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를 대하여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15절
지난 시간에 12절과 13절을 통해 사역자를 존중하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을 통해 형제를 대하여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6절부터 18절은 성도 자신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제목처럼 형제를 대하여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보도록 합시다.
먼저는 오래 참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바울은 형제를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래 참음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성령의 열매에 대해 말씀할 때 그 중의 한 항목이었습니다. 바울이 오래 참으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은 본 절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는 것에서 오래 참아야 합니다.
여기서 게으른 자들이란 말은 “아탁소스”라는 헬라어입니다. 이 단어는 부정 접두사 “아”와 “배열하다, 정리하다”라는 뜻을 가진 “탓소”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무질서한, 대열을 벗어난'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군사 용어로서 낙오한 병사에 대해 사용한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훈련받지 못한 병사로서 대열을 흩뜨리는 자들이었습니다. 본 절에서 이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일은 하지 않고 남의 신세를 지며 사는 게으른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은 “규모 없는 자들”이라고 했고 표준새번역은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했으며 현대인의 성경은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게으른 자”는 계획성 없고 무질서하게, 그리고 제멋대로 사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이런 자들을 “일하지 않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4장 11절에서 “너희에게 명한 것 같이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했던 바울의 명령을 무시하는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권계하라고 합니다.
권계란 충고하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일은 쉬운 것 같으나 어렵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누군가의 말을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나름의 철학을 내세워 일하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자신에게 충고하고 그 결과에 대해 경고까지 하는 것은 더욱 싫어하기에 누군가가 그에게 말해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잠언에서는 이러한 자를 미련한 자라고 하는데 이들에게 훈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 1장 7절에서는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라고 했고 27장 22절에서는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권계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권계함은 우리의 형제들을 그 무질서한 삶으로부터 건지는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의 경건하고 성실한 삶이 주변의 불신자들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의 서신 2장에서 믿음은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게으른 자를 권계하는 일은 한 번에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권계하고 자극해 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형제를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형제를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한 것은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마음이 약한 자는 겁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이 구절은 “소심한 자”라고 번역했습니다. 당시 믿음을 지키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환란을 견디어 내야 했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어려움을 견디어 내야 했습니다. 대부분의 믿음의 사람들은 잘 견디어 냈겠지만 모두가 그렇게 담대하게 견딘 것은 아니었습니다. 두려움에 쌓여 잠 못 이루는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신앙적인 차원 뿐 아니라 삶의 문제 속에서 마음이 약한 자들을 위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에 벌어지는 많은 일들 때문에 낙담하고 절망하는 이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심약해진 이들을 위로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경쟁적인 사회가 되면서 정신질환이 많아졌습니다. 우울증, 조울증, 대인기피증, 공황장애, 정신분열증, 강박장애, 알콜의존증, 주의력결핍장애 등 종류도 아주 다양해졌습니다. 이 모든 정신적인 병들은 마음이 약한 것의 다양한 표출방식인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위로해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한두 번 위로해 주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위로하고 격려해야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마음이 약한 자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회복 된듯하면 다시 넘어져있고, 비슷한 어려움을 겪으면 또 넘어져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 때로는 지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마다 일으켜 세워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언젠가 그 영혼이 든든하게 서게 되고 그도 마음이 약한 자를 격려해 주는 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장 9절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하셨고 데살로니가후서 3장 13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래 참아야 합니다.
세 번째로 오래 참으라고 한 것은 힘이 없는 자를 붙들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고 합니다. 여기서 힘이 없는 자란 부정접두사 “아”와 “힘”이란 뜻의 “스데노스”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힘없는, 강하지 않는, 약한”을 의미하며, 일차적 의미로 육체의 연약함, 즉 '병'을 나타내고 본문에서는 육체적으로 약한 자를 넘어 믿음이 약한 자를 의미합니다.
로마서 15장 1절에서도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로마서 14장에서 믿음이 약한 자와 강한 자의 관계에 대해 한 가지 예를 들었는데 그것은 음식과 날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모든 음식에 대해 거리낌이 없으나 믿음이 약한 자는 혹시 그 음식이 우상 제단에 올랐던 것일 수 있어 채소만 먹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믿음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믿음을 무시하지 말고 먹지 않는 자도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은 나아가 이런 문제로 인해 누군가 시험에 들고 믿음에서 떠난다면 그 연약한 형제를 위해 하지 않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에 믿음이 약한 자도 강한 자도 있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강한 자도 연약한 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신앙의 차이 뿐 아니라 경제력의 차이, 지적인 능력의 차이, 건강상의 차이 등이 있습니다. 그 여러 면에서 강한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는데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담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로마서 15장 1절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라고 했는데 여기서 담당하다는 말은 ‘바스타조’는 ‘손을 붙잡아주다, 상대의 짐을 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손을 붙잡아 주고 상대의 짐을 져 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행위인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은 부족한 사람을 채워주고, 힘이 있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을 도와주고, 지혜가 있는 사람은 우둔한 사람을 보살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공동체를 주신 가장 큰 이유는 서로를 돕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붙들어 주라는 말은 “안데케스데”인데 이는 “단단히 붙잡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지탱해 주다“ 혹은 ”지지하다“의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를 붙들어 지탱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 인(人)자는 두 사람이 서로 기대어 지탱해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길을 가다보면 종종 가로수에 바람에 넘어지지 말라고 지지대를 세워 놓은 것을 봅니다. 그것처럼 우리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사실 그 붙들어주는 수고의 시작은 상대를 위한 것이었지만 결국은 자신도 넘어지지 않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도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썬다씽”의 일화를 알고 있습니다. 그가 추운 날 산을 넘어가다가 쓰러져 있는 한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자신만 살겠다고 못 본 척 하고 갔지만 썬다씽은 그를 그냥 두고 갈 수 없어 그를 업고 갔습니다. 그가 가다가 먼저 앞에 갔던 사람들의 시체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죽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썬다씽은 등에 업힌 사람의 체온으로 인해 서로를 지켜주었다는 일화입니다.
우리는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 힘이 믿음이건, 경제적인 것이건, 건강의 문제이건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소자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고 소자가 옥에 갇혔을 때 그를 돌보안 준 것은 내게 한 것이라고 하시면서 상을 잃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 게으른 자에게 권면하고, 마음이 약한 자를 격려하며,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는 일에는 오래 참음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래 참읍시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성도를 대하여 항상 선을 쫓아야 합니다.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먼저는 말씀하시기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본성에 역행하는 말씀입니다. 사람을 누구나 당하면 당한 만큼 아니 이상으로 보복하고 싶어 합니다.
주님은 이런 인간의 보복성향에 대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오른편 뺨을 맞으면 왼편 뺨도 돌려 대라는 말씀입니다. 겉옷을 요청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랍니다.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같이 가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바울도 말하기를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2장 14절에서도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17절부터 21절까지 말씀하시기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원수에 대하는 성도의 자세에 대해 크게 네 가지 금지 명령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저주하지 말라,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라, 악에게 지지 말라”입니다.
이러한 모든 가르침은 주님께서 말씀하고 행하신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원수들에게 보복하지 않으셨으며, 제자들에게도 보복과 복수를 하지 말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보복하려고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원수에 대한 개인적인 보복을 금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삼가 누가 누구에든지"라는 말은 아무리 악한 사람일지라도 용서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아야 할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모든 사람은 용서할 수 있는데, 어느 누구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때로 부모나 형제, 또는 배우자나 친구처럼 가까운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받고 그들을 용서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아야 할 대상의 한계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악을 모두 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우리가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용서의 한계, 그것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내려오실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칭찬을 기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18:21) 이에 주님은 칭찬을 커녕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랍비들이 사람을 용서할 때 세 번까지 하고 그 이후에는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 것에 조금 더 보태 일곱 번을 말씀한 것인데 주님은 칭찬은커녕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하라고 하셔서 용서에는 한계도 횟수도 없다고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악으로 악을 갚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악으로 악을 갚으려고 하는 사이 자신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원수 갚는 것을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주님의 말씀대로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용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바울은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고 하고 있습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는 수동적인 명령이라면 항상 선을 따르라는 것은 적극적인 형제사랑의 행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산상수훈에서 제자들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대하여 악으로 악을 갚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선을 따라야 할 것을 말씀하실 때 마태복음에서는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하셨고 그 소금과 빛은 착한행실이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성도라는 이름, 어느 교회 소속해 있다는 것만으로는 세상의 소금도 빛도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착한 행실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선을 따르는 행위입니다.
만약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 사랑하고 사랑받기에 합당하다고 여기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빛으로 소금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6장 32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라고 하셔서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는 것은 죄인들도 하는 것이므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드러나기에는 부족하다고 말씀합니다.
같은 의미에서 마태복음 5장 47절은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대하여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선을 따르라고 했는데 여기서 “따르라”는 말은 “디오코”라는 말로 “뒤 쫓다, 추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선을 따르라는 것은 어떤 상황, 어떤 사람에게든지 항상 선한 것을 추구하여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서 25장 21절부터 22절은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라는 말은 원수 갚는다는 말이 아니라 원수에게 선을 행함으로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성도를 형제를 대하여 오래참고 항상 선을 행해야 합니다.
오래 참으라는 것은 게으른 자를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를 격려하며 힘이 없는 자를 붙들어 주는 일에 대해 오래 참으라고 한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사람을 대하여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항상 선을 좇으므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제를 대함으로 성도의 교제가 천국의 교제가 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