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화를 위하여
데살로니가전서 5장 19-24절
바울은 성도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성화에 대해 마지막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화란 말은 거룩하게 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앞서 12절부터 바울은 사역자를 대하여 존중하라고 했고 형제를 대하여는 오래참고 선을 행하라고 했으며 자신을 대하여는 기뻐하며 감사하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성화되어야 할 것을 가르치며 성화에 필요한 어떤 것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도록 합시다.
성도의 성화를 위해 먼저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이 구절을 일부 사람들은 성도도 죄를 지으면 성령이 우리 안에서 떠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성도가 범죄하면 성령이 떠난다고 말하며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는 것은 성경 전체가 말하는 은혜구원에 반하게 되는 결과를 맞습니다. 성령께서 절대로 떠나지 않는다는 것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본문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호 퓨뉴마 매 스벤늬미”라는 말입니다. 이 중에서 소멸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벤늬미”입니다. 이는 “끄다, 진화하다, 억누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NIV는 “Do not put out the Spirit's fire”라고 번역했습니다. 또한 한글번역본들도 공동번역은 “성령의 불을 끄지 말고”라고 했고 표준새번역도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이상의 번역본들이 의미하는 성령은 성령의 충만과 관계되어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은 성령을 떠나게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성령의 불 즉, 성령의 충만을 잃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말의 의미는 성령의 충만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불은 어떻게 소멸하며 성령의 충만은 어떻게 유지하는 것일까요? 먼저 성령의 충만을 유지하고 더 깊어지는 것은 말씀과 기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의 불을 소멸하는 것은 은혜의 자리를 떠나 죄를 지으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현대인의성경은 본문을 번역하기를 “성령님의 활동을 제한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성령님의 활동을 제한한다는 것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이나 은사주의자들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것에 거부하는 것을 성령 훼방죄나 성령의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활동을 제한한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실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지 않고 도리어 그분의 인도에 거부하고 대항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맘껏 일하실 수 있도록 그분이 원하시는 삶의 자리에 항상 있어야 하며 원하시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은 은혜의 자리에 거하고 말씀과 기도의 일에 힘을 다하며 우리 속에서 거룩한 삶에 대한 욕구를 주시는 그분의 역사하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활동을 제한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리기를 성령의 양식은 성경이고 그 성경을 소화시키는 것이 기도라고 했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맘껏 활동하시게 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양식인 성경을 자주 대해야 합니다. 말씀을 자주 듣고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속에서 자리 잡고 능력으로 화하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충만함을 유지하고 더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도의 성화를 위해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고 한 본문도 몇몇 사람들이 잘 못 사용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에서 예언은 미래를 미리 알려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적 의미의 예언이란 말씀을 바로 해석해서 바로 전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4장에 언급된 방언과 예언에 대한 말씀을 할 때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고 본문의 말씀도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성령의 감동을 받아 전하는 말을 멸시하지 마십시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을 이 시대의 예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종종 꿈이나 환상 등을 통해 개인적인 예언을 하는 것이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여 전하는 것보다 더 우선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 신비적 은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역은 기록된 말씀의 통제를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가장 중요한 예언은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종교성이 강한 성도들은 기록된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의 말보다 그런 은사적인 성격의 말들에 더 귀를 기울일 뿐 아니라 기록된 말씀과 그것에 근거하여 전한 말씀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은사도 기록된 말씀을 넘어서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2장 18절과 19절에서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멸시한다’는 말은 헬라어 “엨수데네오”라는 말로 “무시하고 업신여기며 경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업신여기고 경멸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한 것을 봅니다. 롯의 사위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겼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마리아성이 아람에게 포위되어 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겠다는 엘리사의 말을 멸시했던 장군은 다음날 아침 사람들의 발에 밟혀 죽임을 당했습니다. 예레미야의 말씀을 듣지 않고 그가 전한 말씀두루마리를 칼로 찢어 불에 태웠던 유다의 왕 여호야김은 느브갓네살에 의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지금 이시대도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말씀을 멸시해도 당장 어떤 해가 없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사40:8)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의 성화를 위한 세 번째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것입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범사에”는 이미 지난 시간에 말씀 드린 “파스”라는 헬라어의 번역입니다. 모든 것입니다. 모든 상황, 모든 형편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좋은 것을 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헤아리라고 하는데 이는 “도키마조”라는 말로 “시험하다, Test, 조사하다”라는 말입니다. 이는 모든 상황 속에서 자신이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 생각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인지 조사하고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생각 없이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남들이 하니까 자신도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흐름이 자신의 행동의 원리가 되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기준은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좋은 것을 취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것은 헬라어 “칼로스”입니다. 이는 좋다는 뜻과 함께 “선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좋은 것은 선한 것입니다. 또한 그 선함의 기준은 도덕 윤리가 아닙니다. 선의 기준 또한 말씀입니다. 믿음 안에서 행하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전날 딸이 왜 하나님은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전쟁에서 대적을 죽이시고 우상숭배자나 현장에서 간음한 자 등을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앞에서 선이 우상숭배자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일까요? 그를 돌로 쳐 죽이는 것일까요?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전자가 훨씬 선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의 선은 후자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구약에 적용되었던 말씀을 오늘날 적용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던 인간적인 도적 윤리의 기준의 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그것에 합당한 선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행동하는 것이 성도의 성화에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분별하여 좋은 것을 취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취하라는 말은 강하게 붙들라(헬라어 “카테코”)는 말입니다. 이 말을 배에 적용하면 “~을 향해 키를 잡다, 정박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헤하려 좋은 것을 취하라는 말은 강한 의지를 가지고 그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옳다고 여기는 것을 대해 힘을 다해 붙들라는 것입니다. 손해가 되어도 그렇게 살라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잡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가면서 말하기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3-24)라고 한 것이 “카테코”,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기꺼이 죽어주신 것이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을 취하여 우리를 통해 그리스도가 온전히 드러나는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도의 성화에 있어서 네 번째는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는 것입니다.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한 말씀에서 “어떤”은 이미 여러 번 등장한 단어 “파스”, “모든”입니다. 이어서 나오는 단어인 모양(에이두스)은 형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다시 해석하면 “모든 종류의 악은 버리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악을 흉내 내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아예 버리라는 것입니다. 버리라(아페코)는 말은 “멀리하다, 억제하다”라는 말입니다. 이 시대를 살면서 온갖 악이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분명히 악이라고 여겨지는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말, 사기 등의 죄 아니라 교묘하게 위장하여 진리인양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의 신앙을 무너뜨리는 모든 것은 특별히 주의해야 할 악입니다.
종교 간의 화해를 주장하며 그들을 인정하는 것이 사랑이고 포용력이 넓은 자인 것처럼 행동하여 많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진리의 벽을 허물게 하는 종교다원주의, 자신의 욕심을 합리화하기 위해 말씀을 왜곡하는 합리화의 죄, 말씀을 바르게 전하지 않아 많은 영혼들을 사망으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의 죄, 말씀 앞에서 순종하지 않는 거역의 죄 등 온갖 종류의 악이 있습니다. 이 모든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를 유익하게 하는 것 같은 모든 유혹으로부터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악은 접하지 않는 것이 유익합니다. 맛보는 순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다시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악이라고 정의한 모든 것은 처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가까이 가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연약이 그 악에 미혹을 받아 죄를 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을 버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 이렇게 말씀하신 바울은 이 성화의 주체에 대해 말합니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의지가 강조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성화의 근본적인 힘을 제공하시는 분은 하나님이란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바울의 기도입니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본문은 바울의 기도입니다. 주께서 친히 성도를 온전하고 거룩하게 하시게 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성화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바울은 영과 혼과 몸이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학적 논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삼분설로 보느냐 이분설로 보느냐입니다. 전통적인 견해는 이분설입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만드시고 영을 불어 넣어 생령이 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도 성경의 많은 부분이 영과 육으로 구분합니다(마 6:25, 전12:7, 고전 5:3,5). 그런데 본문이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이 인간을 영, 혼, 육으로 분류하던 그리스인인 데살로니가교인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한 표현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전인격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흠 없이 보존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해 영과 혼과 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어찌 되었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 성화에 근본 주체가 성령이라는 사실을 기도 중에도 분명히 밝히며 그리스도인답게 성화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도 중에 했던 성도의 성화의 주체가 성령이라는 사실을 말했다면 다음절에서는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24절도 마저 읽겠습니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너희를 부르신 이가 미쁘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미쁘시다는 말은 헬라어 “피스토스”입니다. 이는 “신실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한번 부르신 이는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죽음 앞에서 이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 후서 1장 12절에서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어서 디모데후서 2장 11절로 13절에서도 말씀하시길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미쁘시다는 말씀은 하나님은 믿을 만하다는 말씀입니다. 한번 말씀하신 것은 반드시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를 선택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으로 우리를 반드시 성화의 과정을 밟게 하시고 성화되기 하시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30절은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바로 하나님은 미쁘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그가 이루시리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가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분이심을 믿으며 절대로 우리의 실패로 우리를 버리는 분이 아니라 끝까지 우리를 붙들어주시며 성화시켜주실 줄 믿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인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도 모든 피조물들도 성도의 성도다움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도우심 힘입어 성도다워지는 성도, 날로 성화되고 결국 주님 앞에 서는 날 영화롭게 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