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성도를 위해 존재한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1-3절
바울은 아덴에 있으면서 데살로니가교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그는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가보고 싶었지만 사탄의 방해로 가지 못했습니다. 그럴수록 바울은 더욱 안타까웠고 그리움과 미안함, 그리고 사랑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우리’라고 하고 있는데 이는 실라와 자신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처음 빌립보에 갔을 때는 일행이 네 명이었습니다. 바울, 실라, 누가 그리고 디모데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에 왔을 때는 세 명으로 줄었는데 그것인 빌립보에 있는 교회가 아직 어리기에 누가에게 양육을 부탁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에서 나올 때 바울은 홀로 나왔으나 후에 실라와 디모데도 아덴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정을 알아보기 위하여 다시 데살로니가로 파송되었고 그 후 실라도 임무를 갖고 마게도냐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디모데를 먼저 데살로니가로 보내고, 그 후에 실라도 마게도냐로 보낸 다음에, 바울은 아덴에 잠시 머물다가 바로 고린도로 가서 그곳에서 실라와 디모데와 다시 합류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가는 곳 마다 전도하고 전도한 영혼들을 양육하는데 힘을 다했습니다. 이런 바울의 마음이 오늘 본문에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전도자의 마음을 보면서 성도를 자세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먼저 성도는 성도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1절부터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생각하고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바울을 지금 고린도에서 편지를 쓰지만 이전에 아덴에서 있었던 일을 잠시 추억하며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전에 아덴에 잠시 머물렀습니다. 아덴을 지금의 아테네입니다. 그곳의 아레오바고에서 알지 못하는 신에게 라고 적혀있던 단을 보고 그것을 근거로 복음을 전했던 지역입니다. 바울은 그곳에 있는 동안 데살로니가에 가보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사정을 알아보고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해 디모데를 보내었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디모데를 보낸 이유를 본문에서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데살로니가교인들의 신앙을 굳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데살로니가교인들은 바울일행으로부터 3주밖에는 복음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신앙은 뿌리가 깊게 내리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디모데를 보내 그들의 신앙을 굳게 하려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를 향한 성도의 삶은 우리 주변의 성도의 신앙을 굳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6장에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서로의 짐을 서로 나누어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기록되기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6:2)”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짐’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바로스’라고 하는데 이는 화물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화물이란 뜻의 짐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함께 신앙생활하고 있는 성도들의 짐에 대해 ‘그의 짐’, ‘남의 짐’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함께 져주어야 할 짐으로 여기라는 뜻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허집사님의 가정이나 신앙에 문제가 있다면 하집사님은 그것은 본척만척 하는 것이 아니라 허집사님 가정이나 신앙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여겨 함께 기도하고 함께 고민하여 자신이 도울 수 있는 부분에 대해 힘을 다해 도우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문제를 통해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사탄의 공격을 막아서고 그 문제를 통해 그를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도록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그의 서신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5:19,20)”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신의 신앙만을 위해 살지 말고 함께 신앙 생활하는 형제들의 신앙도 돌아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신앙을 떠나 사탄의 유혹에 빠져 바르지 못한 길을 가는 것을 본다면 당연히 그 형제를 말씀으로 권면하고 사랑으로 붙들어 미혹된 길에 빠지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제자들에게 할 일을 분부하시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성도들의 신앙을 굳게 하는 것은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비록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불편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지 못한 길로 가면 제지시켜야 합니다. 듣기 싫어해도 말씀에 근거한 바른 삶이 무엇인지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렇게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의 신앙을 굳게 하는 행위는 자신의 신앙을 성숙하게 하는 유익을 더불어 얻게 됩니다. 다윗이 열다섯에 기름부음을 받고 서른에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그는 블레셋에 무너졌던 나라를 강한 나라로 만들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나라를 만드는 동안 자신의 신앙도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힘이 생기고 더 이상 할 일이 없다고 여겨질 때 그의 신앙도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를 위해 할 일이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우리가 책임져야 할 영혼이 있고 중보기도 해야 할 성도가 있다는 것은 복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붙여준 영혼은 우리의 신앙을 위함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를 위해 존재하는 성도의 삶의 첫 번째가 성도의 신앙을 굳게 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를 위해 존재하는 성도의 삶의 두 번째는 성도의 믿음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2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건하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우리성경에는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위로’라는 말은 ‘파라칼레오’라는 헬라어로 ‘곁에’라는 뜻의 ‘파라’와 ‘부르다’는 뜻의 ‘칼레오’의 합성어로 직역하면 ‘곁에서 부르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위로하다, 격려하다, 애원한다’는 뜻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개역개정을 제외한 다른 번역본들은 대부분 ‘격려하다’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 그들의 믿음을 굳게하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격려가 필요했습니다. 사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3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았지만 놀라울 정도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니 신앙생활의 기간이 짧기에 더 많은 격려와 위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시기와 불량한 자들의 박해로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위로와 격려를 위해 디모데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책제목 중에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칭찬과 격려는 잘하고 있는 자를 더 잘하게 하고 힘들어하고 지쳐 있는 자들에게는 새 힘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동료 성도들에게 격려와 위로를 해 주어야 합니다.
한강 다리 위에 ‘생명의 전화’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자살하려고 마음먹었던 이들을 그 전화를 통해 상담사와 통화를 하고 발길을 돌린 사람이 1년간 163명이나 되었습니다. 얼굴을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말을 들어주고 위로해 주고 격해 주는 말을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돌이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백성들도 위로와 격려가 필요합니다. 사실 이 위로와 격려에 최고 전문가는 주님이십니다.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내어 쫓김을 당했을 때도 하나님은 하갈에게 그의 아들인 이스마엘도 ‘큰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창21:18)’라고 위로하셨습니다. 또한 모세에게 소명을 주실 때도 여호수아에게 소명을 주실 때도 ‘함께 하시겠다’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나아가 바벨론 포로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두려워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주님은 밤에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9,10)”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 온 여인을 용서하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8:11)”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수도 없이 ‘두려워 말라’고 하시며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도 주님은 책망이 아니라 위로와 격려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5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의 영적회복을 기대했지만 이세벨의 죽이겠다는 말 한마디에 생명 건지겠다고 남유다 아래 광야까지 도망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할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징계하거나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를 어루만져 주시고 숯불에 구은 떡과 물을 주셔서 기력을 회복시키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예수님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사랑한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 ‘사랑하는 놈이 세 번이나 나를 부인하느냐?’고 책망하시지 않고 그 때마다 ‘내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므로 다시 사명을 주고 격려해 주시므로 넘어졌던 베드롤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격려자, 위로자가 되어야 합니다. ‘바나바’의 이름의 뜻이 위로자입니다. 그는 회심한 바울을 붙들어주어 사도들과 함께 복음 전하는 자로 세워주는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해 주시듯이 우리도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격려와 위로가 성도를 세우고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운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성도를 굳게 하고 격려하는 이유는 성도들에게 환란이 있기 때문이며 그 환란 중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도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끊임없이 밀려오는 박해 속에 사는 데살로니가교인들은 믿음이 흔들릴 위험성이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디모데를 보내 믿음을 굳게 하고 격려해 주어 흔들이지 않는 성도로 세워주어야 했습니다.
사역자들과 동료 성도들이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말씀을 굳게 하고 격려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그것은 본문의 말씀대로 어떤 환란 속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도를 만들려 함인 것입니다.
한국교회성도들은 너무 유약합니다. 그 증거가 급격하게 그리스도인들이 줄고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도 불교도 늘어나는데 유독 기독교인의 수만 줄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기복적인 신앙으로 훈련된 성도들은 기독교가 그 가치에 어울리지 않는 종교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가 복과 상관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기독교를 세속적인 복을 받은 도깨비방망이처럼 가르쳤던 것에 대한 결과를 얻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세속적 복이 주가 아닙니다. 참된 복음은 성도를 부르신 이인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기복에 찌든 성도들은 바른 복음을 전하면 힘들어합니다. 심각한 것은 바른 복음이 무엇인지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어떤 약에 내성이 생겨 약이 듣지 않는 것과 같고 마약에 중독되어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것과 같아서 기복에 중독된 성도들에게는 바른 복음을 전하면 거부되고 도리어 반항하게 하는 것입니다. 기복에 찌든 성도가 바른 복음을 듣고 돌이키는 대는 시간이 오래 걸리거나 때로는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환란의 바람이 불고 사탄이 세속적인 것으로 유혹 하면 믿음의 뿌리까지 흔들리는 것입니다.
바른 복음에 근거하여 굳어진 신앙과 바른 가르침에 근거한 격려와 위로를 받은 성도는 절대로 넘어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환란과 유혹이 있으면 성도의 향기를 더욱 진하게 진동시키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귀한 일을 위해 성도는 세움을 입은 것입니다.
그래서 3절 후반에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성도가 된 것은 영혼들을 죽음에서 건지고 그들을 말씀으로 굳게 하며 믿음으로 위로하고 격려하여 어떠한 어려움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도를 만드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명을 주님께서 부르시는 날까지 충성되게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