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3장 6-18절 성도의 삶

by 하림 posted Oct 2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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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삶

데살로니가후서 36-18

 

사람들이 신앙을 갖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간절한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기 위해서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일반적인 신앙생활의 이유이고 교회를 다니는 우리들 속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원하는 신앙의 보상들입니다. 이러한 것에서 멈춘다면 성경을 통하여 주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는 구원의 은혜와 더불어 얻게 되는 평안, 기도응답 등을 주십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큰 것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또 다른 사람들이 주께 나아오고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는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바르게 못하는 어떤 사람들은 신앙을 도깨비방망이 정도로 잘못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한 정당한 노력이나 수고는 게을리 하면서 기도를 통하여 얻고자 합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도깨비방망이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일반적인 종교생활이라면 그것이 전부이겠지만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적 신앙은 무엇은 얻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그분과의 사귐이 본질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우리가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그리고 그 사귐의 첫 번째 목적이 그 사귐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사귐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닮아가고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원의 신앙을 일반적으로 성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드러나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도 은사도 아니라 삶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야말로 그 사람의 가치관의 표현이고 그 가치관은 그가 사귀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대상이 세상이면 세상적인 가치관과 삶이, 그 사람이 사귀는 대상이 돈이면 돈이 제일의 가치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 그 사람이 사귀는 대상이 쾌락이면 그 사람의 가치관은 쾌락에 집중되는 것이고 그것을 추구하는 삶이 쾌락추구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말하면 삶은 그 사람의 가치관의 표현이고 그 사람의 가치관은 그 사람의 사귐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증명해 준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사귀고 그 사귐을 통해서 거룩한 가치관을 가지며 그 가치관에 입각해서 삶을 산 사람에게 주어지는 삶의 결실을 성경에서는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22절과 24절은 말하기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성도의 삶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후서 36절 이후에 바울이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씀은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그 성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배운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바울은 자신들에게서 배운 대로 행하지 않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데살로니가교인들이 바르지 않은 종말관으로 생활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심각하게 오해했는데 그것은 주님께서 곧 오시겠다고 한 표현을 지금 당장 오실 것이라고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모든 직업과 일을 그만두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몰라 옷과 신발도 벗지 못하고 잠을 잤고 화장실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삶은 뒷전이었고 오직 재림에만 목을 맸습니다.

 

요즘 교계의 모습을 비유하면 흰옷 입고 모여 기도만하고 날짜를 따지며 그날을 기다리고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종말론을 억지로 끼워 맞춰 스스로 그 생각에 노예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도리어 주님을 기쁨으로 기다리기 보다는 그 시간을 두려움으로 기다리는 어리석은 자들이 된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그들이 왜 그렇게 행하고 있는가하고 생각할 때 그것은 배운 대로 행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고 그러기에 배운 대로 행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단지 재림의 문제만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성도의 모든 삶에 적용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통해 배운 대로 살지 않습니다. 자주 세상과 타협하고, 자신의 생각을 따라 말씀을 판단하며, 욕심에 이끌려 말씀을 선택하여 살아갑니다. 그러니 성도들에게 성도의 삶이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아무 능력이 없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 즉 배운 대로, 믿는 대로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그의 서신 122절에서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라고 하여 배운 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과 세상을 속이기 전에 먼저 자신을 속이는 자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20)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하신 말씀은 지키도록 가르치라라는 뜻입니다. 가르치는 이유는 가르치는 것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키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운 대로 행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 전에 하신 말씀은 그들을 제자 삼으라고 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제자 삼아 말씀을 지키도록 가르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누군가를 제자 삼아 말씀을 지키도록 가르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제자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그것은 스승의 가르침을 본 받고 그분이 행한 것을 본받아 스승을 닮은 삶을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하는 성공공부 프로그램을 마치고 성경을 수십 번 읽었다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배운 대로 사는 사람만이 온전한 성도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문제는 말씀을 들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과거 어느 때보다 풍성한 말씀이 넘치고 있습니다. 그 양도 깊이도 넓이도 풍성함이 넘칩니다. 현재 한국교회의 문제는 말씀을 안 듣는 것이 아니라 배운 대로 사는 삶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영성은 삶인 것입니다.

야고보서 123절로 25절에서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배운 대로 행합시다. 그것이 참된 신앙을 가진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성도의 삶은 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7절부터 9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이 이렇게 말함은 데살로니가교인들 중 일부의 사람들이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일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해 무질서하게 행하지 말고 수고하여 일하며 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바울은 자신들이 그곳에 있을 때 주야로 일하며 수고하여 필요를 채웠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르지 못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바른 삶의 본을 따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을 위해서 첫 번째로 배운 대로 행하는 것이라면 그것과 함께 본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인들에게 무질서하게 행하지 말라고 권하면서 자신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것은 자신은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주야로 일하며 대가를 받을 권리를 포기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본을 보인 것입니다. 자신에게서 본대로 행하라고 말입니다. 마치 오리가 자신의 새끼들을 뒤에 달고 다니며 오리의 삶을 보이듯이, 목자가 양떼 앞에 갈 때 양은 목자가 갔던 그 길을 그대로 따라 가듯이 우리들은 우리의 목자 되신 주님께서 보이신 삶을 본받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독특하거나 신비로운 것에 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삶은 극히 성경에 근거한 삶인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윤리 도덕적으로도 흠이 없어야 하고 적극적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적극적인 빛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4절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정말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 다음 구절을 보면 우리를 더 이상 종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친구라고 하시겠다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의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에게나 친구라고 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막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친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가 아니라 하늘에서는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인 것처럼 친구라 하리라고 하신 대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자들에게 한정적으로 주어진 호칭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이제 따라 다닌 것에서 그치는 존재가 아니라 따라 다니면서 듣고 본 것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삶은 듣고 보고 그것을 행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를 보고 따르는 믿음의 후진들이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성도의 삶은 책임 있게 행하는 것입니다.

10절부터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일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생활에 곤고함을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일을 할 순 없었습니다. 그들은 오직 기다리는 일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렇다고 음식을 안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성도들의 집을 다니며 음식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관계가 불편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잘못된 재림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는 성도들을 믿음 없다고 하면서도 그들에게 신세를 질 수 밖에 없었고 그들에게 음식을 주던 자들은 그들이 믿음을 핑계로 일하지 않고 자신들과 같지 않은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으로 인해 갈등을 겪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을 도깨비방망이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채우시길 기대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는 일이나 말씀을 읽는다는 이유로 자신에게 주어진 거룩한 삶이라는 책임을 회피하는 이들입니다. 그것은 참 믿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을 핑계로 자신의 게으름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배우자가 생활전선에 뛰어 들고 자신의 자녀들이 배우고 자라는데 필요한 것을 채워주지 못함에도 기도한다고 은혜 받겠다고 찾아다니는 것은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바른 성도의 삶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무거운 십자가를 기꺼이 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기도하며 그 속에서 주님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한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교회라는 건물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땀 흘리는 가운데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을 가리켜 일만 만드는 자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명령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용히는 입 다물고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말씀을 암송하고 입만 열면 말씀이 쏟아져 나와도, 기도하면 방언을 유창하게 하고 찬양을 하면 성악가 못지않게 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이라는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은 바른 성도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성도의 삶을 구체적으로 말해 줍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되 주님께 하듯 하고,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줌같이 하고, 자녀들은 순종하고, 부모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종들은 상전에게 눈속임으로 하지 말고 진실함으로 하고, 상전들은 종들을 대할 때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라고 하였습니다. 목회서신인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서도 교회 안에 연세 드신 어른들을 대할 때, 젊은이를 대할 때, 젊은 여자를 대할 때, 홀로 된 여인들을 대할 때 등등 성경의 많은 부분은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자여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부어주심의 은혜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게으름에 신앙을 뒤집어 씌워 견고한 나태의 성을 건설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무질서한 삶을 보호받으려하는 자가 아니라 주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가 일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삶의 책임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도의 삶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그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 같이 권면하라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바르지 못한 종말관을 가진 사람들을 책망하였기에 반대쪽에 있던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근거로 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지 않고 바울이 6절에서 말한 것처럼 그들과 분리하려 할까봐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상되는 그 일을 위해 13절부터 15절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3절에서는 선을 행하라고 했고 14절에서는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부끄럽게 하라고 했고 15절에서는 원수같이 생각하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바르지 못한 성도들을 대하는 성도들이 악한 마음과 사랑 없는 행동으로 그들은 대하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책망하고 경계하되 사랑으로 인내하며하게 하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과 사람들에게도 선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원수같이 대하지 말고 형제같이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69절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본문과 갈라디아서 69절에서 동일하게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낙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선을 행할 때는 반드시 낙심되는 일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섬겨 주었는데 돌아오는 것이 아름답지 않을 때 낙심하여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섬겨주어야 합니다.

누군가 경제적으로 어려워 많은 도와주었는데 감사의 말 한마디도 없다고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하는 것입니다.

삶에 질서가 없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우겠다고 했지만 원하는 결과가 주어지지 않아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뿌려진 씨앗은 언젠가 반드시 싹이 나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사람이 보상하지 않아도, 세월이 우리를 속여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기억하고 계시고 결과적으로 성령을 위하여 심은 성도의 삶에 영생을 거두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의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풍성하길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 배운 대로 행하고 주님과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본대로 행하며 주어진 삶에 책임을 다하는 삶과 상황과 형편에 좌우되지 않고 어떤 상황과 사람에게도 오직 선으로 행하여 거룩한 성도의 삶이 풍성하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