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자랑
데살 2:13-19
바울은 자랑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문과 그의 학벌 등은 그의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갖고 싶어 했던 로마시민권을 날 때부터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당시 가장 탁월한 학파였던 가말리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의 혈통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의 혈통을 이어받은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그는 이런 모든 자랑거리가 있었음에도 이 모든 것은 그의 자랑거리가 되지 못하고 도리어 분토와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자랑이 무엇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19절과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자신의 소망이요 기쁨이며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말하고 나아가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삶의 이유였습니다. 그가 고난을 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전함의 일을 쉬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전한 복음으로 인해 생명을 얻고 살아가는 성도들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으로 생명을 얻은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서는 그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소망과 기쁨과 자랑에 대해 말하면서 그것을 면류관에 비유했습니다. 그리고 그 면류관이 데살로니가교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소망도 자신의 기쁨도 자신의 자랑도 나아가 자신의 영광도 모두 데살로니가교인입니다.
바울의 모든 생각은 영혼이었습니다. 이미 우리가 보았지만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을 유모가 자녀를 기름같이 했고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또한 그는 그곳을 떠난 후에 계속해서 방문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마음이 데살로니가교인들을 향해 있음을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온 맘이 영혼들을 향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사야서 49장 16절에서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103편 13,14절에서는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온 맘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우리의 심령에서 탄식으로 기도하시다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을 향해 유모와 아비의 마음으로 가르치며 그들을 자신의 소망과 기쁨과 자랑의 면류관으로 삼았듯이 주님도 우리를 통해 기뻐하시며 우리를 자랑삼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3장 7절에서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소망, 우리의 기쁨, 우리의 자랑, 우리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혹시 자녀가 소망이고 돈이 기쁨이며 높은 위치가 자랑이고 사람들의 칭찬이 영광이 아닙니까? 오늘 바울은 영혼들이 자신의 소망이며 기쁨이며 자랑이고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주님 앞에 섰을 때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랑이 영혼이여야 하고 우리의 소망이 영혼이어야 하며 우리의 기쁨도 영혼이어야 합니다. 그 영혼들이 우리의 면류관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땅의 모든 것, 즉 재물, 자녀, 인기, 명예 등은 주님의 불심판 앞에 태워지고 말지만 우리의 전도나 수고를 통해 낳은 영혼들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것을 모두 놓고 가야하지만 구원받은 영혼들은 우리와 함께 주님 앞에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유, 달리 표현해서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자랑스럽게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우리가 읽은 13절부터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그들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의 자랑이 될 수 있었던 것의 시작점은 바울이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말이나 유익한 말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만은 전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들이 바울이 전하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를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받아들였다는 말은 객관적인 받아들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헬라어 ‘에덱사스데’라는 말로 주관적인 받아들임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열렬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객관적인 받아들임이란 남들이 그러니까 대중이 가는 데로 생각 없이 따라간 것이 아니라 극히 개인적으로 동의하고 의지를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가족들이 교회 가니까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주님을 믿고 적극적인 의지로 주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친구 따라 교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부르신 주님의 음성에 개인적으로 반응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관적인 받아들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우리들이 진지하고도 자발적으로 받아들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구원과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복음을 들음으로써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믿음은 그들이 들은 복음을 바울이라는 인간의 음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동적이며 효과적인 가르침이라는 점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을 바라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눈을 들어 사도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도들이 전한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그들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는 말처럼 영적인 생명은 성도들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지는 특권입니다. 이때 '역사한다'는 말은 '에너지를 공급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성령께서 에너지를 공급함으로써 나타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장 5절에서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라고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을 통해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는 사실을 입증한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에서 삼주밖에는 복음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었음에도 누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누구는 인간의 말로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바울이 가는 곳마다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처음 복음을 전했던 아라비아 지역의 나바테아에서도 그가 전한 복음이 도시를 소동케해서 그 나라를 지배하던 아레다 왕으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었습니다. 루스드라와 더베 지역에서도 앉은뱅이를 일으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일부는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이려 했으나 그 복음을 듣고 일부는 교회를 세웠고 디모데는 바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 복음이 전하여 질 때마다 항상 반응이 갈렸습니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그렇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해서 전했음에도 그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그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바른 신앙의 삶으로 나아가는 반면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목사의 말로 받아 판단하고 대항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세속적 이익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처음 임하고 복음을 들고 나갔을 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마음에 찔려 회개하여 주께 돌아 온 반면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이들도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지만 그들은 이를 갈고 스데반을 끌어내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는 것이야말로 복인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이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가 목사이건 평신도건 심지어 어린아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그가 전한 말씀이 성경에 근거하여 옳다면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때로 말씀을 전하는 자의 인격이나 삶, 그에 대한 좋고 나쁨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전하는 말씀이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면 아멘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말씀을 전하는 자의 삶이 온전해야 된다면 우리들 중 누구도 말씀을 전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한때는 효에 대한 말씀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가정사가 복잡하기에 항상 마음에 걸리는 문제였습니다. 효에 대하여 말씀을 전하려고 하면 복잡한 가정사는 저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제 속에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네가 다른 것은 다 잘해서 전하느냐? 너는 완전하기에 말씀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너는 나팔일 뿐이다”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후에 말씀을 전할 때 제가 잘해서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말씀을 전하는 일에 충실할 뿐입니다.
반대로 말씀을 전하는 자를 너무 신뢰하여 그가 전하는 말씀이 바른지 그렇지 않은지도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입니다. 큰 교회 목사님이니까 유명한 목사님이니까 그가 전하는 말씀은 옳을 것이라는 생각은 온전치 않습니다. 유명하고 큰 교회의 목사라는 사실과 바른 복음이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전하는 자에 근거하여 받고 안 받고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성경적이냐 그렇지 않느냐에 근거해야 합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이 성경적이라면 우리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자랑이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원인이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면 그 다음은 그 말씀에 근거하여 살았기 때문입니다.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동족에게서 동일한 고난을 받았느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당하는 것처럼 너희도 예수님을 믿는 이유로 인해 동족들에게 고난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들의 신앙이 진실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 그대로 믿었고 살았기에 그에 따른 핍박이 따른 것입니다. 이전의 삶을 버렸고 이전에 즐기던 것들을 끊은 것입니다. 그 일로 인해 그들은 동족들에게 핍박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전에는 가족이었고 이웃이었던 사람들에게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오직 하나 복음을 받아들여 믿고 그 가르침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에 있는 교회에서 믿는 자들에게 박해가 있었고 그것을 믿음으로 견딘 것처럼 그들도 진정한 믿음을 갖게 됨으로써 자연히 수반되는 박해를 견뎌내고 믿음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특히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동족에게 핍박을 받은 이유는 그들이 개종함으로 인해 이전의 관습과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방문화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로서 온갖 수난과 고통이 뒤따르는 것처럼 세상에 살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세상을 등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이전에 없던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라고 한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에 대해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2-16)”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복음의 반대세력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다는 것은 자신이 참 성도가 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한때는 핍박자였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겠다고 이웃나라까지 찾아다닌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이후에는 거꾸로 핍박자에서 핍박을 받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복음과 함께 따라오는 박해와 고난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도 복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기 전에 핍박자가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이제는 핍박을 받는 자가 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슬퍼하고 왜 그러냐고 하나님께 항변하기 보다는 도리어 기뻐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이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가 처음 형성될 때 베드로와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 관리들에게 잡혀 박해를 받고 나오면서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행5:41)”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힘이 복음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미 보았던 13절 후반에 “이 말씀이 너희 믿는 자 가운에게서 역사하느라”고 한 것입니다. ‘역사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 모든 일의 근원적 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의 능력이 있기에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도 말씀의 역사이고, 그 말씀을 받아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나오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말씀의 역사로 인하여 또 하나의 일이 일어난 것은, 유대에 있는 교회를 본받고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의 소망이요 기쁨이며 자랑의 면류관이고 영광이 되는 데살로니가교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자랑이며 기쁨이고 그분의 면류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에 합당한 성도의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겸손이 있어야 하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기꺼이 어떤 손해나 박해도 견디어 내며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우리 자신만 구원받은 존재로 서는 자가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 앞에 데살로나가교인들을 내어 놓듯이 우리도 주님 앞에 우리를 통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내어 놓는 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사람들의 평가가 어떤 것이었느냐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오로지 주님의 판결에만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잘 했다 말씀하시는 칭찬을 생각하며 바르게 복음 증거하며 영혼들을 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