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전도의 자세
데살로니가전서 2장 6-12절
옛 말에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젯밥에만 관심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어떤 일에 임하는 사람의 자세가 잘못되었음을 지적하는 말인 줄 압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에 임하는 자세는 그 일의 성패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습니다. 정치지도자의 관심이 백성이 아닌 재물이라면 그 백성은 불행해 지는 것이고 선생님의 관심이 촌지라면 그에게 배우는 학생도 불행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전도자의 자세가 바르지 않으면 그 결과는 불행을 넘어 끔찍한 결과를 낳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전도자의 자세에 대해 몇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전도자의 사세는 이렇다’라고 한 말은 아니지만 그가 데살로니가교회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자신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전도자의 자세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하나씩 보면서 우리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며 주의 일을 해야 하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먼저 인간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사람들의 칭찬과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일행이 복음을 전하면서 그 행위로 말미암아 주어질 결과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광이란 말 속에는 반대되는 의미인 비난과 공격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자신들이 전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칭찬과 보상을 바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전함을 통해 자신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비난과 공격에도 연연하지 않고 오직 순수한 복음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예수님께 배운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칭찬과 비난에 좌우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영혼을 구원하시러 오셨다는 당신의 사명에만 관심을 갖고 사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이 받을 영광과 칭찬에 연연하셨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이 잡히셔서 침 뱉음을 당하고 십자가를 지실 때 열 두 군단 더 되는 군사를 불러 대적들을 죽이시고 스스로 영광을 취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을 비롯한 모든 사도들, 그리고 그 뒤를 이를 이은 진실 된 복음전도자들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 오직 하나님의 칭찬, 오직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 우리는 목사로 혹은 집사로, 혹은 장로와 권사로 주어진 사명을 각각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면서 우리의 관심이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의 복음전도의 자세는 권위를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초대교회 당시 교회에서 최고의 권위는 ‘사도’였습니다. 사도란 ‘아포스톨로스’라는 말로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예수님과 함께 활동하고 예수님께서 임명하신 자들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초대교회 때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졌습니다. 아직 기록된 성경이 없을 때였고 교회의 틀이 정해지지 않았던 때였기에 사도들의 가르침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이런 절대적인 권위가 바울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권위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리어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순하다’는 말의 뜻은 바울과 그 일행이 존경받을 권리와 지배력의 행사를 버리고 마치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은 사랑을 쏟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기르는 어머니는 권위를 주장하거나 위엄을 뽐내는 일이 결코 없습니다. 아울러 자식을 키우기 위해 어머니는 어떠한 고통이나 수고도 불사하며 희생을 아끼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 자신의 생명이라도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옹졸하거나 인색하지 않고 편견 없는 애정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인 것입니다. 바울은 어머니의 사랑으로 그들을 대한 것입니다.
이를 요즘 리더십 용어로 표현한다면 ‘섬김의 리더십’이라고 하면 될 것입니다. 이 섬김의 리더십은 행하는 자나 받는 자가 서로 인정해야만 가능합니다. 리더가 섬기는 자세로 하려고 해도 받아들이는 이들이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따르지 않는다면 가능하지 않은 리더십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서 5장 30절과 31절에서는 이러한 리더십이 통하지 않고 반대로 권위와 거짓의 리더십이 통하는 세대를 향해 책망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록되기를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세 가지를 무섭고 놀라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선지자의 거짓 예언, 제사장들의 권력으로 다스림, 백성들이 그것은 좋게 여기고 따라가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예레미야 때만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바르지 않은 거짓 말씀, 기록된 말씀에 근거한 말씀이 아니라 꿈이나 환상이나 느낌을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고 그것은 쫓아다니는 성도, 일명 카리스마라고 하는 세속적 리더십으로 성도들 위에서 군림하는데도 그것은 좋게 여기며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기괴하고 놀라운 정도가 아니라 무섭다고 말합니다.
왜 무서운 일일까요? 그것은 그렇게 훈련된 사람들에게는 바른 말씀이 먹히질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잃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 말씀의 마지막에 “그것은 좋게 여기니 그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 지도자가 섬김으로 하려고 하면 권위가 없다고 하고 세속적 리더십으로 억누르고 협박을 해야 따른다면 섬김의 리더십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일이 될 뿐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들 뿐 아니라 교회 모든 사역을 감당하는 사람들은 섬김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이라는 권위, 교회 오래 다녔다는 권위, 기도 좀 한다는 권위 등의 권위 뒤에 숨어 그것으로 주의 일을 하려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직분이 있고 신앙의 연륜이 있으며 나름의 영적인 깊이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바울이 지금 말하는 것처럼 유모가 아이를 돌보듯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말하기를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3)”라고 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 자세로 복음전도를 감당했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바울 일행은 유모가 자녀를 기름같이 데살로니가교인들을 사모하여 복음 뿐 아니라 목숨까지도 주기를 기뻐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목숨’은 '영혼'이라는 말로 단순히 목숨까지 너희에게 줄 마음이 있다는 것을 뛰어넘어 너희에게 기꺼이 우리 자신을 아낌없이 나누어 주며 조건 없이 자신을 그들의 처분에 맡길 의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을 대할 때 뿐 아니라 모든 사역의 현장에서 목숨까지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1차전도 여행지였던 루스드라 더베 지역에서도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뻔 하였으나 그는 두려워 피하기보다는 다시 방문하여 교회를 돌아보았습니다. 빌립보교회를 향하여는 그들을 위해 자신을 전제로 드려도 좋다고 했습니다.
영혼을 향한 바울의 이러한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된 것입니다. 그는 원래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율법적인 사람이었고 그 율법에 근거하여 사람을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그가 그 죽음에 대한 책임을 졌던 사람이었고 다메섹까지 쫓아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용서의 사랑을 경험한 후에 그 사랑에 힘입어 그도 자신의 목숨을 영혼들을 위해 내어 주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전도를 비롯한 주의 일은 생명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 근거하여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없다면 그 사역은 앞에서 말했던 아첨, 속임수, 탐심의 탈을 쓴 행위가 될 뿐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생명까지 내 놓고 영혼을 사랑하고 주의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요? 그것은 사람의 각오나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받지 못한 자는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표창원씨는 자신과 신창원은 비슷한 배경을 가지고 자랐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것은 자신의 주변에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이 많았고 신창원은 그 무조건적인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행위는 철저히 받은 만큼만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도의 사랑의 행위는 주님의 사랑을 받은 만큼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감격한 만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랑과 헌신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통해서건 경험을 통해서건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바울의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한 것처럼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바울은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자세로 하였습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일하면서 사역하였습니다. 당시 순회 철학자들과 마술사들이 돈을 목적으로 가르치고 공연하면서 자신의 청중들로부터 수고비를 받거나 이득을 취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는 텐트 만드는 일을 하여 그 수입으로 사역했습니다. 이렇게 했던 것에 대해 데살로니가후서에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후서 3장 8절부터 9절에서 말하기를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통해 요를 받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복음이 자리 잡기 전의 상황에서 조금의 오해도 사지 않으려는 바울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4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전도자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말하고 종종 받기도 했습니다(고후 11:8, 빌4:16).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면 그는 사례를 받지 않고 사역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도 복음전도를 하는 우리의 자세는 주의 일을 하면서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특별히 같은 그리스도인들 간에도 유익을 주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인색하게 굴지 말아야 하지만 믿는 자들 사이에서도 믿는 자라는 이유로 희생을 강요하고 손해를 강요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예전에 수양관을 운영할 때나 요즘 세미나를 진행 하다 보면 좀 심하다 싶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고 자신은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런 자세는 주의 복음을 가리는 행위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근거로 모든 사역자들에게 자비량 사역을 강요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없기를 바랍니다. 사역자들은 기꺼이 희생을 각오하며 힘을 다해 사역할 것을 다짐해야 하며 성도들은 갈라디아서 5장의 말씀처럼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려는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사역자들이 말씀을 준비하고 기도하는 일에 힘을 쓸 수 있고 그 결과로 잘 준비된 말씀을 공급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인간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도의 권위를 주장하기 보다는 유모가 자녀를 기름같이 하고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아가 누구에도 폐를 끼치지 않는 자세로 복음을 전한 이유는 영혼들이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했기 때문입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이렇게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행하는 모습을 바라는 전제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처럼 본을 보임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0절에서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행동을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하였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여기서 '거룩함'이란 하나님을 향한 자세를 가리키고,
'옳음'이란 사람에 대한 올바른 행위를 가리키며,
'흠 없이'란 이 두 가지의 소극적 측면으로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책망할 바 없는 단정한 생활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행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한 수 더 떠 바울은 이 모든 것의 증인이 너희요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들의 선교 사역의 순수성과 진실성에 대한 확고한 증인으로서 데살로니가 교인들과 하나님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즉,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바울 일행의 외적 행동의 증인이요 하나님은 그들의 행동의 내적 동기의 증인이 되심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의 진실한 전도의 모습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목격한 바이며,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복음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명령을 받아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신실하게 복음만을 증거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대의 성도와 그리고 장차 복음을 받아 들여 천국백성 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흠 없이 살아가게 하기 위해 바울의 말처럼 복음전도 자의 자세를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인간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고 사도의 권위를 주장하기 보다는 유모가 자녀를 기름같이 하고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나아가 누구에도 폐를 끼치지 않는 자세로 사역하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며 사람 앞에서 옳으며 흠이 없이 사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