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마십시오
데살로니가후서 2장 1-12절
1992년 10월 28일은 한국사회가 기억할 정도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날입니다. 그날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거짓 가르침이 한국교회와 사회를 심하게 흔들어 놓았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장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10여 년 동안 ‘생명의말씀사’에서 번역의 일을 하면서 “다가올 미래”를 줄여 다미선교회를 조직하고 “다가올 미래”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여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는 후에 사기혐의로 옥에 갇혔다가 풀려나 이답게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목회하고 있습니다. 당시 중학생으로 함께 했던 하방익과 권미나라는 아이들이 계시를 받았다며 선전했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랐습니다. 그들은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 자신들이 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하방익은 하다니엘이라고 개명하고 하남에서 목회 중에 있고 권미나씨는 경상도지역에서 시한부종말론을 주장하다가 최근에는 일반 장로교회에 정착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했던 해외선부담당 장만호목사는 장조셉이라고 개칭하고 “베리칩에 숨겨진 사탄의 전략”이라는 책을 출판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음카페 “휴거와 7년 대환란”이라는 곳의 게시물에 의하면 회개했다던 이장림씨는 얼마 전에 주님께서 천국으로 부르시어 수고했다 고생했다고 위로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이 어떻게 전해진 것인지를 알 수 없지만 그 카페에서는 이 일을 시한부 종말론을 더 강화시키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http://cafe.daum.net/ComeJesus1028/QdGB/36?q=%C0%CC%C0%E5%B8%B2&re=1)
이 외에도 현재 많은 이들이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구원과 주의 강림을 말하기보다는 자신이 경험한 신비적 경험을 근거로 천국이나 지옥을 말하고 이 말을 듣는 순진한 성도들을 흔들고 있습니다. 이는 참 복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은 대단하다 하겠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계통의 신문마다 온갖 경험담들이 난문하고 서점에도 그와 관련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며 그들의 집회 광고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을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치이고 알고 있음에도 그런 짓들을 하는 것은 사람들을 자신의 가르침에 따르게 하고 자신이 원하는 세속적인 것들을 얻어내려는 사악한 의도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말씀에 근거한 신앙이 아닌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헛된 짓인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들 중 일부가 바르지 못한 종말관으로 인해 교회에 물이를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바울은 이 글을 쓴 것입니다. 이 글을 보면서 바른 종말과과 바른 신앙관을 세우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 말하겠다고 본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당시 데살로니가교인들 중 바르지 못한 종말론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주장하던 것들을 열거하면서 그런 것에 흔들리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과 말, 그리고 편지 등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다 되었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고 주의 재림만을 기다렸습니다. 그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은 영적으로나 말로, 그리고 바울이 보냈다는 거짓 편지를 등장시켰고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과거나 현재나 비슷합니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일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신들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특별히 신비적인 어떤 것으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그 중에 어린아이들을 이용해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이것은 바르지 않은 전재 위에 세운 결론과 같습니다. 이는 어린아이는 순결하고 그 순결한 아이가 받은 것이므로 그것은 진리라는 논리입니다.
예전 다미 선교회도 하방익과 권미나같은 어린이들을 통해 그런 짓을 일삼았습니다. 요즘 시중에 나와 있는 책 중에 “천국에서 돌아온 소년”, “3분”, “쌍둥이의 천국과 지옥 간증” 등 아이들이 경험했다는 내용의 천국과 지옥 간증집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들의 개인적 경험을 폄하할 마음을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보다 우위를 차지하여 진리처럼 전하여지고 그들의 개인적인 경험이 복음을 흔들어 놓으며 심지어는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취급되는 현실은 아주 비성경적이고 비정상적인 일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리인 주님의 말씀보다 검증이 어려운 신비적인 일에 더 치우치는 경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르려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탄의 장난질에 불과합니다.
본문에 보면 그들은 또한 어떤 권위에 자신들의 잘못된 가르침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편지를 보냈다는 거짓입니다. 바울이라는 권위를 뒤집어쓰고 자신들의 거짓을 정당화하려는 행위입니다. 이것 또한 현대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것은 유명한 목사의 권위에 자신들의 거짓을 숨기는 행위입니다. 유명하고 큰 교회 목회자의 말은 진리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지난주에 카톨릭의 수장인 교황이 한 말이 언론에 실렸었습니다. 그는 “신을 믿지 않아도 자신의 양심을 따르면 신은 자비를 베풀 것이다.”, “진심과 뉘우치는 마음을 갖추면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다”며 “신앙이 없어도 양심에 따르면 된다”고 밝혔습니다. 이어서 교황은 “무신론자들은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죄를 짓게 된다”며 “양심에 귀를 기울이고 이에 따르는 것은 선과 악을 구분하고 판단한다는 뜻”이라 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 일간 ‘라 레푸블리카’의 공동 설립자이자 전 편집장인 무신론자 에우제니오 스칼파리가 8월 칼럼에서 “하느님은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용서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교황에게 공개 질문했고 이에 교황이 2600자 분량의 답장을 보낸 것이 소개된 것입니다.
이 글로 인해 어리석은 사람들은 교황의 말을 인용해 자신들의 불신앙을 합리화했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진리를 전하는 기독교를 비난했습니다.
한 사람의 권위 뒤에 숨어 자신들의 죄와 헛된 가르침을 전하려는 시도는 그들이 전하는 것의 근거가 무엇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근거한 가르침이라면 사람의 권위 뒤에 숨을 이유가 없습니다. 신비적인 현상 뒤에 숨어 자신들의 주장에 힘을 실으려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요즘 한국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상한 일들에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오직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생활하면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 전에 벌어질 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 8절까지 다시 읽겠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바울은 예수님께서 강림하시는 시기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주님의 강림 전에 벌어질 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의 말씀대로 사람들이 배교하고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 자신을 신이라고하며 숭배 받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난무하지만 이 말의 본질적 의미는 사탄의 세력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들은 주님을 버리고 그것들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요한계시록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땅에서 나온 짐승인데 이 둘은 정치적 박해와 영적 박해를 상징합니다. 이들이 성도들로 하여금 주님을 배반하게 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숭배 받으려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도 계속해서 벌어지는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정치적 박해가 있고 종교적인 세력들이 일어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합니다. 또한 돈이라는 신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 뿐입니까? 명예와 쾌락을 신으로 섬기며 그것을 목숨 걸고 추구하는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신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자신을 하나님 위치에 두며 성도들을 미혹하고 박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미 가르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불법의 미혹에 빠져 바르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성도들이 미혹에 빠지는 것은 가르침을 받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씀만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비적 영성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 영성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 자체가 맘에 들지 않습니다만 바른 영성과 반대하여 이렇게 사용하겠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추구하고 미혹되는 것이 신비적 영성입니다. 보았다고 하고, 들었다고 하고, 꿈꾸었다고 하고, 기적이 벌어졌다는 것 등을 추구하고 미혹됩니다. 그것이 신앙의 본질인양 쫓아다니고 그것들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참 영성, 바른 영성은 그것이 아닙니다. 바른 영성은 한마디로 “삶”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른 삶은 뒤로 팽개치고 신비적 영성만은 추구하고 쫓아 다니는 것은 훌륭한 듯하나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교회 내에서 신비적 영성으로 칭찬받으나 가정에서 바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바른 영성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는 존경을 받으나 세상에서는 비난을 당하고 멀리함을 당한다면 그의 영성은 바른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바른 가르침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추구하고 싶은 것을 교회라는 장소에서 영성이라는 탈을 쓰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이러한 자들에 대해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막는 자가 있고 두 번째는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막는 자’란 성령을 가르칩니다. 성령께서 끊임없이 우리 속에서 막으십니다. 성도들이 종종 세상에 미혹되고 바르지 못한 것에 미혹이 되어 추구하지만 반드시 돌아서게 되는 것은 그 속에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진리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절제시키십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6장 13절은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충만을 입는다는 것은 말씀대로 사는 삶이 충실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이 손해 보라고 하면 손해 보는 삶입니다. 말씀이 죽으라고 죽는 것입니다. 말씀이 가라하며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함의 드러남인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들고뛰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실 때 종종 표적을 보이기 위해 신비적 현상이 일어나나 그것은 본질이거나 보편적이지 않습니다. 성령충만의 가장 보편적 현상은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성령충만의 삶을 다른 말로 성령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부터 26절은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성령의 열매, 즉 성령의 충만은 말씀에 근거하여 삶을 드린 사람에게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이 가르쳐주시는 것을 주의 깊게 듣고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 가지 헛된 가르침과 미혹에 휩쓸리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자들을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죽이시고 폐하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강림을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세력을 멸하시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대상이었던 주후 100년경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강림으로 자신들은 구속함을 받고 주님을 대적했던 사탄의 세력들은 심판 받는 것을 소망했습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 말은 불신자들이 심판받는 것을 즐거워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믿지 못하게 하고 믿는 자들을 박해하게 한 근본 세력이 사탄의 멸망을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동시에 복음을 강력하게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만큼 복음증거도 열심을 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바르지 못한 것에 이끌리는 사람들을 가리켜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부터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말세에 사탄의 활동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능력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표적과 기적을 추구하고 그것이 신앙의 본질인양, 그것이 신앙의 최정점인양 가르치고 추구하는 모든 것은 거짓입니다. 예수님도 표적만을 바라고 따르는 자들을 악하고 음한한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왜 표적만을 추구하고 예수님의 말씀에는 따르지 않는 자들을 음란하다고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예수님이 아니라 그로부터 나오는 것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인들도 예수님을 추구하지 않고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면 그것은 음란하고 악한 것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사람을 추구하지 않고 그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물질이나 쾌락 등만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신비적 영성이나 바르지 않은 신앙관을 소유하고 추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그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을 통해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시몬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는 사도들이 안수하여 성령 받게 하는 것을 보고 사도들에게 돈을 주며 자신에게도 그러한 능력을 달라고 하였다가 책망을 받은 자입니다(행8:18). 그들은 본질인 주님께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주님을 통해 얻고자하는 돈, 치유, 기적 등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신앙이 없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신앙이란 틀을 쓰고 교회 안에 들어와 성도들을 복음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리고 바르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게하고 결국에는 스스로 주님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에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그러한 것을 추구할까요? 10절과 12절이 답을 주고 있습니다. 10절에서는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라고 했고 12절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바르지 못한 것을 추구하는 이유는 진리이신 주님의 사랑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진리를 좋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으로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진리를 좋아하고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추구하지 않고 사모하지도 않는다면 그 속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사람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종교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종교가 추구하는 복, 기적, 내세만을 교회 안에서 찾고 있는 종교인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해 보아야 한다 이것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진리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말세라고 말하는 이 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모습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주의 강림에 대해 오해하고 바르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데살로니가교인들을 향해 진리를 추구하고 어떠한 말이나 이적에도 흔들리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온갖 비복음적인 행태나 진리에서 떠난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인은 많은데 바르게 믿는 사람은 적은 이때 진리에 뿌리를 깊게 내리고 주님 오실 때까지 바르게 신앙생활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