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따르라

요한복음 135-51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세상 죄를 가는 하나님의 어린이양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 다음날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세례 요한이 제자 두 명과 함께 섰다가 예수님을 가리키며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 제자들이 곧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처럼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자를 삼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주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 두 명이 함께 있었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이 두 명의 사람들 중 한명의 이름을 본문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이 40절에 기록되었는데 그는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명의 제자를 학자들은 본 복음서의 저자인 요한일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이 둘과 함께 있던 세례 요한은 전날에 예수님을 향하여 했던 말을 다시 하고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두 명의 제자가 듣고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여기서 듣고에 해당하는 말은 헬라어로 에쿠산인데 이 말은 수동적인 들음이 아니라 적극적인 들음으로 삶을 동반한 들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들었다는 말은 예수님을 가리켜 한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그에 동의하였다는 뜻인 것입니다. 이어서 그들은 예수를 따랐습니다. 여기서 따랐다는 말은 헬라어 '에콜루데산'입니다. 이 말은 원래 지적, 종교적, 도덕적인 입장을 받아들이고 추종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이 용어는 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1:43;8:19;19:27, 28;6:1;8:34 ).

 

그러므로 두 명의 제자들이 듣고 따랐다고 하는 말은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한 말을 그가 메시야라는 말로 알아듣고 제자가 되기로 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른 두 명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질문을 던집니다.

3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그들이 따르자 주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두 명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실 때 사용한 말이 헬라어로 제테이테라는 말입니다. 이는 찾아 다니다. 구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찾고 구해야 할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 성경에서는 주로 구원과 연관하여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너희가 궁극적으로 찾아 구하는 것이 무엇이냐?”라고 한 것입니다. 이는 요한의 두 제자가 주님을 따르려는 의도를 아시고 그들이 따르고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기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종교적 진리, 내세에 대한 궁금함, 진리에 대한 탐구가 있습니다. 나아가 이 땅에서 필요한 것들을 구하며 그것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오늘 주님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구하느냐?”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계십니까? 오늘 주의 전에서 예배하는데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구하느냐?”고 물으신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이러한 물음에 제자들은 대답하기를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라고 묻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하는 것은 예수님의 집을 알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랍비라는 호칭과 함께 사용되었던 관용적 표현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 교사들에게 대화를 요청하기 위하여 랍비여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말했고 이를 통해 그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뜻을 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명의 제자가 이 같은 질문을 던진 것은 사는 곳에 대한 궁금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하며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하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3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주님은 두 명의 제자들에게 와서 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랍비여 어디계십니까?”라고 묻는 것이 그의 가르침을 받고자하는 사람들의 표현이라면 본 절의 와서 보라는 그에 대한 랍비들의 관용적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두 제자들의 요청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계신 데를 보고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계신 데란 예수님께서 사시는 곳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베다니 근처 어디입니다. 이렇게 장소를 불분명하게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시는 곳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추구해야 할 구원은 어느 거처나 장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므로 장소나 거쳐, 시기나 방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시기를 물었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만의 천국을 찾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쾌락과 명예, 재물과 성공 등을 추구하며 그곳에 천국이 있을 것이라고 쫓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믿는 사람들도 화려한 예배당과 잘 조직된 예배 프로그램, 교회 내에 유명한 사람들과 많은 주의 일을 감당하는 것 속에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셨던 하나님의 나라는 여기 있다 저지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17:21)고 하신 말씀이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은 우리가 어디에에 있느냐 보다는 우리가 누구와함께 있느냐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 날 함께 거하니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알기 원하면 함께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알기 원한다고 하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알기 원하고 따르길 원한다고 한다면 그의 말은 공허한 울림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하고 따른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본문의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하시는 곳에 함께 거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이 추상적인 말의 실제성은 소극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싫어하시는 곳에 거하지 않는 것이며 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예배하고 그의 말씀을 대하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묵상한다는 말은 중얼거리며 그것을 되뇌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와서 보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분을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삶을 본 사람들에게는 변화가 따릅니다. 그것은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4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여기서 는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그가 메시야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곧 바로 자신의 형제 베드로에게 가서 말하기를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라고 표현함으로 안드레와 요한 모두는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메시야로 만난 그들을 곧바로 전도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도 주님을 만나자 마자 동네로 뛰어 들어가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마자 그 성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기에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일에 더욱 열심을 내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튿날 주님은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셨습니다. 이 때 주님은 그에게 이르시기를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대해 빌립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기록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지는 그의 행동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따랐고 그 결과 전날에 예수님을 따랐던 두 명의 제자처럼 전도자가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후에 나가 나다나엘에게 찾아가 전한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4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이렇게 말함은 나다나엘이 구약에서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증거는 다음 절에 나타나는 나다나엘의 반응입니다.

 

4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다나엘은 구약의 선지자의 말씀과 율법에 능통하고 그에 근거하여 메시야를 대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관점으로 예수님은 메시야 일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나사렛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어느 곳에도 나사렛이란 동네에서 메시야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23절에서 나사렛 사람이라고 칭할 것이라는 말은 나사렛이란 지명을 말한 것일 아니라 나실인으로 사실 것에 대한 예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말하는 빌립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을 초청한 것은 예수님이 두 명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용한 말씀이었습니다. 빌립도 자신의 어떤 말로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알았기에 주님을 직접 만나게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빌립이 와서 보라고 한 것은 만나지 않으면 모르기 때문입니다. 옆에서 간접적으로 듣는 것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직접 만나고 직접 듣고 직접 경험해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전해야 합니다. 찬송가 가사 중에 알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물 위를 걸어 본 베드로만 그 느낌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함을 경험한 사람만이 그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 은혜의 깊이를 이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요청에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찾아왔고 예수님은 그를 만나주심으로 그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나다나엘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나다나엘이 주님 앞에 나오기 전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 때문입니다.

47절과 48절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주님은 나다나엘이 오시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나다나엘에게 참으로간사한 것이 없다라고 표현하심으로 그가 진실한 사람인 것을 강하게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특히 간사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돌로스는 고기를 낚기 위한 미끼”, 트로이 전쟁 시의 목마등과 같이 속임수간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습니다. 특히 이 표현은 야곱의 '간교한'성격을 생각나게 하는 말로서(27:35), 나다나엘이 야곱처럼 간교한 자가 아니라 메시야를 충실히 기다리며 율법을 연구하는 자였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은 너를 부르기 전에 보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당시 랍비들이 잎이 풍성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율법을 교육하거나 묵상하는 장소로 사용하였고 그 아래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였던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화과나무 아래'라는 표현은 나다나엘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율법을 묵상하고 메시야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들으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보았노라'는 말은 단순히 '알았다'라는 예지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주목하고 있었다는 의지적인 측면까지도 내포하는 용어임을 안다면 이 말씀은 주님께서 나다나엘의 기도를 듣고 그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나다나엘을 부르시고 제자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두 부류를 서 보라나를 따르라라는 말씀으로 부르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응답하였고 제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따른 사람들에게 주님은 놀라운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더 큰 일도 하리라는 것입니다.

50절과 5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베드로를 만나셨을 때도 이미 이 일을 예고 하셨었습니다.

4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주님은 시몬을 부시면서 그의 이름을 바뀔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시몬''시므온'이라고도 불리었습니다(15:14). 여기서 '시몬' 이란 구약의 12지파 중 시므온 지파의 조상인 야곱의 둘째 아들 시므온과 동일한 이름입니다. 시므온은 자신의 여동생 디나가 세겜성 사람들에게 강간을 당하자 결혼을 빌미로 할례를 행하게 했고 동생 레위와 함께 그 성 사람들을 도륙하였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도 시므온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시므온이 과격하고 성미가 급한 인물이었습니다.

 

마찬 가지로 지금 예수님 앞에 변화되기 이전의 시몬 베드로도 충동적이고 성미가 급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몬의 성격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시몬이 장차 '게바'로 불리 울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게바''반석'이란 뜻의 아람어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의 베드로의 성격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게바'라는 이름은 베드로가 교회를 위한 사도적인 터전을 구축한 여러 요긴한 반석 중의 하나가 된 사실을 상기케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 중에 베드로는 예수를 세 차례나 거듭 부인하는 나약함을 보였고(26:34), 갈라디아서 211절에서도 우리는 베드로의 흔들리는 모습과 오히려 사도 바울의 견고한 반석 같은 모습을 대조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인간적 약점들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극복하고 초대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소임을 충실히 감당하였습니다(1:15-25). 후에 베드로에게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으로 인해 '베드로'라는 칭호가 공식적으로 부여되었습니다(16:16-19). 이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처럼, 요한의 자녀'인 시몬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중생하여 '하나님의 아들'인 게바(베드로)가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더 큰 일도 할 것이라고 예언 되었다면 본문 마지막에는 나다나엘에게 동일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열리고는 헬라어는 현재 완료 능동태 분사로서 '한 순간이라도 닫힘이 없이 항상 열려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은 야곱이 벧엘에서 꾼 꿈과 연관되며(28:10-22),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재확립되는 징조를 상징하는 표현입니다(64).

 

이러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늘이 열리고 그동안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히 회복된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하늘이 열리고'라는 말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보며 또한 그 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복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계시록 38절에서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믿음을 지키는 빌라델비아 교회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러서 예수님을 나다나엘에게 이르시기를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자'란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피조된 영적 존재로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매개자로 활동하는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란 '열려진 하늘'이 상징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야곱이 보았던 '사닥다리'(28:12),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겠다는 것은 네 앞에 있는 내가, 즉 예수님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는 메시야임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 부름을 입은 사람들은 현재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날 때보다 더 큰일을 보고 있고 앞으로도 더 큰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은 당신의 배성들에게 또 다른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2절에서 말씀하시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영접한 사람들을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며 그도 주님보다 더 큰일을 할 것입니다. 여기서 더 큰 일이란 성령의 역사로 주의 복음 사역을 능력있게 감당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제목이 보고 따르라입니다. 우리도 주님과 더 깊은 교제 가운데 들어가고 그 결과 주님을 제자로서 온전히 따라 더 큰일을 보고 더 큰일을 감당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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