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어린양
요한복음 1장 29-34
본문은 “이튿날”이란 말로 시작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에게 “너는 누구냐”라고 물었던 다음날 요한은 자신에게 나아오신 예수님을 향해 증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세례 요한을 향한 가장 큰 의문은 “네가 메시야냐”였습니다. 이러한 질문에 세례 요한은 계속해서 아니라고 했고 자신은 메시야의 신발 끈도 풀 자격이 없는 존재이며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메시야가 자신 앞에 오신 것입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우리를 위해 오신 메시야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외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라고 했습니다.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당시 사람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로마의 압제에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키고 과거 다윗 왕이 다스리던 그 영광스럽던 시절을 회복하는 그런 메시야를 소망하고 기다려왔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등장했던 많은 가짜 메시야들이 한 일은 독립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로마 정부에 항거하는 반란을 일으키는 그런 일들이었고 결과는 모두 로마 군인들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자칭 메시야들이 처형되고 나면 그들을 따르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런 정치적인 메시야, 해방자 메시야, 제2의 다윗 같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야에 대한 기대는 전능자, 심판자, 회복자였습니다. 사람들이 기다렸던 메시야, 그는 자신들이 처해 있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건져주는 정치적 메시야여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들이 처해 있는 경제적 어려움으로부터 건져주는 경제적 메시야여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들이 바라는 것을 해결해 주어야 하는 해결자 메시야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례 요한은 군림하고 통치하는 그런 메시야가 아니라,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희생하고 죽임을 당하는 메시야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메시야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직역하면 “하나님의 어린 양, 곧 세상 죄를 지고 가는 분”이 됩니다. 요한이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던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자신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메시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대속하라고 보낸 희생의 재물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희생적 사역에 대해 예수님의 첫 등장부터 선포해 주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표현할 때 요한은 출애굽 사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린 어린양의 이미지를 갖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후손을 주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가나안 땅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그에게 10년 만에 다시 나타나셔서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약속 중에 그 아들을 통해 열방이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셨고 그 아들의 후손들이 애굽으로 가 430년간 거하다가 가나안땅으로 오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15장). 이 말씀대로 요셉을 통해 야곱의 70명의 후손이 애굽으로 내려갔고 그 곳에서 430년간 거하게 됩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등극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그 고통 중에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이 구원 사역 중에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어주지 않는 이유로 열 가지 재앙을 내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께서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시는 분임을 말씀했습니다. 피, 개구리, 이, 파리, 악질, 독종, 우박, 메뚜기, 흑암 등 아홉 가지 재앙에도 바로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자 하나님은 마지막 재앙을 통해 애굽을 심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그 마지막 재앙은 짐승과 사람을 불문하고 애굽의 모든 장자들을 죽이는 재앙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심판의 때에 하나님은 규례를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족마다 한 마리의 어린양을 잡아 그 고기를 먹고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각 가족 당 한 마리라는 말은 장자 한 명당 한 마리를 의미합니다. 이를 자세히 설명해 드리자면 대문 안에 부모와 자녀만 산다면 그 집은 자녀 중 장자를 위한 한 마리만 잡으면 되지만 삼대가 살고 있다면 각 세대별 장자들의 숫자대로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세대가 살고 있고 있다면 양은 두 마리가 필요하고 아버지의 동생 가족이 같이 살고 있다면 아버지를 위해 한 마리, 자신과 사촌을 위해 한 마리, 이렇게 세 마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유월절 어린양을 통해 장자가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이 전의 재앙들 중 네 번째부터 아홉 번째까지는 애굽인들이 사는 곳과 히브리인들이 사는 곳을 구분하여 재앙을 내렸다면 이 열 번째 재앙은 어린양의 피를 발랐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구분되었습니다. 히브리인이라도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았으면 장자가 죽었고 애굽인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지나갔습니다.
또한 유월절 어린양을 먹을 때 뼈를 꺾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양편 강도는 다리가 꺾여 죽임을 당했다면 주님은 이미 죽었기에 죽음만 확인하기 위해 옆구리를 찔림을 받았습니다. 이는 세례 요한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으셨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말처럼 철저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어린양, 즉 세상 죄를 지신 분으로 오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싸구려로 만든다는 말은 값을 지불하지 않고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우리의 구원은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구원을 싸구려로 만든다고 한 말씀의 의도는 주께서 주신 은혜에 합당한 삶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값없이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여 거룩한 성도의 삶이 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합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주께서 원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구원의 조건은 될 수 없지만 구원받은 사람의 증거는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얻은 사람에게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죄를 끊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나아가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가정과 사역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땀 흘려 일하며 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의 구속의 은혜에 합당하게 사는 것은 삶이 따라야 합니다. 거룩한 삶이 없이 입술로 하나님을 말하고 옆구리에 성경책을 끼고 다니는 것으로 구원받은 사람의 표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칫 종교인, 바리새인이 될 수 있습니다. 진실로 그 은혜에 감사한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목사의 책임을, 주부는 주부의 책임을, 학생은 학생의 책임을, 가장은 가장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성실하게 사는 것과 하나님의 어린양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냐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목사이니 목사부터 하겠습니다.
큰 교회의 담임목사이고 훌륭한 설교자로 유명한 사람이 여자문제가 복잡하고 가정에서 성도들 모르게 폭력을 행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에 감사한 삶을 사는 것입니까?
교회에서 몇 시간씩 기도하며 온갖 봉사를 다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에 대해 말하면서 남편 몰래 다른 남자 만나고 자식들 방치하고 집안은 폭탄 맞은 것처럼 해놓고 다녀 가족들에게 지탄을 받는다면 그는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일까요?
교회에서는 청년회장, 학생회장등 온갖 일들을 하며 이성의 청년들과 학생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는 사람이 학교나 직장에서 거짓말하고 폭력을 행하며 음주, 흡연, 음담패설로 살아간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실감하고 사는 사람일까요?
교회에서는 직분을 감당하고 목사에게 순종하며 많은 성도들에게 존경을 받는 장로님이나 집사님이 집에 돌아가 폭력을 행사하며 거친 욕설을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일까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만 혹시 자신에게 좋은 데로만 적용하고 사는 사람들 아닐까요?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어떻게 살아도 모두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으로만 받아들이고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이 바르지 않아 그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길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닐까요?
성도 여러분, 바라기는 우리의 죄를 지시고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의 구속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에 합당한 삶이 있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한 뒤에 자신의 이 증언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31절부터 34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언하여 이르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고백하기를 자신도 예수를 몰랐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두 가지 차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그들이 친척 지간이었지만 만나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유대지역에서 자랐고 예수님은 갈릴리지역인 나사렛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몰랐다는 말은 그런 차원의 말이 아닙니다. 세례 요한이 몰랐다는 말은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몰랐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 “'카고우크 에데인 아우톤'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를 분석해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습니다. 먼저 '카고'란 일반 사람들이나 무지한 종교 지도자들처럼 '나 역시도'라는 뜻이고 '알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데인'은 경험에 입각한 앎을 뜻하는 '기노스코'와는 달리 '영적인 앎'(막1:24;고전2:2)을 주로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만약 그를 인간적인 관계 속에서 알지 못했다고 한다면 ‘에데인’이란 단어 대신 ‘기노스코’를 써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영적인 앎을 의미하는 ‘에데인’을 사용함으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몰랐다는 것은 그를 인간적으로 몰랐다는 말이 아니라 그가 메시야인 것을 세례 주는 그 전에는 알지 못했고 그 때서야 알았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이유와 그가 메시야임을 알게 된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 세례를 베푸는 이유에 대해 말하기를 “그를 이스라엘에 나타내려 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세례 요한의 사명인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예수님께 베풀면서 그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야라고 선언하고자 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메시야임을 알 수 있던 것은 32절과 33절의 말씀대로 “비둘기 같이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의 머리 위에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이 이 말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메시야인데 그것을 증언한 세례 요한이 자의적으로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한 말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육적으로 알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보다 어리고 예수님께서 자신보다 에세네파적인 경건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이 베푸신 표적과 기사를 보고 그의 가르침을 듣고 있으면서 믿지 않았던 것과 대조하여 생각해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겸손이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알지 못합니다. 교회도 알고 예수님에 대해 들었지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알게 하여 주신 사람들만이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여기서 잠시 본문을 다시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서 메시야인 것을 알게 된 것은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을 줄을 알라”는 말에 잠시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푸는 자였으나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자였습니다. 여기서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의 차이는 물은 회개와 돌이킴의 세례를 말하는 것이고 성령은 죄를 회개시킬 뿐 아니라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주로 영접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예는 빌립이 복음을 전했던 사마리아 사람들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세례를 베풀었던 아볼로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통해 참회하며 회개의 세례, 즉 물세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과 전도자를 통해 기도를 받고 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는데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지시기 전 날 밤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가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 하신 후 약속하신대로 열흘 만에 성령을 불같이 주셔서 모두가 새롭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통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성도입니다. 에베소서 1장에서 우리가 성도가 된 것을 말씀하실 때 성부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성자 하나님의 죽어 주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쳐 주시고 보증해 주심으로 우리가 성도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통해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은혜를 기억하며 그 은혜에 감사하고 나아가 은혜 받은 자답게 합당한 성도의 삶을 사는 우리 모두가 되지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례 요한은 이렇게 성령이 임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증언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3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성령이 임하는 것을 보고 증언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저와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령께서 일하시는 것을 이미 보았고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셔서 생명을 주신 것에 대해 증언해야 합니다. 사도행전 4장 20절에서 사도들은 그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는 관원들의 협박에도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주님을 증거 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이 시대 세례 요한이 되어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거 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