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위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8절
솔로몬은 위로자가 없는 인생은 헛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전도서 4장 1절은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살펴 보았도다. 보라 학대 받는 자들의 눈물이로다 그들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그들을 학대하는 자들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그들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라고 했고
4장 9절부터 12절에서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을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인생에 있어 위로자가 있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욥의 고난의 절정은 그의 아내가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하면서 인생에서 최고의 위로자가 될 수 있는 아내로부터의 버림받음이었습니다. 인간은 위로가 필요한 인간입니다. 그래서 엄마를 잃었던 이삭에게 아브라함은 리브가를 만나게 함으로 위로했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위로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위로자들은 위로받을 자들의 필요를 채워줄 때에 진정한 위로자가 됩니다. 배가 고픈 자에게는 밥을, 헐벗은 자에게는 옷을, 외로운 사람에게는 함께 있어주는 것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는 가족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이렇듯 인생에 진정한 위로자가 되는 것은 위로받기를 원하는 자들의 필요를 채워줄 때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성도는 서로 무엇으로 위로해야 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 땅의 것을 나누지 말라거나 그들이 나누지 않았던 사람들이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을 지난주에 보았듯이 서로 사랑하기를 풍성하게 하여 칭찬받는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 땅의 것들로 채워줄 수 있는 한계, 인간의 수고로 채워 줄 수 있는 위로자의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마지막에서 하신 말씀의 것은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을 본문에 입각해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게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이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본문에서 바울은 데살로나가교인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 성도들의 부활과 영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을 하면서 본문에서는 두 부류로 사람들을 분리합니다. 그것은 ‘자는 자들’과 ‘소망이 없는 다른 이’입니다.
먼저 자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를 가리켜 잔다고 하셨고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을 때도 잔다고 표현하셨습니다. 또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했을 때 성경은 그를 가리켜 ‘잔다’고 했고(행7:60) 바울과 베드로의 서신 여러 곳에서도(고전15:6, 15:51, 벧후3:4) 성도의 죽음을 잔다고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성도의 육체적 죽음은 잔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아담을 창조하시고 에덴에 두신 후에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말라고 하시면서 먹으면 정녕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후 아담과 하와가 그 열매를 따먹었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먹으면 죽는다고 하신 말씀은 육체의 죽음을 넘어서 하나님과의 단절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살려주신 성도에 대해 에베소서 2장 1절은 말하기를 “죽었던 자를 살리셨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 나사로의 동생인 마르다는 예수님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요11:24)이라고 하며 여러 가지 말씀을 나눌 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6)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은 육신의 생명이 죽지 않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단절이 다시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죽음은 단절, 죽음이 아니라 잔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잔다고 표현하는 것은 자는자는 반드시 깨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자는 자와 반대되는 개념의 한 무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소망이 없는 다른 이’입니다. 이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한 말입니다. 왜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소망 없는 사람이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이 땅에서의 삶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육신의 죽음 이후에 영원한 형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할 당시에 살았던 데오크리투스라는 사람은 그의 글에서 “희망은 산 자를 위한 것이며 죽음에는 희망이 없다.”고 했습니다.
조선시대 충신 성삼문도 죽음 앞에서 “죽음 저편에는 주막이 없다는데 오늘밤 죽어지면 누구 집에 쉬어갈꼬!”라고 했습니다.
암행어사 박문수도 죽음을 보고 시를 쓰기를 “빈손 들고 왔다가 빈손 들고 가니 세상일은 뜬 구름과 같아라 무덤을 이루고 나서 조문객들이 흩어져 돌아가니 그날 밤 산은 적적하고 달빛만이 처량하더라”고 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철학자 키에르 케골은 인생을 표현하기를 “불안이라는 열차를 타고 절망이란 터널을 지나 죽음이란 종착역에 닿은 죽음의 존재자(sein zun tode)”라고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연인들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절망적이고 소망 없는 자로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성도들에게 이런 두 부류에 대해 알기 원했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이 이 땅에서의 삶이 다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칫 성도들도 현실에 충실하다보면 하늘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환란이 너무 심하면 당장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기만 할 뿐 내세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불행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의 부활과 그 받을 영광에 대해 아는 것이야 말로 믿지 않는 자들처럼 죽음과 그 뒤에 오는 세상에 대해 무지하여 절망하지 않게 되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13절 마지막에 자들자들이 이 사실을 알아 슬퍼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고난 속에 있고 그 중에는 죽은자도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으로 인해 고난당하고 심지어는 죽었을 것입니다. 그 일로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잠겼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서 슬퍼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증인들이 나가 복음을 전하다가 무저갱에서 나온 짐승이 증인들과 싸워 이겨 증인들을 죽입니다. 그들은 사흘 반 동안 거리에 누워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살려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가게 됩니다. 또한 뒤에 이어서 나오는 짐승의 졸개들에게 굴복하여 666표를 받지 않으면 거래를 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성도들이 그 표를 받지 않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고 그 인내는 죽기까지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인내한 자들만이 144,000에 들어가고 그들만이 새노래를 부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바울은 주 안에서 죽은 자, 즉 자는 자들이 소망이 없는 자들처럼 슬퍼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부터 17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는 자들이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어떻게 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영광가운데 강림하실 때 죽었던 자들이 육체로 살아나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럽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가치관은 이 땅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눈을 하늘을 향했고 푯대도 하늘에 두고 달렸으며 자신이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식하고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가장 큰 위로와 즐거움은 육신의 부활이었습니다.
유대교 안에는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유대교인들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처럼 교회 내에도 부활을 믿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기에 바울은 말하기를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고 천국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자신이 원하는 삶을 모두 뒤로하고 예수님을 전하는 삶은 모두 헛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부활과 그리스도의 강림을 믿지 못하는 분들이 있다면 오늘 이 시간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로 마음의 평안을 꼽습니다. 그것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입니다. 마음의 평강 때문이라면 꼭 교회가 아니어도 방법은 많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힘입어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아 영생에 이르려 함인 것입니다.
잠깐 천국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누군가 말하기를 천국에 가면 재미가 없을 것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결혼도 안하고 매일 하나님을 예배하기 때문이랍니다. 또 어떤 분은 말하기를 이 땅에서 예배가 재미없는 분은 천국에 가면 적응을 못한답니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는 매일 예배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런가요? 이런 오해는 요한계시록 4장에서 구원받은 자들이 천국에서 하나님 보좌를 중심으로 찬송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예배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 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이사야서 43장 21절이 이러한 모습의 좋은 예일 것입니다. 이사야서 43장 21절은 “이 백성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찬송하게 하는 것이라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마치 찬송 안하면 안 되는 존재, 매일 찬송가를 입에 달고 다녀야 할 것 같이 생각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이 기록되기 전이 이사야서 40장 1절부터 보아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에서 건재 내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게 하겠다고 하는 말씀을 하시는 중에 한 말씀입니다. 이는 알기 쉽게 해석해 드리면 “내 백성은 내가 반드시 고토로 돌려보내 나를 찬송할 수밖에 없도록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옆구리 찔러 찬송을 받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돌보시고 구원해 주셔서 그들의 입에서 절로 찬송이 나오도록 하시겠다는 구원의 의지를 강력하게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매일 찬송하고 예배한다는 말은 맞지만 틀린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지금하고 있는 형식을 갖춘 예배를 하겠다는 것이라기보다는 구원의 은혜에 감격한 행복감으로 그곳에서 살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러기에 천국을 소망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성도들은 그렇게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보고 있는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강력하게 기다렸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정말로 기다리느냐는 것입니다. 삶이 고달플 때만 기다리지 말고 삶이 여유롭고 누군가와의 사랑으로 인해 세상이 모두 핑크빛으로 보여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십니까?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기철목사님은 낮에나 밤에나 주님 오시기만 기다린다고 노래했습니다. 먼 이상한 구름만 떠도 주님 오시나 했답니다.
쿰란지역에서 발굴된 어구들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광야에서 메시야를 대망하며 살던 쿰란 공동체의 유적이 세상에 드러났을 때 그곳을 발굴하던 중 특이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는 공동으로 식사하던 식당도, 정결탕도, 말씀을 필사하던 필사실도 발견되었습니다. 하지만 개인들이 살던 집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메시야를 대망하며 밤에도 광야에서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집을 짓고 살면 이 땅에 정을 붙일까싶어 집을 짓지 않고 메시야를 대망했습니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이 발굴되었는데 이곳저곳을 발굴하다가 어느 날 한 동굴에서 어구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물과 그물추, 어망 등이 많이 발견되었습니다. 학자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왜냐하면 쿰란 공동체가 있던 곳은 사해 북서부지역으로 사해에는 고기가 살던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어구가 발견된 것일까를 추론했습니다. 그러다가 에스겔 47장의 말씀을 생각해냈습니다. 그것은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사해에 흘러 물고기가 많이 사는 곳이 되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학자들은 추론했습니다. 이 어구는 메시야를 대망하던 갈릴리출신의 어부가 메시야의 때가 다되었다고 여기고 모든 어구를 정리하여 쿰란으로 와서 메시야가 왔을 때 가장 먼저 고기를 잡겠다는 마음으로 와서 있었다는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들처럼 메시야를 대망하느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이 땅의 것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고 성도들이 부활한 후에 누릴 상태에 대해 본문을 말하기를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으로 우리가 받을 구원의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르지 못한 재림관과 종말론이 한국교회성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게 했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생각하면 고난, 재난 등의 이미지를 생각해 냅니다. 그러니 기다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탄의 전략이고 이 전략에 성도들이 속은 것입니다.
신랑과 결혼 할 날을 기다리지 않는 신부가 있다면 그는 결혼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상적인 신부라면 신랑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랑과 결혼하여 영원히 함께 있는 것이야 말로 사랑하는 모든 부부의 바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본문은 주님의 재림으로 인해 벌어질 우리의 행복함을 표현한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있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강림을 진정으로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18절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이러한 말은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먼저 그리스도안에서 죽은 자들은 부활시키신 후에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를 여러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위로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 것으로 잠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한하고 그것이 사라 질 때 그 위로도 사라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흔들리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을 그 나라를 소개하고 함께 소망하는 사람들로 주변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위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