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있으라

살전 5:1-11

 

신자나 불신자를 막론하고 종말에 대한 관심사는 공통으로 갖고 있습니다. 종말에 대한 말씀은 성경에서 하고 있는데 모든 사람의 심령 속에는 본능적이랄까 세상의 종말에 대한 관심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관심을 넘어 집착하고 두려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난해 1221일은 전세계 종말론자들이 기다리며 두려워했던 날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종말의 때와 시기를 연구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0여 년 전에 동기 목사님의 인도로 홍천에 성경공부한다는 곳에 간적이 있습니다. 10여명이 모인 곳이었는데 그들은 종말론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날짜를 연구하고 그 날을 대비하여 지하벙커를 만들고 비상식량을 모은다는 이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날 밤에 저를 이끌고 간 목사님을 데리고 집으로 와서 다시는 그곳에 가지 못하게 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의 시기와 때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고 있고 어떻게 재림을 기다려야 하는지 보도록 합시다.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바울은 때와 시기에 대해 구체적인 날짜를 언급하지 않습니다. 단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주의 재림의 시기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데 그것은 그 날이 도둑같이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둑같이 임한다는 말씀은 예고하지 않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하지만 교인들 중 몇은 그 시기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일을 하지 않으며 오직 기다리는 일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된 이유는 임박한 종말에 대한 말씀을 오해하여 지금 곧 오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화장실에도 가지 못했고 잘 때도 옷을 입고 잤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시기에 대한 오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시기에 관해 아주 많은 관심을 갖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에 했던 질문도 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에 주님은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바 아니요 오직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만 국한 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현재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 아니 앞으로 다가올 모든 세대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바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구원받은 자 답게 살아가는 것이며 나아가 예수님께서 반드시 재림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도둑같이 임하실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두 세력에 대해 이어서 말씀합니다. 먼저는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 갑자가 임하신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부인하며 아직 때가 안 되었다고 말하거나 세상은 망하지 않는다고 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말하고 세상의 종말을 말하면 그럴 리 없다고 하며 도리어 비난하고 핍박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들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사람 지었음을 한탄하시고 물로 심판하시겠다고 작정하셨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시고 방주를 지어 그들을 구원하시고 범죄 한 세대를 심판하셨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기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17:26,27)라고 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 받을 때 천사들의 심판의 경고를 들은 그의 사위들을 농담으로 여기며 그 땅에서의 쾌락을 누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때 도둑같이 임하셔서 심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지 않는 자들이 당할 두려움입니다. 그들은 대비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열 처녀 비유에서 다섯 처녀는 등과 기름을 준비했고 다섯 처녀는 등만 준비되었을 뿐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던 것과 같습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는 혼인잔치에 참여하지 못하고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던 것입니다.

 

이어서 다른 한 부류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자들입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성도들에게는 주님의 재림이 도둑같이 임하지 않습니다. 2절에서는 도둑같이 임한다고 했으면서 본 절에서는 도둑같이 임하지 못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2절에서는 갑자기 임한다는 뜻에서 도둑같이 임하다고 한 것이고 본 절에서는 성도들은 이미 준비되어 있고 예수님의 재림을 깨어서 기다리고 있기에 도둑처럼 임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서도 형제들아 너희가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하고 했는데 여기서 어두움에 있다는 말을 렌스키는 말하기를 불신앙의 상태 즉, 임박한 멸망에 대한 무지, 무감각한 도덕심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은 어둠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있기에 도둑같이 임하지 못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5절과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그렇습니다.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 4절에서는 어둠에 있지 않은 자라고 했고 본 절에서는 빛의 아들, 낮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의 정체성에 대해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도 마태복음 5장에서 산상수훈을 시작하시면서 성도를 가리켜 말씀하시기를 성도는 팔복을 소유한 자로서 복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고 이어서 말씀하기를 성도는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성도는 어둠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어둠을 밝히는 존재, 세상의 썩음을 막아서는 존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요한일서에서 요한은 말하기를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존재라고 말하며 하나님과의 사귐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가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달리 표현했는데 그것은 빛의 아들’, ‘낮의 아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236절에서도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라고 했고 에베소서 58절에서도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빛의 아들이라는 말은 '빛 속에 있다'는 의미 이상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신 고로 그의 자녀들의 삶도 빛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빛으로 드러나는 삶을 달리표현하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 절에서 빛의 자녀와 반대적인 개념의 말로 자는 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문은 코이마오라는 헬라어로 도덕적인 무감각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자는 자를 본문에서는 밤에 속한 자, 어둠에 속한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어둠에 행하는 자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아니 종말도 심판도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은 어둠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둠일 수밖에 없다는 말은 그들의 삶도 질서가 없고 죄를 지으며 살면서도 두려움이 없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를 주님은 마태복음 24장에서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24:45-47)라고 하시면서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24:48-51)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본문 7절에서도 말씀하시기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는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깨어 있고 거룩한 삶에 깨어 있어 주께서 오시는 날 준비되어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이제 빛의 아들들은 어떻게 깨어 있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봅시다.

 

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바울은 깨어있는 것을 군사적인 표현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투에 나갈 때 가슴과 머리를 보호하는 것을 생각하며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고 한 것입니다. 이를 현대인의 성경은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므로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음과 사랑과 구원의 희망으로 완전 무장합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믿음의 3대 요소로 믿음, 소망, 사랑을 말하였습니다. 이미 전에 보았지만 13절에서도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 그리고 소망의 인내라는 말로 데살로니가교인들의 믿음을 칭찬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다시 각인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말씀에 근거한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고 그 믿음에 근거하여 기꺼이 사랑의 수고를 하며 선을 행하다가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께서 기억하시며 반드시 소망을 품고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본문에서는 믿음의 삼요소인 믿음 소망 사랑 중에서 소망을 더욱 강조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절이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무심코 읽으면 문맥에서 흐름이 끊긴 것처럼 보이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8절 후반에 구원의 소망의 투구라고 한 말씀을 생각하며 본 절을 읽으면 이해하는데 무리가 없습니다. 8절에서 믿음의 삼 요소 중 앞의 두 개 믿음과 사랑은 아무 수식이 없습니다. 하지만 소망은 앞에 수식하는 단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이라는 수식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소망은 구원에 대한 소망이란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근거한 설명이 9절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은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지 심판하시거나 고난을 주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르지 못한 종말관을 가진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무서워합니다. 그 모든 것은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성경은 심판에 대해 말씀하실 때 한결 같이 주님의 백성에게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던 것을 기억해 봅시다. 출애굽기 14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홍해를 건너는 구원의 은혜를, 뒤 따르던 애굽의 군사는 수장되는 심판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 9장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심판하시기 전에 먼저 예루살렘의 죄악을 보며 탄식하며 우는 자들의 이마에 표를 하라고 하시고 그들의 이마에 표가 끝났을 때 예루살렘을 심판하라고 명하시는데 이때 이마에 표가 있는 자들은 그 심판을 당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7장과 14장에서 구원받은 자인 144,000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심판 전에 그들을 구원하여 보좌로 인도하시고 그 후에 심판이 있을 것을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완성시켜 주시는 놀라운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 세상의 종말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날을 기쁨으로 기대하며 소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확실성을 더욱 구체화하여 말씀해 주고 있는 구절이 다음절입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 죽으신 이유가 바로 우리와 함께 하기기 위해서 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어 있든지 자든지는 비유적인 의미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살았든지 죽었든지' 주님께서 함께 살게 하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 드리면 주님께서 재림 하실 때 살아 있는 사람이나 죽어 무덤에 있던 자들이나 모두 생명의 부활을 얻어 주님과 영원히 살게 하시려고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 주님의 죽으심으로 그 모든 일을 이루셨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 시에 구원을 받기위해 필요한 우리의 행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어주신 것을 믿는 것이 행위의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도 선물로 주신 것이므로 인간의 의지를 구원의 조건에 넣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221절에서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깨끗한 세마포를 성도의 의로운 행실(19:8)이라고 했는데 이는 요한계시록에서 행실이 무엇이지 보아야 합니다. 이를 공로나 행위구원의 근거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서의 행실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믿음을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구원을 바라는 자들에게 마지막 권면을 합니다.

1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권면하라는 헬라어는 파라칼레이테입니다. 이는 '충고하다', '용기를 북돋우다'의 의미도 있으나, 본 절에서는 '위로하다'의 뜻이 강하게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권면하라는 말은 환란과 고난의 때에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서로 위로하여 넘어지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서로 덕을 세우라고 했는데 이는 권면하라는 의미에 하나를 더 보태는 의미인데 이는 헬라어로 오이코도메이테인데 이는 '집을 세우다'라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도우라'는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라는 것은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 서로 위로하여 넘어지지 않게 하고 나아가 서로의 믿음을 성장시키기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어 영원히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살지 말고 서로의 성장을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재림을 기다립시다. 그분의 재림은 도둑같이 갑자기 임하십니다. 하지만 주님의 재림을 깨어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는 도둑같이 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문 열고 그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날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국한 된 두려움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대속해주신 은혜로 완전히 사함을 얻은 존재임으로 구원을 이미 얻은 존재라는 사실을 믿고 담대하게, 그리고 기대감으로 주님을 기다립시다. 나아가 서로 위로하며 믿음을 세워주어 모두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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