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는 성도의 성장으로 위로 받는다
데살로니가전서 3장 4-8절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의 안전이 걱정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환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환란은 바울이 그곳에 있을 때 당했던 것이고 장차 그들에게도 있을 것을 예고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몬 4절에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이 환란을 당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도 예고하셨던 일입니다. 말씀하기를 “사람들을 삼가라 그들이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겠고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리라”(마10:17),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마24:9),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눅21:16-17)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에서 바울과 바나바도 갈라디아의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고 디모데에게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 수 있는 분명한 진리는 주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세상의 핍박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성도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환란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처럼 여기지 말라(벧전 4:12)고 했습니다.
자신이 잘못 선택하고 결정한 결과로 따르는 고난을 믿음을 지키다가 얻는 고난과 동일시하면서 자신을 위로하진 마십시오. 그것은 영적유익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2:20)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욕심에 끌려 한 선택이나 결정으로 아픔을 당하는 자가 아니라 복음으로 인해 고난을 당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데살로니가교인들이 당하는 환란을 걱정하면서 디모데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디모데를 보내는 이유를 본문에서 설명합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그를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살전3:5)
본문에서 디모데를 보낸 이유에 대해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라고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알기 위함이란 그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감시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그들의 신앙을 돕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이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을 걱정하는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를 보내 너희 믿음을 알기 원한다.’는 말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을 말씀으로 격려하고 소망을 주어 많은 환란 속에서도 기꺼이 믿음을 지킬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입니다.
남유다의 왕 중에 요아스가 있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예후가 왕이 되어 아합의 집을 심판하게 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입니다. 이 때 아합의 피를 받은 남북왕국의 왕들이 죽었고 북이스라엘의 왕자 70명과 남유다의 왕자 42명이 예후에 의해 죽었습니다. 이 때 남유다에 남아 있던 아합의 딸이요 요아스의 할머니인 아달랴는 자신이 살기위해 자신의 손주들을 죽였습니다. 이러한 환란의 때에 하나님은 요아스의 고모부인 여호야다라는 제사장을 통해 한 살밖에 되지 않았던 요아스를 숨겨 키우게 했습니다. 요아스가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여호야다는 아달랴를 죽이고 요아스를 왕위에 앉혔습니다. 요아스는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였지만 그가 죽은 후 간신배들의 말에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겼습니다. 요아스의 생애에서 극단의 삶의 원인은 여호야다였습니다. 그가 있을 때는 하나님을 섬겼으나 그가 죽은 후에는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이렇게 무너진 사람도 있지만 반대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는 다윗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그가 죄가 없고 거룩한 행실로만 가득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블레셋에 두 번, 모압에 한번 귀의한 자였습니다. 또한 블레셋에 귀의하였을 때는 블레셋의 왕에게 잘 보이기 위해 광야에 살고 있던 족속들을 여자와 아이까지 잔인하게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여 블레셋 왕에게 바쳤던 사람입니다. 또한 자신의 충신 30명 중 세 명이나 되던 집안의 여인인 밧세바를 범하고 그 죄를 덮기 위해 충신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던 자였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남북의 연합과 사울의 정통성을 잇는다는 목적으로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행복하게 살던 미갈을 강제로 끌고 와 자신의 아내로 삼았고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의지하기 위해 인구조사를 하여 나라에 전염병이 들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허물 많고 죄 많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이유는 그의 곁에 선지자가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고 갓 선지자와 나단 선지자의 책망과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회개하고 바르지 못한 길에서 돌이켰습니다.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는 데는 자신의 의지와 신앙이 중요하지만 그것을 돕고 격려해 주는 어떤 존재의 도움도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성도는 다른 성도의 신앙을 위해 존재한다고 했는데 디모데가 그러했고 여호야다가 그러하며 다윗 곁의 선지자들이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신앙의 동료, 신앙의 선생을 두고 등지지 말아야 합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답답하고 안타까울 때는 주께서 맡겨주신 성도를 열심히 기도하며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결정을 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모습을 볼 때입니다. 그럴 때는 그동안의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된 것 같아 허탈하고 속이 상합니다. 그리고 그가 한 결정으로 인해 후에 미칠지 모를 책망을 생각하면 두려워 근심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나 동료성도들의 신앙을 위해 수고하고 애쓴 사람들의 보람과 행복은 그들이 바른 신앙으로 성장하고 세상의 유혹과 사탄의 시험을 능히 이기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그러한데 하나님은 어떨까요? 하나님이 성도를 보면서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유창한 신앙적 말일까요? 아닙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당장 손해가 되는 것 같아도 믿음의 결정은 반드시 아름다운 결과를 낳습니다.
반대로 불신앙적 결정은 당장은 유익을 얻는 것 같으나 반드시 아픈 결과를 가져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결정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다음 두 가지에서 결정이 납니다.
먼저 믿음의 결정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주관하며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자신의 삶에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당장 눈앞에 있는 이익에 눈멀지 않습니다. 잠시 유혹을 받으나 자신 속에서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순종하고 믿음의 결정을 하는 자가 됩니다.
이삭을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이삭이 자신의 집안을 이끌어야 했습니다. 성경은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창26:1)라고 하여 이삭에게 큰 시험이 닥쳤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이삭은 그랄 땅을 거쳐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습니다. 애굽은 곡식이 넉넉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삭에게 하나님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말씀하시고 그랄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사실 그랄은 평소에도 농사가 되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그랄을 가리켜 밀재배 한계선이라고 하는데 그랄에서 지중해 쪽으로 가면 밀이 재배되고 내륙으로 들어가면 재배가 되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블레셋 왕은 그에게 쓸모없는 땅을 내 주어 살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자신의 이성과 배치됨에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곳에 거했습니다. 성경은 기록하기를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를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창26:12-13)고 하고 있습니다.
이삭이 거부가 된 것은 이삭의 지혜와 재능에 있지 않았습니다. 단 하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은 결과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이삭을 시기하여 쫓아내고 파는 우물마다 빼앗았던 블레셋왕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찾아와 화친을 요구했습니다. 그 이유를 그들이 말하는데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창26:28)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힘입니다. 잔꾀가 아닙니다. 자신의 지혜나 재능이 아닙니다. 성도의 가장 큰 힘은 하나님입니다. 자신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백성을 하나님은 절대로 버릴 수 없는 분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의지하는 백성을 복 주심으로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결정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이라면 그렇지 못한 결정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욕심에 미혹되는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1:13-14)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십니다. 단지 시험에 드는 것은 자신의 욕심에 끌려 미혹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은 것은 그들이 돈의 욕심에 끌려 하나님의 성령을 속였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그들에게 땅을 팔아 전부를 드리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바나바가 칭찬 듣는 것을 보며 칭찬이라는 욕심에 이끌려 미혹되었던 것입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무엘선지자가 늦게 온다는 이유로 제사장만이 행할 수 있는 제사를 스스로 집례 하여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울도 이유는 있었습니다. 전장에 나온 군사들이 블레셋의 위용 앞에 하나 둘 도망가는 것을 보며 조급했을 것입니다. 싸움에서 이겨 승리로 주어지는 많은 것을 얻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가 싸움은 사람의 숫자나 전투력의 강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달렸다는 사실을 믿고 더불어 싸움의 승패가 하나님께 달렸다는 것을 믿었다면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욕심에 끌려 미혹에 넘어갑니다. 그리고 욕심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으로 포장하여 합리화합니다. 예를 들어 학생이 일등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는 이유로 불의한 행동을 한다면 그가 일등을 하여 칭찬을 듣고 스스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전혀 영광 받지 않으십니다.
예를 더 들 이유가 있을까요? 이미 모든 것을 알지만 우리 속에 욕심이 주의 말씀을 듣고 싶지 않게 한다면 말하는 수고를 더할 뿐일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의 미혹이 우리를 유혹할 때 야고보의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미혹하는 욕심의 유혹을 뿌리는 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미혹하는 자, 사탄의 모든 공격을 제어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아름다운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바울의 걱정을 뒤로하고 환란 중에도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서 돌아와 바울에게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바울은 위로받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살전3:7)
바울일행의 기쁨과 위로를 읽으셨습니다. 그들은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과 위로를 받은 것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바울일행은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고난과 어려움은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변화로 충분히 보상을 받은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엄마가 아기를 볼 때마다 해산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심지어 그 고통을 잊고 다시 아기를 낳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목회자의 가장 큰 기쁨은 환난 속에서도 믿음 잃지 않고 도리어 믿음이 더욱 자라는 성도들을 볼 때입니다. 그것이 자랑이고 기쁨이며 위로입니다. 반대로 목회자의 가장 큰 슬픔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행하지 않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데살로니가교인들이 환난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있는 모습은 위로를 받은 정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3:8)
위로 정도가 아니라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리라'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조멘'입니다. 이는 '생명의 호흡'으로 번역할 수 있는데 바울과 그 일행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염려 가운데 있다가 그들의 견고한 믿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일행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을 생각하며 한시도 편히 지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디모데가 가지고 온 소식을 듣고야 평안함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동료 성도들 중 누군가가 어려움을 겪으면 본인도 힘들지만 곁에 있는 우리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근심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한 당사자가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견고하게 선 것을 보면 바울의 고백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교회에서 성도들이 한차로 이동하다가 사고가 났습니다. 그 사고로 한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일은 교회에 시험거리가 될 수 있었지만 돌아가신 분의 가족들이 “그가 그렇게도 가고 싶은 천국에 갔다”고 말하며 도리어 차에 함께 있던 사람들과 운전자를 위로하고 교회를 위로했습니다. 그 일로 인해 교회는 더욱 든든해졌고 천국에 대한 분명한 소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본문에 ‘주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라고 한 모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위로가 주님이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의 성장이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서로 격려하고 기도하고 말씀으로 권면해주는 관계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