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사랑을 입은 자
데살로니가후서2장 13-17절
예수님의 제자 중에 자신을 예수님께 사랑받는 자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실감했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기꺼이 삶을 드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자신에 대해 묘사기를 예수님께 사랑받는 자라고 한 것입니다.
요한은 어떤 사랑을 받았기에 예수님께 사랑받는 자라고 한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 세 명을 따로 데리고 다니실 때 자신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이종 사촌이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그로인해 자신이 죄사함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록한 성경들 중 요한복음, 요한1서는 예수님이 자신과 영혼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말하고 그러기에 자신들도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본문에서 성도를 가리켜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늘보좌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셨고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우리를 당신의 손바닥에 새겼고 우리가 항상 당신 앞에 있다(사49:16)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잘했을 때만 사랑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범죄하고 당신을 멀리할 때도 사랑을 포기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11장 8절에서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드마와 스보임은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으로 멸망당할 때 함께 사라진 도시인데 이들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범죄해서 책망할지라도 버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녀가 잘못했다고 포기하거나 버릴 수 없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누가복음 16장의 아버지의 마음 비유에서도 탕자가 아버지에게 유산을 받아 먼 곳으로 가 허랑방탕하고 거지가 되어 돌아왔음에도 아버지는 매일 문 앞에서 기다렸고 그를 보자 그에게 달려가 입을 맞추고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씌워 주며 잔치를 벌려 그의 신분을 회복시켜주었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사랑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우리 성도를 가리켜 “주께서 사랑하는 형제”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서 감사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냥 감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마땅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땅하다는 말은 “옵헤일로”라는 헬라어로 “빚을 졌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어떤 빚을 졌기에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어져 하는 말이 알려줍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전한 복음의 말씀을 통해 구원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빚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에게 진 것입니다. 그가 고난을 당하면서 전한 복음이 있었기에 구원을 얻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그들에게 빚을 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함은 바울이 가장 귀하게 여기고 삶의 목표로 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그의 삶의 목표가 영혼구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성도는 이러한 기쁨과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당연한 것이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의 일이 잘되는 것도 감사하고 자녀가 잘 되는 것도 감사하지만 성도에겐 세상 사람이 갖지 않은 이 영혼으로 인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복음은 전해야 하고 그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힘을 써야 합니다.
본문의 감사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기쁨과 감사인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가 넘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바울이 본문을 시작하면서 말했던 바울의 감사와 주께서 성도를 사랑하신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보도록 합시다.
그것은 먼저 처음부터 우리를 택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창세 전에 미리 택하여 부르신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 4절과 5절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처음부터’라고 번역된 단어는 “아파르케”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에서부터”란 뜻의 “아포”와 “시작하다, 첫째”란 뜻의 “아르코”를 합성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첫 열매”란 말로 번역되어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첫 열매란 의미 뿐 아니라 종교적 용법에서 성전 봉사를 위해 스스로나 사람들이나 부모나 주인이나 스승에 의해 바쳐진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고 특별한 예물을 드릴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건을 말하면서 ‘아파르케’란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특별한 대상으로 인식하셨고 특별한 목적으로 부르셨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창세전에 택하신 것 뿐 아니라 우리를 당신이 받는 특별한 예물로 부르신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이 받으신 특별한 사람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현실 속에 우리들의 모습이 가난하든지 무식하든지 또는 무능력하고 자주 실패하는 존재일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특별한 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쁨인 아들로, 하나님이 교제하고픈 친구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영광스런 존재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에는 우리의 의지나 능력이 개입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5장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고 원수였고 연약할 때, 그리고 에베소서 2장에서는 죽었을 때 우리를 위해 죽으셨고 살리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바울의 감사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갈 때까지의 모습을 신학적으로 구원의 서정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선택, 소명, 중생, 회개, 신앙, 칭의, 수양, 성화, 견인, 영화”의 단계를 말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 중에서 오늘 본문은 성령의 거룩케 하심이라고 했는데 먼저는 칭의의 단계가 있습니다. 이 말은 의롭다는 칭함을 입는 것을 말합니다. 법정용어로 피의자에게 죄가 없다고 선언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과정을 통과한 성도는 주께서 부르시어 영광스럽게 되는 삶을 살게 되는데 이 성도의 삶을 가리켜 “성화”라고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주장하십니다. 여기서 주장한다는 말은 우리를 조정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그분께서 우리 속에서 거하시면서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깨닫게 한다는 말입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의 죄성과 갈등하게 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성령께서는 우리 속에서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성화과정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은 성령이 그 속에 거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한번 임한 성령은 절대로 떠나지 않으시기에 우리가 주를 떠나 세상에서 방황한다 하더라도 그분께 감동하심의 은혜를 입어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늘 함께 거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두 가지 이름으로 예언되었습니다. 하나는 예수, 하나는 임마누엘입니다. 예수는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구원하실 자라는 의미이고 임마누엘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을 합치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이 이름이 가지고 있는 예언의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강림으로 성취된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임하시면서 영생을 얻게 되었고 영생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인 것입니다.
또한 세 번째는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의 도구는 진리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은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바른 진리가 아니면 바른 구원의 길을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로마 카톨릭도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으니 구원을 얻을 수 있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없습니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부르고 인정한다고 하여도 구원에 이르는 법, 진리가 바르지 않으면 그곳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많은 교회들과 교인들도 바르지 않은 진리, 다른 복음으로 신앙생활 하면서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름만 부를 뿐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과 상관없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고 신앙생활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들이 자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런 모든 사람들은 진리 가운데 신앙생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믿음은 철저히 지성적입니다. 감성은 그 뒤에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셨고 그것을 믿는 나는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를 지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기에 감정은 따라 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 대해 지적인 것을 배제하고 감정적인 것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바르지 않습니다. 지적인 근거가 없이 감정적인 믿음에 치우친 사람들은 자칫 잘못하면 이단에 빠지고 진리에서 멀어져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발견하자마자 질문한 것은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였습니다. 그 여인의 질문에 주님은 이산도 저산도 아니고 신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이때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4:24)”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그들이 뭔지도 모르고 전통이나 습관에 따라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진리에 입각한 예배를 드리게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을 복음으로 부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부름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얻게 된 영광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미래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창세전에 작정하셨으며(엡1:4) 그 완성은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질 것입니다(1:10, 12). 결국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특권과 복은 오직 복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복음으로 부르사 주의 영광을 얻게 하려한다고 한 것입니다.
15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바울은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를 사용하여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택하심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 것이 복음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면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행해야 할 실제적인 의무로 화제를 전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이는 헬라어로 “스테케테”라는 말로 현재 능동태 명령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임박한 위기에 직면하여 악의 세력이 크다고 두려워하거나 장차 어떤 일이 벌어질 일에 대해 동요하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며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오히려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부여잡고 담대하게 대처하라는 뜻이며 나아가 복음을 담대히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유전을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전이란 “파라도세이스”라는 헬라어인데 이는 “어떤 사람에게 넘겨진 것”이라는 뜻으로 바울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복음에 굳게 서서 말씀을 통해 배운 것을 지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온갖 말들이 교계에 넘쳐나고 시대가 지나면서 왜곡된 복음과 신비적 현상들, 그리고 본문과 관련되어 새로운 옷을 입고 등장하는 시한부 종말론들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들고 그것을 지켜 살아가는 것이 바른 신앙인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16절과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주 길게 수식하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소유한 구원이라는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영원한 위로를 준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위로가 성도들을 강건하게 하며 영원히 흔들림 없이 굳건히 서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성도의 영원한 위로는 천국입니다. 이 땅의 것은 잠시 위로가 되고 기쁨을 주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영원한 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얻을 영원한 나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후서에 죽음을 앞에 두고 말하기를 이제 이후로 내게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말하며 죽음도 그의 소망을 어찌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한 좋은 소망을 주신다고 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소망이란 하나님의 속성과 약속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그 본질상 좋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그 결과에 있어서도 좋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나아가 이 좋은 소망도 영원한 나라와 관련이 있을 때 좋은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서 3장에서 이 땅의 것들을 초월하여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푯대가 하늘에 있고 시민권에 하늘에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소망이 하늘에 있기에 이 땅의 어떤 것도 그를 불행하게 하거나 행복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좋은 소망은 온갖 바르지 않은 가르침과 세상이 주는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건하게 하시기를 원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의 삶 속에서 특별히 박해와 환란 속에서도 선한 일과 말에 굳게 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선한 일과 말이란 지금까지 말했던 진리에 굳게 서서 믿음을 지키는 모든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을 사는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에 굳게 서서 믿음을 온전히 지키기를 바라시며 그 일을 위해 우리를 붙들어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 세상이 박해하고 온갖 바르지 않은 가르침이 난무하지만 그 속에서 진리 위에 굳게 서서 바르게 신앙 생활하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