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로 포도주를
요한복음 2장 1-12절
요한복음은 표적의 책이란 별명이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에 대해 이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이적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뒤나미스”라고 하는데 이는 “힘, 능력, miracles”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직 “표적”이라는 단어를 17회에 걸쳐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표적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세메이온”, “signs”이라고 합니다. 이는 구약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의 “징표”라는 뜻의 “오트”란 단어와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이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표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이적과 기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 표적이 나타내는 어떤 것, 즉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냐를 알리려는 수단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에 서론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요한은 일곱 가지의 표적으로 예수님을 드려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이 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는 목적에 대해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기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표적들 가운데 첫 번째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다들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가나 혼인 찬지 집에서 벌어진 물로 포도주를 만든 사건입니다.
이 이야기의 대략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이미 예수님의 어머니가 참석하고 계셨던 혼인집에 손님으로 청함을 받아서 갔습니다. 그러던 중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고 그 일로 인해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이 일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떠한 대책을 세우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의 어머니는 그 집의 하인들을 불러 예수님께 이끌고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시키고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하인들에게 말하기를 유대인들의 결례를 위해 물이 두세 통 드는 돌로 된 항아리 여섯에 물을 갖다 채우라고 하셨고 이에 하인들이 순종하여 물을 채웠습니다. 그러고 난후 하인들에게 이르기를 그 통의 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에 하인들이 물을 떠다 주었고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았습니다. 그러고 난 후에 그가 말하기를 다른 집들은 처음에 좋은 포도주를 주고 취한 후에 질이 낮은 포도주를 주거늘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고 칭찬하였습니다. 이 일로 인해 예수님을 따라갔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이야기를 통해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여러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처음 표적을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벌이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의 신랑으로 오셨다는 표적이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를 알려면 유대의 결혼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이가 어릴 적 남녀 아이들의 부모가 결혼시키기로 약속합니다. 이렇게 정혼한 아이들이 성장하면 신랑이 될 사람이 잔치할 돈을 가지고 여인의 집으로 갑니다. 신랑 될 이가 가져 온 돈으로 여인의 집에서는 몇 일간 잔치가 벌어집니다. 이 때 여인의 아버지는 동네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벌이면서 신랑 될 이에게 술도 먹여보고 지식도 알아보고 성격도 알아봅니다. 그러는 사이 여인은 집안에서 신랑감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게 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 날이 되면 여인은 자리에 앉고 신랑 될 이가 잔을 여인에게 주고 그 잔에 포도주를 따르게 됩니다. 이 때 여인이 그 잔을 받아 마시면 허락을 하는 것이 되고 받아 마시지 않으면 거절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여인이 신랑 될 이의 잔을 받아 마시면 신랑 될 이는 여인에게 “내가 처소를 예비하고 다시 오리라”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1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에 신랑의 아버지가 날짜를 정하면 신랑은 신부를 태울 마치를 준비하여 신부의 집으로 가게 되고 신부 집에서 신부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달래는 잔치를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신랑은 신부를 마차에 태워 신랑의 집으로 오게 되고 신랑의 집에서 본격적인 결혼잔치기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부가 마신 포도주입니다. 신부가 신랑이 따르는 포도주를 마시면 둘은 결혼한 것과 동일한 효력이 발생됩니다. 그래서 신부는 1년 이상의 약혼 기간 동안 자신의 순결을 지켜나가고 신랑은 다른 여인에게 가서 포도주를 따르거나 그 잔을 마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잡히시기 전 날 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 포도주를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것으로 너희와 함께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26:28,29)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혼인 절차 속에서 오늘 본문의 이 사건은 신랑이 신부의 집에서 처음 잔치하는 시점인 것입니다. 신랑 될 사람이 여인의 집에서 며칠 동안 잔치하면서 여인 앞에서 자신을 모두 드러내고 선택을 요구하듯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3년 반 동안 당신의 모든 것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표적을 행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영적지식도 테스트 받았습니다. 그런 후에 최후 만찬 자리에서 선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신랑 될 이가 신부 앞에 포도주를 붓고 받아 마시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표적을 행하신 것은 우리에게 당신을 보여주시고 당신을 우리의 신랑으로 선택하게 하시는 첫 번째 잔치를 배설하고 있고 이 잔치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신랑으로 오셨다는 표적을 보이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라는 표적입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사흘째 되던 날”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있기 전에 1장에서의 기록방식은 “이튿날”이란 말로 다음 사건을 이어갔습니다. 이 날들을 모두 합치면 닷 세가 됩니다. 이 5일과 본문 1절의 3일을 합치면 8일이 됩니다. 이것은 요한이 의도를 가지고 날을 계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요한이 사용하고 있는 상징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본문의 1장의 ‘5일’과 본문의 ‘사흘’도 그 상징의 하나인 것입니다.
왜 요한은 8일을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8일이 갖는 중요한 의미 때문입니다. 일주일은 7일입니다. 이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다음 일주일이 시작되는 날을 유대인들은 8일이라고 말합니다. 이 8일은 유대 절기에서 축제의 날입니다.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행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입성하신 날부터 부활하신 날까지 8일째가 되는 날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믿지 못하던 도마에게 나타나신 날도 8일째입니다. 요한은 이 8일을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인식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사흘 되던 날’은 “8일 째”가 되는 날인 것입니다. 이렇게 8일은 한주가 마무리 되고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국면의 시작이 되는 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이 의미하는 표적은 예수님께서 부활의 생명을 소유하셨고 더불어 당신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부활시키는 분임을 보이는 표적인 것인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과거가 죽고 새롭게 살게 된 것입니다.
이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계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고 예수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부활시킬 것을 믿지 못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믿는 사람들 속에도 예수님의 부활과 자신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그러한 사람들을 향하여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인들에게 물을 떠다 부으라고 하신 돌로 된 항아리가 나옵니다.
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님의 어머니는 아마도 그 집과 친척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친척이 아니라도 그 집과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 것이라고 본문에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과 제자들보다 그 집에 먼저 계셨고 그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그 문제에 깊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집에 포도주가 떨어지자 예수님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와서 말씀하기를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여자여’란 말은 우리의 문화로는 이해하기 힘든 말입니다. 어머니에게 ‘여자여’라고 하는 것은 자식으로 할 수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헬라어적으로는 그것이 무례한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라고 하신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메시야의 공적 역사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만이 주장하고 혈통적 모친 된 권세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인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예수님의 모친도 하나의 ‘여자’의 지위를 가질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지금 포도주가 떨어진 일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말합니다. 더불어 말하기를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때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죽으실 때를 의미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주님은 아직 사람들에게 드러날 때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음에도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을 불러 예수님께서 무어라 명하든지 행하고 하시고는 사라지셨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돌항아리 여섯에 물을 채우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이 돌항아리의 용도입니다. 그 용도를 본문에서는 “유대인의 정결예식을 따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대인의 정결예식이란 유대인들이 밖에 있다가 집에 들어오거나 식사를 하기 전에 손과 발을 닦기 위하여 물을 담아두었던 통입니다. 이 항아리의 크기는 77리터 혹은 115리터 정도의 물을 담을 수 있다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주 큰 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물을 부으라고 시키실 때 이 항아리가 아니라 포도주 통이나 식수를 담는 항아리에 담으라고 해야 자연스럽습니다. 사실 이 항아리는 식수를 담아두는 통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하고 본문을 보면 비위생적입니다. 그런데 왜 주님은 굳이 유대인의 정결예식을 위하여 두는 통에 물을 담으라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이 통의 목적을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부정을 씻는 물을 담는 것입니다. 비록 그것은 제사제도에 쓰이거나 그 정도의 권위를 갖지 못하지만 그들 생각 속에 그것은 그 가정 안에서 음식을 먹고 거하는데 필요한 만큼의 정결은 행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통에 물을 부으라고 하고 그 통에 부었던 물이 포도주가 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결케하는 것은 결례를 위한 물이 아니라 당신의 보혈이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실 수 있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세례 요한의 선포를 통해 자신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포도주가 의미하는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를 정결케 한다는 사실을 돌항아리 여섯을 통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표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분이라는 표적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9절과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유대인들의 결혼잔치는 며칠 동안 합니다. 이러한 잔치에는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포도주였습니다. 그런데 이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 집의 흥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잔치는 순식간에 다툼과 소란으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당시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면 주인이 고소도 당할 정도였으니 이집이 겪고 있는 문제는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구약에서부터 포도나무와 그의 산물인 포도주는 이스라엘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런데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불환전함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의 삶과 소유의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의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우리들의 불완전함입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그것이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 자신이 소유하고 있거나 누리고 있는 것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마치 본문 속에 잔치를 배설한 주인처럼 자신이 준비한 것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때에 동이 나고 인생의 위기를 겪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주님은 이런 불완전한 우리들, 인생의 부족과 영적인 부족으로 인생의 절망과 지옥의 형벌을 당하게 된 우리들을 위해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본문에 돌항아리 여섯입니다. 이 돌항아리의 숫자도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도 불완전입니다. 지중해권 사람들에게 일곱은 완전수이고 여섯은 불완전함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일곱은 하나님을 상징하는 숫자이고 여섯은 인간을 상징하는 숫자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존재를 통해 예수님은 극상품 포도주를 만들어내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하인들이 떠다 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본 연회장의 감탄과 칭찬의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라는 말입니다.
이 말속에도 표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나온 포도주보다 나중 나온 포도주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통해 요한이 우리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요? 인생들이 세상 속에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들을 통해 누리려고 했던 행복과 쾌락보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얻는 기쁨과 즐거움이 더 크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3장 7절과 8절에서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하였습니다.
나아가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절망이 기쁨으로, 부족이 풍성함으로, 불완전함이 완전함으로 변화 될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문제 안에 예수님이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혼인 잔칫집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그 집의 잔치는 재앙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배를 타고 갈릴리를 건너시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주무시고 계셨고 제자들이 밤새 파도와 싸웠지만 할 수 없어 예수님께 살려달라고 하였고 이에 예수님께서 바다와 파도를 명하사 잔잔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배 안에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배 밖에 계실 때도 주님을 직접 바다 위를 걸어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해 주심으로 풍랑을 잔잔케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의 영인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의 심령에 거하고 계십니다. 그분께 요청하면 그분은 언제든지 당신의 방법으로 우리의 불완전함과 부족은 채우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처음 표적인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본 예수님의 네 가지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첫 번째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의 신랑으로 오셨다는 표적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라는 표적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은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분이라는 표적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분이라는 표적입니다.
이 표적을 통해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결론을 무엇입니까?
1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이 표적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고자 한 것은 자신을 믿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의 삶과 신앙 속에서 많은 표적을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표적들을 통해 주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일을 이루신 이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기적 자체만을 구하는 기적신앙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벌이시는 기적을 통해 말씀하고자하는 표적, 즉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임을 믿게 하려는 것임을 알고 신앙생활 속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응답과 역사를 통해 온전히 주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