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미가 2장 11절
“입에 쓴 약이 몸에는 달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를 살리는 주님의 말씀이 때로는 쓰게 느껴집니다. 마태복음 23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책망하실 때 “화 있을 진저”라고 하시며 위선과 죄악을 책망하셨는데 그런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적용시켜 보면 부담스럽고 껄끄럽습니다. 이 땅의 것들을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우리들에게 이 땅의 것들을 분토와 같이 여기라는 말씀은 육신에 얽매인 삶을 사는 우리들에게 너무 써서 삼키기가 꺼려지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형통에 대한 말씀들은 달고 답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으리라,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내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등의 말씀을 좋아하는데 이는 그 본질적 의도는 모두 버린 채 우리의 세속적 욕심을 채우는 말씀으로 왜곡하여 받아들이고 좋아합니다.
몇일 전에 한국교회의 일부 어리석은 지도자들이 입에 쓴 약은 먹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자신들을 비롯해 자신들이 속한 교회 공통체와 세상을 죽이는 ‘입에 단 약’을 아무 생각 없이 먹는 짓을 했습니다.
26일이 고박정희 전대통령 서거 34주기였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어리석은 목사들, 복음도 없는 목사들이 25일 나들목교회에서 하나의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는 물론 인천 순복음교회, 구미 상모교회, 잠실동교회, 성광침례교회, 수지영락교회, 전하리교회, 인천만민교회, 광은교회, 신월중앙감리교회 등의 목사들과 불교계 종교인과 일반인들이 모여 제 1 회 고박정희 전대통령 추모예배를 드렸습니다.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이는 이념이나 사상이 다르거나 고박정희 전대통령을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행위는 일반적인 기독교인의 가정에서 드리는 추모예배 정도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추모예배나 추도예배 등에 대해 신학적 개념 정리가 필요하나 일반적으로 기독교 가정들이 드리는 예배는 기억될만한 날에 모여 가정예배의 개념으로 시행되는 것과는 너무나 다른, 아니 그들의 발언을 하나님 앞에서 들어줄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는 일은 우상숭배나 진배없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로 나온 이는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하늘에 계신고박정희 전대통령께 박수를 올리자고 하질 않나 또 다른 이는 나와서 이 일을 매년 할 것이며 2017년에는 탄신 100주년 예배로 드리겠다고 하고 고박정희 전대통령은 불교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전력화”라는 글을 군에 하달하여 군복음화에 앞장섰으며 국가조찬기도회를 만들고 참석하였기에 한국교회를 위한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추켜세웠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을 천국에서 편히 계시고 그곳에서 우리나라가 더 잘살도록 축복해 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왜 지금, 이 짓을 하고 있을까요? 나들목교회의 담임목사는 자신의 교회에 박근령씨가 출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참석한 교회들과 기업들은 이일을 통해 무엇인가 얻고 싶었거나 권력에 줄을 대고 싶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어찌 되었던 지난 25일에 있었던 그 일은 한국기독교역사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행태였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가결한 날의 수치스러움이 다시 재현되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도 고박정희 전대통령을 사랑하고 존경한다면 교회의 이름으로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추모행사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왜 이런 부끄러운 일이 한국교회에서 그것도 규모가 좀 있다고 하는 교회들이 그 짓을 한 것일까요? 그것은 복음을 몰라서입니다. 예배가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든 시대 속에서 신앙인들이 세속 정치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그 행위가 한 사람의 업적을 기리는 정도가 아니라 믿음의 선진들이 목숨 걸고 지켰던 우상숭배인지도 모르고 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역사 속에서 교회가 세속 정치와 결탁했을 때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하고 부끄러웠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참선지자들은 권력을 멀리했습니다. 도리어 권력자들이 바르게 가지 못할 때 폭력이 아닌 주의 말씀으로 외쳤고 그 말씀으로 인해 생명까지 잃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했습니다. 핍박과 고통 속에서도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렸던 교회는 그 후 권력과 결탁하여 세력을 떨치긴 했으나 그 결과는 부패하여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건전한 종교는 신앙과 정치를 분리해야 합니다. 나아가 종교는 정치를 향해 바른 소리를 내야하는 것입니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는 정치적 박해 속에서 성장했고 그 순수한 기능을 수행했으며 세상을 밝히는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하지만 정치와 연합하고 아니 정치 위에 군림하게 될 때 썩고 병들었으면 인간들의 욕심에서 풍겨나는 썩은 냄새를 풍겼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속적인 행위와 신앙의 모습이 저들에게만 있는 것일까요? 사실은 우리들 속에도 있습니다. 그 행태를 달리할 뿐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우리들의 모습에 대해 오늘 본문이 풍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읽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허망하게 행하며 거짓말로 이르기를 내가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네게 예언하리라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이 이 백성의 선지자가 되리로다”
미가가 활동하던 시대는 요담부터 히스기야 시대였습니다. 당시 남북 이스라엘은 외적의 침입이 없던 100여 년간의 오랜 평화가 막바지에 이를 때였습니다. 그로 인해 경제는 풍요로웠지만 사회가 부패하여 정의가 없었습니다. 멀리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노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풍요로움에 빠져 위기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기득권층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권력과 풍요로움이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한 시대였기에 죄악과 그에 따르는 책망을 선포하는 사람들의 말은 먹히질 않았습니다. 아니 그러한 선지자가 사라졌습니다. 선지자들은 자신의 사명을 잊고 세상과 결탁하여 바른 말씀인지 아닌지도 구분 못하고 전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의 풍자처럼 포도주와 독주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참 선지자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포도주와 독주에 대해 예언한다는 것은 인간의 쾌락과 즐거움, 성공과 풍요로움에 대해 말하는데 어떻게 하면 그것을 더 누리고 영원히 누리는지가 관심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25일 추모예배 설교자가 고박정희 전대통령에게서 받은 가장 큰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 빈곤에서 건져준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 우리의 강단도, 성도들이 기대하는 말씀도, 성경을 통해 은혜 받는 구절들도 온통 세상의 떡이 최고의 목표가 되어 있는 모습과 같았습니다. 하기야 예수님께서 사역하실 때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가 떡을 먹고 배불렀기 때문이니 이것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변함없는 절대 가치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쓰면서 말하기를 이 땅의 떡에 대한 관심을 내려놓을 것을 말씀했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 8절부터 10절에서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과 육체를 위하여 심는 것은 같이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령을 위하여 심어야 합니다. 이 땅의 것의 필요는 주님께서 아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이 땅의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8절에서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반드시 영생으로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육체를 위해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사도는 그의 서신 5장 1절부터 6절에서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너희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으나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부한 자들은 일반적인 부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불의하게 살아가는 부자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부자란 얼마 이상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부 자체를 추구하며 그것을 신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자들을 말합니다.
고박정희 전대통령을 추모하며 예배하던 이들이 최고의 가치로 여긴 것은 바로 이 땅의 부입니다. 고박정희 전대통령의 공과를 논하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를 왜 그리워하고 왜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도리어 서구적 가치관을 추종하는 풍조를 지적하며 기독교계를 비판했으며 국적 있는 종교로서의 신라 불교 정신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음에도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예배하며 천국을 논하느냐 이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이룩한 경제발전을 통해 주어진 떡 때문인 것입니다. 분명히 공로가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들이 예배의 형태를 빌려 강단에 한 인간의 사진을 걸어놓고 하나님이 아닌 한 인간을 찬양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구약에서는 거짓 선지자라고 한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그들의 하는 행태를 가리켜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겔13:19)”라고 하였습니다.
이 땅의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바르지 않은 것은 바르지 않다고 해야 하고 바른 것은 바르다고 해야 합니다. 정권에 빌붙어 무엇인가 이득을 취하려하지 말고 그 권력이 잘못되었을 때 잘못 되었다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는 못할망정 어릴 적 교회에 나갔었다는 것을 근거로 믿지 않은 것이 분명한 사람을 천국에 있다고 말하는 목사는 에스겔이 말한 대로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 짓을 한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편지하면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바울이 갈라디아지역에서 돌에 맞아 죽을 위기를 겪으면서 복음을 전했고 그 결과 교회가 세워졌는데 유대인들이 교회에 들어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며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에 혼란스러움을 겪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하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한 말이 사람들에게 좋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좋게 하겠다고 한 말입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의 비유를 맞추며 바르지 않은 것을 바르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자세는 기독교를 박해했던 유대교도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안디옥에 있을 때 베드로와 바나바 그리고 이방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예루살렘으로부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방문했고 깜짝 놀란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식탁에 앉아있는 것을 그들이 싫어할까 두려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이에 바나바도 따라 일어났습니다. 이를 본 바울은 베드로와 바나바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복음에 반하여 행동하는 것에 대해 심히 책망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 기득권자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고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를 바라며 바르지 않은 소리를 하는 것은 에스겔이 지적했던 거짓선지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말씀을 전하는 자들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는 이들도 그것을 좋아하고 자신에게 좋은 소리만 해주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세의 한 현상으로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4:3,4)”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둔다는 말이 자신에게 좋은 소리만 해주는 사람들을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망하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아합이란 왕이 있습니다. 그는 두로의 공주인 이세벨과 결혼하여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바알을 공식적으로 들여오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이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에 나갈 때 사돈관계에 있었던 남유다왕 여호사밧이 군대를 이끌고 그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여호사밧왕은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이 때 북이스라엘의 거짓선지자 400명이 모였고 그들은 하나같이 말하기를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사밧은 그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여호사밧이 아합에게 다른 선지자가 없느냐고 물었을 때 아합은 평소에 자신에게 길한 예언을 하지 않는 미가야 선지를 불렀습니다. 미가야는 아합이 이 전쟁에서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를 들은 아합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전쟁에 나갔으나 적의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거짓선지자의 거짓예언과 거짓 것을 좋아하는 자의 최후는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하는 자나 듣는 자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고 겸손해 져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입에 쓴 약이 배에는 달게 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른 말을 하면 세상이 싫어합니다.
주님도 요한복음 7장 7절에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성령이 임한 후에 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님을 죽인 죄를 지적했을 때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 주님께 돌아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당국자들은 달랐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잃지 않기 위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요나의 표적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앉은뱅이가 낫는 것을 보았음에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사도들을 잡아 가두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것도 전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말하기를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4:19)”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존재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세상에 대하여 책망하고 바르게 하라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위선을 책망하면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23:33)”했고 세례요한도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자들을 향해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눅3:7)”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의 외침은 세상의 가치관과 절대로 같이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세례 요한도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과 사도들도 하나같이 세상을 책망하고 세상과 짝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에 대항하고 외쳐야 합니다. 외칠 자신이 없으면 차라리 잠잠하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해야 합니다. 앞장서서 세상의 것들을 교회 내에 가지고 들어와 복음이 아닌 가짜를 복음인양 성도들에게 믿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성도들도 이 악한 시대에 복음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기도 중에 분별의 영을 달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오해하여 옳고 그름을 신비적 영성으로 분별하려고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옳고 그들은 신비적 영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비추어서 하는 것입니다. 바로 말씀을 많이 알아야 그 영이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세상의 정치권력과 가까이 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인은 정치인이 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권력이 대표하는 세속적인 모든 것과 종교는 가까이 하면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기라는 권력, 재물이라는 권력, 대형화라는 권력 등을 등에 업는 순간 교회는 부패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촛대는 옮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포도주와 독주입니다. 이를 즐거워하고 전하고 받으면 반드시 망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우리들은 오늘 제목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 말하면 선지자가 된다는 말을 반대로 생각하여 포도주와 독주에 대하여는 책망하고 배에는 다나 입에는 쓴 약에 대해 말하고 받아들이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혼탁하고 가치관이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자세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