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복음
데살로니가전서 5장 25-28절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
Sola Gratias: 오직 은혜로
Sola Scriptura: 오직 성경으로라는 원칙으로 신앙생활 했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오늘 데살로니가전서 마지막 인사로 “오직 복음”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복음은 바울의 삶을 이끈 힘이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모든 것을 버렸고 복음 때문에 기꺼이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복음 때문에 인생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신앙이 본서의 마지막 인사말에도 그대로 배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먼저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마지막 인사에서 첫 번째로 한 것이 기도를 부탁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의 기도 부탁은 이곳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5장 30절에서도 에베소서 6장 19절에서도 빌립보서 1장 19절에서도 데살로니가후서 3장 1절에서도 그리고 빌레몬서 1:22절에서도 기도를 부탁하며 인사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기도 부탁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을 악에서 지켜주시기를 기도할 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한 기도부탁이었습니다. 로마서 15장 30절도 빌립보서 1장 19절도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6장 19절은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의 기도와 원함은 오직 복음증거였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삶을 통해 복음이 증거 되기 위해 기도하기를 힘써야 될 뿐 아니라 그 일을 위해 삶을 드린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모두들 자신의 삶을 위해 기도하기도 바쁘신 줄 알지만 무엇보다도 이 땅의 복음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증거 하는데 전심을 다할 수 있도록 거룩한 삶과 경제적 필요를 위해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사역자들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직 복음을 위해 힘을 쓸 수 있도록 성도들은 기도해 주어야 할 사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땅의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을 위해 힘을 다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사역자들이 어떠한 형편과 상황 속에서도 복음만을 증거하고 복음이 삶 속에서 삶으로 드러나게 되는 일을 위해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현재 교회의 문제는 복음의 상실입니다. 복음은 없고 온갖 행사와 비복음적 신비주의만이 가득한 것이 현실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매체가 발달하고 마음만 먹으면 복음을 접할 수 있지만 복음이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가 현재입니다. 성도들은 말로는 오직 복음만을 외치지만 현실에서는 복음이 아닌 상황, 복음이 아닌 성공, 복음이 아닌 물질을 선택하여 사는 것이 지금의 교회 모습입니다.
오직 복음만이 우리와 교회를 지배해야 합니다. 그것이 생명이고 진리이고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된 우리들의 사명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4장 3절에서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라고 하면서 기도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시대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사역자들이 생활에 얽매이지 않도록, 사역자들이 온갖 죄악의 유혹으로부터 능히 이길 수 있도록, 사역자들이 오직 복음만을 증거 하도록, 사역자들이 복음을 증거 할 때 듣는 이들의 마음이 열려 주님이 그 안에 맘껏 일하실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오직 복음을 위하여 첫 번째로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다면 다음으로는 성도들의 삶에 오직 복음이 있어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입맞춤'으로 인사하는 법은 고대 동방에서 유행하던 관습으로 신분이 같은 사람들끼리는 뺨에 입을 맞추었고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는 손이나 발, 혹은 무릎이나 가슴 등에 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화가 유대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그 후 그리스도인 사회로 흘러들어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인사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사법은 2,3세기경까지 교회에서 통용되었으나 폐단이 많아 초대 기독교 총회에서 그것에 대한 별도의 규정을 만들었으며 후에는 폐지되었습니다. 초대 교회의 '거룩한 입맞춤'은 신앙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구실을 하였을 것이라고 신학자 Bruce는 말합니다.
한편 본문에서 '입맞춤'으로 인사하라는 바울의 요구는 그의 다른 서신들에서도 등장합니다(롬16:16;고전 16:20; 고후 13:11; 벧전5:14).
그런데 본문에서 입맞춤을 수식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하게’라는 단어입니다.
바울이 모든 형제들을 대하여 인사하라고 하면서 ‘거룩하게’ 라는 말을 사용한 이유는 모든 형제를 대하여 문안할 때 인간적인 예의를 갖추고 인사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인사를 하는데 정중하게 하라거나 음란한 생각을 품지 말고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거룩하게 문안하라’는 말은 그 문안의 목적, 문안의 내용, 문안 속에 배어 있어야 할 어떤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복음입니다. 성도는 누구를 만나든, 누구와 관계를 맺든지 간에 그 안에 복음이 드러나고 복음이 증거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입맞춤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일반적인 만남으로 만남을 허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만남은 거룩해야 합니다. 거룩은 구별임으로 성도들의 만남은 일반적인 만남과 구별이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 복음이 있고 그 안에 그리스도가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이 일반 사람들의 입맞춤과 성도의 입맞춤의 차이인 것입니다. 만약 성도의 만남이 온갖 세상의 말과, 음란하고 거친 말로 도배되어 진다면 그 속에서는 복음이 활동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속한 모임에는 복음이 흘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입맞춤인 것입니다.
이번 중고등부 수련회를 통해 행복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학생들이 요즘 아이들 같지 않아서였습니다. 2박3일 동안 함께 먹고 자면서 아이들의 언어습관, 행동, 믿음의 정도 등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언어는 정돈되어 있고, 서로 절제하며 배려하고 순종하는 모습, 나아가 신앙에 대한 관심과 하나님을 의지하여 미래를 맡기는 학생들을 보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곁에 텐트를 쳤던 청년들의 거친 언어와 문란한 삶의 모습과 대조되는 우리 아이들의 모습은 거룩한 입맞춤의 삶이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합시다. 그것이 성도의 바른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울은 오직 복음을 위해 세 번째로 명하는 것은 큰 소리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주라”
바울은 마지막 말을 아주 강력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를 힘이어 명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주님을 힘입는다는 말은 이 말의 권위를 바울 자신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두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의 사도적 지위나 연륜, 그들과의 관계에 근거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권세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반드시 해야 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명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명한다는 말은 헬라어 “에노르키조”입니다. 이는 “맹세하다, 엄숙히 약속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맹세시킨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렇게 강력하게 명하는 이유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하고자 하는 말의 중요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가 아니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의 강조가 명한다는 말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 중요한 것은 “모든 형제들에게 이 편지를 읽어주는 것”입니다.
모든 형제들에게 이 편지를 읽어주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울이 전한 복음에 동의하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데살로니가교회 안에 이방인 회심자들과 유대인 회심자들 사이에 모임을 달리했는데(Harnack) 그들 모두가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형제들에게 읽어주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누구나 들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죄인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가난한 자나 부요한 자나, 많이 배운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들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복음만이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철학이나 상담학,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 의학이나 과학 등이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16절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읽어 주라”고 했는데 이는 헬라어 “아나그노스데나이”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큰소리로 낭독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큰 소리로 낭독했던 이유는 서신에 쓰여진 문자를 독해할 만큼 교육받은 사람들이 교회 내에 많지 않았고 사본을 만드는 일도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아가 큰 소리로 읽어 주라는 의미는 모든 사람들이 듣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들어도 되고 안 들어도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안 들으면 죽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큰 소리로 읽으라고 한 것입니다. 사거리 어귀에서 외쳐야 합니다. 전도가 되지 않는 세대라고 우리들은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죽은 영혼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연재해나 환란으로는 주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9장 20절과 21절은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 10장과 11장은 주의 말씀을 먹은 전도자들이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같은 의미로 로마서 10장 14절과 15절은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전해야 합니다. 그것도 큰 소리로 외쳐야 합니다. 큰 소리로 외치라니까 확성기 들고 다니면서 외치라고 이해하시면 안 됩니다. 큰 소리란 모두가 알아듣게 전하고 간절함으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유대가 망할 것을 예언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할지어다(겔 6:11)”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말하라는 것은 간절하게 외치라는 의미입니다. 안타까움으로 외치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모두 그러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울면서 외쳤고 이사야는 톱에 켜죽는 고난을 당할 정도로 외쳤습니다.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그 뒤를 이은 사도들도 그렇게 간절하게 외쳤습니다. 본 성경을 기록한 바울이야 말로 그렇게 외쳤습니다. 로마서 9장 3절의 말씀에서 바울은 자신의 민족을 위하여 어떠한 심정인지 말하고 있습니다. 기록되기를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간절함과 열정으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이 복음 전함은 본문에서도 강력한 명령임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9장 16절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도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았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고 3장 17절에서 말씀하시면서 악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여 구원 받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악인에게 전하라고 했는데 사명을 받은 사람이 전하지 않으면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라고 18절에 말씀하여 책임을 물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전해야 할 사람이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냥 두지 않고 책임을 꼭 물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열왕기하 7장에 보면 아람 군대가 사마리아 성을 완전히 포위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랫동안 포위되어 있는 동안 성 안에는 먹을 것이 다 떨어졌습니다. 굶어 죽는 사람이 생겨났으면 심지어는 자기의 자식을 잡아먹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전쟁 통에 성 밖에 살고 있던 나병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이래저래 죽을 판이었습니다. 그들은 굶어 죽느니 아람 군대에 가서 구걸하자고 하여 아람 군대가 있는 적군 진지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아람 진영에 이르렀을 때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아람 군이 다 도망을 치고 막사들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8절에 "그 나병환자들이 진영 끝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그들은 사마리아 성 안에 있는 백성들이 굶어 죽고 있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9절에서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소식을 전하여 굶어 죽어가던 사마리아 성을 구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 앞에 받은 사명과 영혼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듯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에스겔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겔 3:11)라고 하셨고 바울도 디모데에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성도를 성도답게 하고 교회를 교회되게 하며, 찢어지고 나뉘어졌던 교회와 성도들의 관계를 하나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복음은 누구든지 들어야하며,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전해야 합니다. 전하는 이의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와 같이 축복문은 바울 서신의 전형적인 형식으로서 그의 서신들에서 다양한 길이로 나타나고 있습니다(골 4:18;살후 3:18).
바울은 마지막 인사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은혜를 충만하게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게 된 사람들의 삶에 오직 복음이 충만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도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직 복음만이 생명임을 기억하고 이 복음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 세상을 향해 오직 복음만을 전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