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입성
스가랴 1:7-17
이번 주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실 때 제자들과 무리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함께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환영하였던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때문에 ‘호산나 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고난주간이 시작되고 이어 부활주일이 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입성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의 건설을 생각했습니다. 로마의 압제 하에 살던 자신들을 건지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설할 메시야로 환영한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환영이 있은 후 며칠이 못 되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고 그들이 생각했던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룬 것이 아니라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처럼 “주의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된 것(말1:11)”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종려주일에 스가랴서에 나타난 주님의 입성에 대한 말씀을 생각해 보면서 우리의 삶에 임하신, 예루살렘 입성과 관련지어 생각하여 우리의 삶에 입성하신 주님의 역사하심이 우리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606년에 신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에게 정복을 당하여 포로로 끌려가지 시작했고 주전 586년에 성전이 무너진 것으로 완전히 멸망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페르시아가 메데와 리디아 그리고 바벨론을 점령하고 난후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성전의 재건을 시작했지만 주변의 방해로 기초를 놓은 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15년의 세월을 보내고 말았습니다. 성전 터는 황무해졌고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보내 준 건축 자재는 모두 없어진 후였습니다. 그 때 학개와 스가랴가 두 달 차이로 일어나 성전 재건을 재개 하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런 그들의 외침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그 요구가 얼마나 무리한 요구였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건축할만한 여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경제적 여건이 미치질 못했고 또 하나는 정치적으로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건축이 15년 멈춰져 있는 동안 성전을 짓기 위해 쌓아놓았던 자재들은 자신들의 집을 짓기 위해 하나 둘 가져갔기에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성전 건축할 자재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학개는 산에 가서 나무라도 해다가 지으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재정적인 부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당시 페르시아는 정치적 혼란기를 겪고 있었습니다. 정복자 고레스가 죽고 그의 아들들도 죽고 난후 조로아스터교의 승려였던 가우마타가 고레스의 아들 스메르디스의 흉내를 내며 왕으로 있던 것을 다리우스를 중심으로 한 일곱 방백이 그를 죽이고 다리우스가 왕이 되는 혼란한 시기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페르시아의 변방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애굽과 바벨론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인해 어느 지역이든지 조그만 반란의 기미라도 보이면 강력하게 진압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성전을 건축하려고 하다가 오해라도 사면 대규모 학살을 면치 못했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오얏나무 밑에서 갓끈도 고쳐 매지 말라고 한 것처럼 오해할 짓을 애초에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때였습니다. 그런데 학개와 스가랴가 재개하라고 하니 백성들로서는 당연히 거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외쳤고 학개서를 근거로 보면 성령께서 그들을 흥분시켜 성전재건을 시작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두려운 시기에 성전을 건축할 수 있었던 것이 성령의 감동이었는데 백성들이 감동을 받고 동의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전한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두려움에 대한 문제는 오늘 본문을 통해 해결해 주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세계를 두루 돌아보고 온 말을 탄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천사들에게 묻기를 우리가 땅을 두루 다녀 보니 온 땅이 평안하고 조용한데 어느 때까지 예루살렘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시려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돌아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6절과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돌아오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 한마디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대적에게 패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표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리제사장 때 블레셋과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 때 엘리의 두 아들과 엘리가 죽고 법궤는 빼앗겼을 때 엘리의 며느리가 아들을 나며 그 아들의 이름을 지어 줄 때 ‘이가봇’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무너뜨리기 전에 하나님은 에스겔을 예루살렘으로 이끄셔서 예루살렘의 죄악상을 보여주신 후에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떠나는 것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을 때 법궤가 빼앗겼고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돌아오셨다는 것은 성전의 재건, 영광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지서들은 무너진 이스라엘의 회복을 예기 할 때 하나님께서 다시 오셨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오늘 종려주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것은 무너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회복, 아담으로 인해 끊어졌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행위의 시작인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의 삶에 주님께서 오셨다는 것은 우리의 영의 회복, 삶의 회복을 의미하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온 땅이 평온하고 예루살렘만 평온하지 못하였던 것처럼 주님의 은혜가 온전히 임하지 못한 삶은 평온치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때로 그렇게 됩니다. 그분과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 못할 때 영적 혼란으로 평온하지 못한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삶의 한 가운데 주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들어오시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방문 하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방문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카드’라고 합니다. 이 말은 종종 ‘권면하셨다, 생각하셨다’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를 생각하셨다고 하는 표현은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방문하셨다는 표현입니다. 아이가 문제가 있으면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합니다. 성도의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목사가 심방을 합니다. 그래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데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우리 집에 방문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아니 놀라운 정도가 아니라 모든 문제 해결인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이루어질까요?
뒤이어 나오는 말씀으로 생각해 보면 먼저 모든 대적을 물리쳐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뒤이어 하신 말씀을 보면 네 뿔을 부수는 네 명의 대장장이에 대한 말씀인데 이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상징하는 뿔을 대장장이로 묘사된 하나님의 능력이 부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방해하는 주변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처음 돌아와서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도 방해해서 결국 15년 동안 폐허가 되게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재건을 시작하는 성전공사를 방해 할 것이 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반란의 오해를 사서 피바람이 불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려움과 걱정을 한방에 달리는 본문의 말씀을 주셔서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실제로 그들의 모든 방해를 막으셨습니다. 주변사람을 방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큰 방해는 페르시아 정부에 예루살렘이 성전을 짓는 이유가 반란을 위함이라고 고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총독 스룹바벨도 그냥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공문을 보내기를 ‘15년 전에 고레스왕의 조서가 있었기에 자신들의 재건은 합당한 일이며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편지를 받아 든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왕은 성심껏 서고를 찾게 해서 고레스의 조서를 찾아냈습니다. 그 조서에 근거하여 다리우스는 모든 재료를 보내 주었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 주변 지역에 공문을 보내 세금을 거두어 예루살렘으로 보내며 누구든지 이 일을 방해하는 자는 죽이겠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공사가 순탄하게 진행되어 그로부터 5년 만에 성전 공사를 마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의 임하심은 불성곽으로 표현된 것처럼 보호와 돌보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2장 5절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엘리사가 도단에 있을 때 성을 둘러싼 아람군사들로 인해 사환이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모를 때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사환의 영적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이에 도단성을 둘러싸고 엘리사를 지키고 있는 하나님의 불말과 불병거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임하심은 우리의 모든 영육간의 대적을 멸하심과 돌보심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신 사람들의 삶에 평강이 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성곽이 되어 지켜주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통치에 대해 말합니다.
9장 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하실 때 타셨던 짐승이 어린 나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스가랴의 이 예언을 이루심으로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언된 메시야이심을 알리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메시야가 어린 나귀를 탄다고 한 것일까요? 그것은 나귀의 특징 때문입니다. 그것은 멍에를 매고 인간에게 순종하는 짐승이었기 때문입니다. 장군을 말을 타고 입성했고 왕은 노새를 탔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구속주 되시는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습니다. 이는 나귀가 멍에를 매고 짐을 싣고 다녔던 것처럼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의 멍에를 매고 우리의 형벌을 지고 가시는 분이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입성하셨음에도 굳이 나귀를 타심은 그의 통치가 일반적인 왕이나 장군들의 통치와는 다를 것을 상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왕이나 장군은 억압과 착취로 백성들을 다스렸다면 예수님은 겸손한 왕으로 백성을 섬기는 것으로 통치하시는 분이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 중 가장 낮게 오셔서 우리의 죄악을 뒤집어쓰고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임하시고 돌보시며 통치하신 결과를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1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라 하니라”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오심으로 성읍들이 넘쳐나며 풍부해 지고 주의 위로가 있으며 예루살렘을 다시 선택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에 임하시면 우리의 삶이 풍성해 집니다. 영혼이 풍성해 지고 삶에 회복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이 임하실 처소로 선택하셔서 우리를 성전 삼아 풍성하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멘입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의 삶에 임하여 계십니다. 그 결과 이전에 없었던 평안이 있으며 삶의 회복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미 성전이 되어 지어가고 있음을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임하심은 영원히 변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에스겔서는 보면 예루살렘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고 그 결과 성전이 무너졌는데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성전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전이 지어지면 성전으로부터 생수가 흘러나와 생명을 살리게 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일을 예언하신 후에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후부터 그 성을 ‘여호와 삼마’라 하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호와 삼마란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일주일여 있게 되는데 마지막 날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당신의 죽으심을 예언하시면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여 제자들을 충만케 하셨습니다. 이렇게 성령이 임한 사람을 가리켜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히 떠나지 않으시면서 우리의 영적 성전을 건축하시며 풍성케 하시고 평안케 하시는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