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서기 위하여

데살로니가후서 110-12

 

바울은 환난 받는 데살로니가교인들을 위로하면서 말하기를 환난 받는 성도들에게는 안식으로 갚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바울은 성도들이 받는 환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연결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강림과 성도들의 환난이 가져올 영향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의 강림 시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먼저 보도록 합시다.

 

8절과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이 말씀은 이미 6절에서 너희로 환난을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라고 했는데 이 말씀의 종말적 성취가 본문 8절에서 말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인 것입니다.

 

환난 받게 하는 자들을 본절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를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종종 억울해 합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지옥 가는 것은 억울하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믿느냐 석가를 믿느냐의 문제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다른 차원의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을 제대로 알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심판받는다는 말의 참 의미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모든 죄의 책임을 지시고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죄 없이 함을 입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를 가리켜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316절부터 18절까지 당신을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록되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심판은 개인적 종말을 당할 때도 받지만 예수님께서 강림하시는 우주적 종말의 때에 완전한 심판의 형벌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받을 형벌을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난다는 말은 그분의 은혜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과 현대인의 성경은 이 구절을 영광에서 떨어져 나가, 주님 앞에서 쫓겨나로 번역했습니다.

 

이 말은 다시 회복될 가능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말은 은혜를 입는 것을 의미하고 얼굴을 떠난다는 것은 은혜에서 떨어져 나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씨름 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그 장소를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의 브니엘로 바꾼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얼굴에서 떨어져 나감은 엘리 집안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 그의 아들들이 죽고 법궤가 빼앗겼을 때 그의 며느리가 아들을 낳으며 그의 이름을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뜻의 이가봇으로 정한 것과 같고 에스겔서에서 예루살렘의 가증한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고 그 성이 심판받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난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단절이고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 주어질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그 심판에 대해 말하기를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멸망이라는 헬라어 올레드론완전히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린다란 의미로서 단순히 멸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몰락하여 삶의 의욕이 송두리째 박탈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삶에 대한 가치를 모두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믿지 않는 것의 결과는 참혹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라는 개인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모두 담당한 죄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 자신의 죄로 형벌을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그 죄의 결과인 사망을 당하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여 그들도 죄 사함을 받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데살로니가교인들과 사도들도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도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들과 달리 믿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강림의 때는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는 때가 되는 것입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날에 그가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들에게서 놀랍게 여김을 얻으시리니 이는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

 

현대인의성경은 본 구절을 그 날에 주님이 오셔서 모든 성도들에게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것이며 여러분도 우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므로 그 성도들 가운데 포함될 것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날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것이 당신 자신을 위해 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도를 위한 재림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한 것은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영원한 안식으로 들이실 것이며 그 일로 인해 성도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시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당신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의 의미는 당신께서 친히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냄으로 그 백성들에게 영광을 받겠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은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심으로 영광을 받으시겠다고 하신 말씀의 결정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서 4321절 말씀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그 은혜에 감격하고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할 수밖에 없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지에 대한 강력한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께서 구원하시는 날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구원의 은혜에 놀랄 수밖에 없는데 그 일에 동참하는 것은 바울 일행 뿐 아니라 자신들을 통해 복음을 듣고 주님을 믿은 모든 사람들이 누릴 기쁨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개역개정성경에 가로 친 부분 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를 현대인의성경은 여러분도 우리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므로 그 성도들 가운데 포함될 것입니다.”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바울도 자신의 죽음 앞에서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하면서 자신 뿐 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예비 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그분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4장에서는 구원받은 성도들이 받을 영광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향해 찬송 부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도 구원받고 매일 찬송 부르는 것이 천국생활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땅의 삶이 팍팍하고 환난이 많아도 믿음을 지키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성도들이 됩시다. 때가 되어 주께서 영광가운데 강림하실 때 주님을 찬송하게 될 것을 소망하며 소망의 인내로 믿음을 지키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놀라운 은혜가 예비 되어 있다고 말하며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어떻게 될 것을 말하며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이러므로란 앞에 했던 말에 근거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서 강림하실 때에 믿지 않는 자들을 멸망의 형벌을, 믿는 자들은 주를 찬송해야 하기에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성도들의 믿음이 보존되기를 원하는 바울의 마음을 기도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첫째로는 부름에 합당한 자로 여겨지게 되길 원하며

둘째로는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고

셋째로는 주의 은혜로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도 주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먼저 부름에 합당한 자로 여겨지길 원한다는 말은 주께서 성도를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를 부르신 목적인데 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위해서는 나름의 과정을 거치게 하십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말한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되는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합당한 자로 여겨지길 원한다고 하고 있는데 여기서 합당하다는 말을 헬라어로 악시시오입니다. 이는 자격을 갖춘 자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환난을 비롯한 모든 시간과 환경은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름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한 과정인 것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런 과정 속에서 실족하지 않고 합당한 자가 되는 은혜가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야고보서 12-4절에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라고 한 것입니다.

 

성도가 환난을 통해 주께 합당한 자로 성장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성도도 영광을 받게 됩니다. 이는 마치 운동선수가 훈련이라는 힘든 시기를 땀과 눈물로 이긴 후에 본인과 나라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환난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께 합당한 자로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선지자 활동을 할 때입니다. 느브갓네살은 여호야긴왕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는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가 커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지 않음을 예레미야에게 환상과 그 해석을 통해 알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24장에서 하나님은 무화과 두 광주리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는 극히 좋은 무화과 하나는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는 무화과 광주리였습니다. 사람들은 극히 좋은 무화과는 남아 있는 자들로 극히 나빠서 먹을 수 없게 된 무화과광주리는 끌려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24:5-7)라고 하셨습니다.

 

반대로 남아 있으면서 자신들이 좋은 무화과라고 착각하고 있던 그들을 향해서는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리되 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서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에게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며 말 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24:8-10)이라고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끌려간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끌려간 사람이나 남아있는 사람이나 모두 같은 멸망 받을 이스라엘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끌려간 사람들을 잘 돌보아 주시고 좋게 하여 다시 인도하여 세우고 그들의 마음에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주게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좋은 무화과가 되는 것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그 방법은 환난을 통해서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호세아서 215절에서 아골 골짜기로 소망을 문을 삼아주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 아골 골짜기의 어려움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고 더 깊어질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환난을 당하는 기간을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롭습니다. 더 괴로운 것은 그 이유와 끝을 알 수 없을 때 더 힘들고 괴로운 것입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그는 환난의 이유도 끝도 알 수 없었기에 더욱 괴로웠습니다. 그러기에 욥은 죽기를 구하고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여호수아도 아이성 전투에서 36명이 죽고 돌아왔을 때 절망하고 요단강 건너편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어리석을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환난은 때로 우리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게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욥이 중도에 목을 맸다면 그는 아름다운 결과를 볼 수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서 죽었다면 그 뒤를 이을 엘리사는 없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두려워 요단강 건너편을 돌아가거나 포기했다면 이스라엘은 없는 것입니다.

 

환난의 때에 다윗 같아야 합니다. 다윗은 환난의 때에 하나님을 자신의 산성이요 방패요 요새라고 찬양하고 주를 의지하였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난 받을 때 그 환난의 이유도 끝도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절망하지 맙시다. 원망하지 맙시다. 어리석은 생각에 잡히고 실행하는 자가 되면 안 됩니다. 소망의 인내로 환난을 이기고 부름에 합당한 성도가 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둘째로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는 성도들이 구원받는 것에만 합당한 자로 여겨지기 위한 것만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에 합당한 삶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선한 삶에 대해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개인적 구원을 이루는 데는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충실히 하는 것이면 되지만 대 사회적인 문제인 삶은 좀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고 시험거리를 만나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윤리 도적적인 삶뿐만 아니라 어려운 사람을 돕고, 주의 복음을 전하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맡겨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처럼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문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모든 선함을 기뻐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기뻐한다는 말 속에는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도 포함된 말입니다. 또한 그것은 믿음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믿음을 행함으로 역사한다고 하였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도 지금 모든 선함을 기뻐하며 믿음의 역사를 행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셋째로는 주의 은혜로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도 주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세 번째의 기도는 앞의 두 가지를 이루었을 때 성취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믿음도 선을 행하는 거룩한 삶의 믿음도 없는데 예수님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고 우리도 주 안에서 영광스럽게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영광 받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구원의 은혜를 입을 뿐 아니라 그에 합당한 삶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513절부터 16절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성도들을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존재라고 말하면서 그 사귐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아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형제사랑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두운 세상이 빛을 보기를 원하는데 그 빛은 성도들의 삶을 통해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빛은 곧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일을 통해 주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절이 그 말씀을 다시 해주고 있습니다.

12절을 같이 읽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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