로 만듭니다. 얼마 전 일명 문자교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전화 문자메시지로 돈을 뜯어내고 결국에는 자녀들과 자살을 하게 했던 사건입니다. 이는 순진한 사람들이 종교라는 형식을 취하여 하는 행위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모습이 교회 내에도 아주 많습니다. 복음은 뒤로하고 목사라는 권위, 기도 좀 한다는 권위 등을 등에 업고 성도들을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려는 모든 행위는 속임수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상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5:30-31)”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왜 자신이 복음을 전할 때 간사함, 부정그리고 속임수로 한 것이 아니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전한 복음이 개인적인 이득이나 자신의 영달을 위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을 같은 절에서 권면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전도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내용인 복음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을 권면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과 행위를 권면이라고 한 것일까요? ‘권면이란 말은 헬라어로 파라클레시스라고 합니다. 이는 곁에라는 말과 부르다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이 단어를 직역하면 가까이 부름, 소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본문에 맞게 의역하면 돕기 위해 곁에 불러 세우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간청, 위안등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자신이 전한 복음을 권면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를 간절하게 원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가 앞에서 먼저 생각해 보았던 간사함, 부정, 속임수와 대조되는 개념입니다.

 

간절함입니다. 왜 간절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영혼에 대한 불쌍한 마음 뿐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복음이 진정한 생명임을 알기에 그들에게 간절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위험에 빠진 사람에게 위험을 알려주면 살수 있다는 것을 안 사람의 외침일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민족의 구원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간절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93절에서 자신의 민족의 구원을 바라는 마음을 표현하기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빌립보교인들에게도 말하기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2:17)”라고 하였습니다.

 

영혼을 향한 바울의 간절함, 그것은 영혼을 향한 그리스도의 간절함을 본받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셨던 그 간절함을 본받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우리도 바울과 믿음의 선진들처럼 영혼을 향한 간절함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이 복음을 전하면서 말하길 이 복음전도의 사명은 간절한 마음으로 감당했던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간절하게 전할 수 있었던 원인을 하나님으로부터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위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부탁을 받았으니'의 헬라어 '피스튜데나이'는 보통 '믿는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바울을 전도자로 신임하시고 복음을 맡기셨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복음전도의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맡길 때 전제되는 것이 신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을 믿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라고 한 것입니다. 옳게 여기심을 입었다는 말은 바울이 온전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본문에서도 여기심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온전하지 않지만 주님께서 인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힘 있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옳게 여겨주심을 입었다는 것은 옳게 여기심을 입기 전의 어떤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것은 옳게 여기심이라는 말 속에 숨어 있습니다. 이 단어는 도키마조라는 헬라어인데 이는 시험, 테스트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옳게 여기심을 입었다는 말은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서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과 학력, 집안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주장이 강하던 바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꾼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믿음의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75세에 부름받아 백세가 넘은 후에야 이삭을 바치면서 믿음의 시험을 통과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믿음의 조상이 되는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의 재단에서 드리려고 했을 때 하나님을 아브라함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옳게 여겨주셔서 사명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말하면 사명이 있는 자는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바울처럼 복음 전함을 위탁받은 존재들입니다. 그 부름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온전해지지 않았지만 나름의 시험을 당했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이 복음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해 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전도자로 부름을 받은 것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에서도 말하기를 사람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 증거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은 육적인 만족을 위해 일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함이라는 말 속에는 사람을 기쁘게 함도 포함되는데 이때 사람을 기쁘게 함이란 복음을 받은 사람이 구원을 얻어 그 영혼이 기뻐하는 것을 말함입니다.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함으로 자신이 인기와 명예에 영합하여 사람을 의식하며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기를 기뻐하였습니다(1:1;1:1).

 

바울은 복음전도의 목적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적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요리문답 1문에 사람의 제 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 강단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복음이 사람의 육적인 본성을 기쁘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성이 가득한 우리의 행위를 격려해 주는 설교, 세속적 복을 바라고 살게 하는 설교 등은 강단에서 사라져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설교를 즐겨 들을 줄 아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은 목회자 뿐 아니라 성도 모두가 힘을 다해야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모습이 옳으며 그 옮음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자부심과 확신이 있었습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본문에서 바울은 다시 한 번 강조하여 말하기를 자신이 전한 복음은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쓴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아첨의 말이란 단순히 타인을 의식해서 한 말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계산해 넣어 하는 말을 의미합니다. , 상대에게 이익을 주는 척 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어서 나온 말인 '탐심의 탈'에서 ''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파세이는’ ‘앞에라는 뜻의 프로나타남의 뜻인 '파이노'의 합성어로서 뒤에 무엇인가 감추기 위해 앞에 내세운 것을 말합니다. 이는 사물의 진실을 가리우기 위한 '가면'을 뜻하는 말입니다. 본문에서 이 말을 해석하면 겉으로는 복음 전파라는 허울 좋은 구실을 내세우나 안으로는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위선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아첨의 말은 외적 행위에 관계된 것이라면 탐심의 탈은 내적 동기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른 복음을 전하지 않는 자들의 외적 증거는 아첨의 말이요 내면은 탐심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 두 가지는 전도자의 진위를 가리는 표준'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이러한 것에서부터 자유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했다고 말합니다. 이를 오늘 본문처럼 표현하면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였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분명한 확신과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어야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

 

이 엄청난 말은 한번만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10절에서도 자신이 데살로니가교회에서 복음을 전할 때 흠 없이 행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러한 말은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강력한 확신일 뿐만 아니라 모든 전도자들의 최후이며 최고의 위로와 확신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바른 복음 증거는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대나 바른 선지자, 바른 복음 증거자, 바른 성도는 세상의 인정과 상관없었습니다. 세상의 칭찬에 일희일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족한 것이었습니다. 이 진리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것의 증인은 하나님이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날 주의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어야 할 필요가 강력하게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 바울의 이 말을 기억하며 전하는 자나 받는 자가 모두 바른 복음에 아멘하며 기꺼이 그 복음에 순종하여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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