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16장1-12절 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by 하림 posted Nov 10,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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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161-12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말할 때 ,,라고 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불편할 뿐 아니라 불행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이것들은 단 한 번도 인간에게 만족스럽게 채워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주어진 것이 부족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심이란 그릇이 바닥이 없기 때문입니다. 밑 빠진 독처럼 채워도 채워도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런 인간의 모습을 전도서는 거머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만족할 줄 모르는 인생과 달리 하나님은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인간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록 만드셨습니다. 6일 동안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이 생명을 얻는 순간부터 인간은 모든 것이 채워진 상태였습니다. 그랬던 것이 인간의 죄로 인해 이 땅이 저주를 받았고 그 결과 땅은 엉겅퀴를 내었고 인간은 땀을 흘리지 않으면 필요를 얻지 못하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런 인간들 중에서 주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선택하여 부르셨고 부르신 그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만나 사건을 통해 그와 같은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인생의 여정에 결핍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나온 지 45일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마른 땅을 건너듯 홍해를 건넜고 뒤따르던 애굽의 군사들은 모두 수장되는 놀라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이어서 써서 먹을 수가 없었던 마라의 샘물을 달게 하여 백성들이 모두 먹게 되는 일도 겪었습니다. 또한 70 종려나무와 열두 샘이 있는 엘림에서 지친 몸을 쉬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45일의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그 때까지는 정말 좋았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하시며 대적을 물리쳐주시고 목마를 때 가장 좋은 물로 마시게 해 주셨고 지친 몸을 쉬게 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즐거움은 너무 빨리 지나갔고 지금 그들은 생명을 위협하는 또 다른 문제 앞에 섰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먹을거리가 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그들은 애굽을 나올 때 급하게 나오면서 가지고 나왔던 식량을 모두 소모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애굽의 노예에서 구원해 주시고 홍해를 건너게 해주시며 물을 주셨던 하나님에 대해 속히 잊어버렸습니다. 당장 눈앞에 있는 배고픔만이 그들의 이성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 원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당장 눈앞의 문제만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 문제로 인해 그들을 구원해 주신 모든 것을 원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그들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죽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원망합니다. 나아가 자신들을 광야로 인도해 주려 죽게 하고 있다고 합니다.

 

본문을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인생들의 최고의 가치는 애굽의 고기라는 것입니다.

그것의 유무가 복을 받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구분 짓기도 하니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애굽의 고기가 없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없이 가난하게 사느니 죽는 것 낫다. 쾌락이 없다면 죽는 것이 낫다, 높은 지위나 좋은 대학이 아니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최고의 가치는 애굽의 고기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과 반대로 성도는 애굽의 고기와는 상관없는 존재가 된 사람들입니다. 성도는 광야의 만나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애굽의 고기와 광야의 만나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유무로 나누어집니다.

 

애굽의 고기 가마 곁에서 배부르게 먹던 때는 애굽의 노예로 살던 때입니다. 성도들로 하면 세상에서 죄의 노예로 살며 죄의 결과물로 얻은 것으로 살 때를 말합니다. 그것으로 배는 부를지 모르지만 영생을 얻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광야의 만나는 애굽의 고기처럼 화려하거나 육신을 즐겁게 하진 못할지라도 그것을 먹는 자로 하여금 자유하게하며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종종 애굽의 고기 가마 곁을 그리워합니다. 세상의 고기 가마 곁에서 배부를 때를 생각하며 예수를 안 믿었으면 더 나은 삶이 있지 않았을까를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세상에 있을 때 죄의 노예, 삶의 짐들로 인해 허덕이던 것은 모두 잊은 채 가끔 주어졌던 세상의 고기를 그리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비유로 해서 호세아는 말하기를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7:11)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란 말은 자신이 죽을 줄 알면서도 자꾸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애굽에서 먹던 고기는 풍요롭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성도들은 여전히 세상을 그리워합니다.

 

나아가 이들의 원망은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무능하다고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주려 죽게 하려고 한다고 원망합니다. 그렇게 느낄 수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을 뿐 아니라 먹을 것을 구할 수도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원망하는 성도들은 오죽하면 하겠습니까?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모든 성도들이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원망하는 이들은 왜 원망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라는 말씀을 듣고 믿으며 하나님과 횃불언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16장에서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의 나이 86세 때였습니다. 그런데 약속을 받았을 때는 85세 때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는 채 1년도 기다리지 못하고 인간적인 수단을 부린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면서 창세기 171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은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능력의 선지자의 대표인 엘리야도 한 때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갈멜산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여 제단에 불을 내리고 그 결과 바알선지자 450명을 죽이며 기도하여 3년 반 동안 오지 않던 비를 내리게 했던 엘리야는 이세벨의 죽이겠다는 말을 듣고 광야로 도망갔습니다. 그가 그렇게 도망갔던 이유에 대해 성경은 기록하기를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왕상19:3)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본 것은 자신을 위협하는 형편을 보았고 생각한 것은 어떻게 생명을 구할까였습니다. 그런 그가 호렙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만났고 다시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의 제자였던 엘리사의 사환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여 두려워 떠는 일이 있었습니다. 아람이 엘리사를 잡기위해 엘리사가 있었던 도단성을 둘러쌌을 때 이를 본 사환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이에 엘리사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의 눈을 뜨게 하였고 자신들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문제를 만나면 반드시 무너집니다. 하지만 반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식하며 사는 성도들은 환란을 만나고 기근을 당했을 때 세상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도리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것은 성도의 삶에는 계속해서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하나님은 이 배고픈 상황을 통해 그의 백성들을 시험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굶주림을 더하여 시험한다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 반대입니다. 양식을 비같이 내려주기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어떻게 행하는지 보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시험에 대한 오해는 시험은 고통스럽거나 힘든 것으로 온다고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시험이 그렇게 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성도를 더 강하게 합니다. 마치 잔디는 밟으면 더 강해지고 뿌리를 더 깊고 넓게 뻗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무서운 시험은 풍요입니다. 재물이 많아지고, 하는 일이 모두 잘 되고, 자녀들이 잘 될 때 그때가 성도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은 그 때를 위험하다고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치 냄비 안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죽어가는 것을 모르고 그 풍요 속에서 믿음을 잃고, 하나님의 백성의 야성도 잃어버려 무능력해 지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 하나님의 사람들도 환란의 때에 넘어진 것이 아니라 풍요로울 때 넘어졌습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광야에서 도망 다니고 왕이 된 초기에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스라엘 전체의 왕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자신이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될 때 그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초기에는 듣는 마음이 살아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후반기의 풍요로움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이스라엘로 우상을 숭배하게 하는 우를 범하였습니다.

 

그의 후손이었던 웃시야왕도 젊을 때는 행실을 바르게 하여 나라를 강성하게 했으나 교만하여져 성전에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하다고 문둥병이 걸려 별채에 거하다가 죽는 자가 되었습니다.

 

시험에 빠졌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환란의 때가 아니라 풍요로운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는 성도들에게 가장 위험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풍요로움으로 인해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결국 기도할 줄 모르는 성도들이 되었고 기도를 통해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일들은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성도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저와 여러분은 풍요로움 속에서 더욱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문을 통해 주께서 또 말씀하시는 것은 주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그것을 알게 하려하신다는 것입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주님은 당신의 백성들의 필요에 눈 감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정말로 잘 아십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631절과 32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9절로 11절에서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십니다. 아실뿐 아니라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는 성도의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행하고 인간적인 과한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시면서 그 양을 제한하시기를 한 오멜씩 거두라고 하였습니다. 한 오멜이란 2.3리터입니다. 한 사람이 하루 먹을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너무 많이 거두어 다음날까지 두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하지만 일부의 사람들이 다음날까지 남겨 두었다가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는 일이 벌어져 모세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전날에는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아니함으로 이틀 치를 거두고 안식일에는 나가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하루치만 거두고 안식일에 거두러 나가는 불순종을 범하였습니다. 이에 또 모세에게 책망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시겠다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과한 욕심을 부리거나 자신의 생각대로 거두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과한 욕심을 부려 썩은 냄새가 나게 했고 자신의 생각대로 말씀을 어기면서까지 많은 것을 거두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인간의 욕심과 불순종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1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그렇습니다. 이것이 성도의 삶의 원리입니다. 욕심을 부려 많이 모아도 남지 않고 말씀대로 살려다가 손해를 보아 적게 거두어도 부족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성도는 재물의 유혹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재물을 주인으로 섬기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알 수 있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살면서 재물과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때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교회생활 속에서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헌금생활입니다. 특별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것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재물에 대해 어떤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이미 율법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보다 더 큰 신앙의 고백과 감사의 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십일조는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드렸다고 부족해지나 그것은 품속에 감추었다고 풍족해 지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도리어 재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돌보심과 채우심의 은혜로 더 풍요롭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불순종하여 이틀 치를 거두었을까요? 쌓아도 쌓아도 만족할 줄 모르고 계속해서 쌓으려고만 하는 것일까요? 왜 말씀을 어기면서까지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일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당장 오늘 먹을 것이 채워진 것으로 안심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들입니다. 그러기에 내일 것을 근심하고 그것을 창고에 들여 놓아야 영혼도 평안해 진줄 착각하며 사는 것입니다.

 

통장에 잔고가 가득하고, 노년을 대비하여 연금도 들어놓고, 사고나 질병을 대비하여 보험도 몇 개 들어놔야 안심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양들의 특징과 같습니다. 양들이 초장에 누울 수 있을 때는 당장 먹고 배부를 때가 아닙니다. 그것과 함께 누웠다 일어났을 때 먹을 것이 있어야 초장에 눕는 것입니다.

 

이렇듯 쌓고 모으려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금 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날 먹을 것만 거두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주님을 신뢰하여 다음날 양식까지 거두지 않고도 평안했던 것처럼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하나님을 신뢰하여 이 땅의 것에 연연하고 그것을 신처럼 여기며 사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도리어 우리를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책임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삶으로 고백하며 사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