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3장 22-36절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마치시고 갈릴리로 올라가시지 않으시고 요단강으로 나가셨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베푸신 사건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실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한 유대인과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세례와 세례 요한이 베푸는 세례에 대해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논쟁하던 제자들이 시기가 나서 세례요한에게 가서 말하기를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 가더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세례 요한은 그들을 책망하며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자신이 원하는 바라고 말하며 예수님은 흥하여야겠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으신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야기 속에서 주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후에 유대 땅으로 가셔서 거하셨습니다. 어떤 이는 “그 후에”라는 말을 예수님께서 갈릴리 지역으로 가셨다가 다시 유대지역으로 가셨다는 이도 있으나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은 그 곳에서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셨다는 기록은 오직 요한복음에만 있습니다.
왜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셨다는 것을 기록하였을까요? 크게 두 가지입니다. 먼저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세례와 같은 세례를 베푸심으로 자신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자임을 스스로 증거하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례 요한과 동일하게 회개를 외치셨습니다. 이렇게 회개를 외치심은 세례 요한이 자신을 증거한 그 증거가 참임을 세례 요한과 동일한 세례를 베푸심으로 스스로 증거하신 것입니다.
또한 요한이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심을 기록한 이유는 다음에 이어지는 말을 끄집어 내기위해 도입구로 사용하려 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시고 계시다는 것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듣고 그것에 대해 일으키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의 반응과 그에 대해 가르치는 요한의 말을 통해 성도들에게 전하고자한 메시지를 전하고자 예수님의 세례를 언급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베풀었지만 계속되는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살렘도 애논도 어디인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장소를 통해서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것은 살렘은 “평화”라는 뜻이고 애논은 “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푸는 장소를 통해 세례를 통해 주고자하는 것이 죄를 끊고 샘에 근원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여 평화를 얻게 하고자 함을 의미한다고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세례를 주었던 것에 대해 복음서들은 장소를 세 곳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마태복음 3장 1절과 마가복음 1장 1절부터 5절을 통해 나타나는 장소인 “유대광야”입니다. 두 번째는 요한복음 1장 28절에 등장하는 요단동편 베다니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이 본문에 나오는 살렘 가까운 애논이라는 곳입니다.
이렇게 장소가 다른 것 뿐 만아니라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 한 내용도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유대광야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막1:8)라고 하였고 요단동편 베다니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18)이라고 했으며 오늘 본문에서는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 성령으로 세례를 주셔서 구원함을 얻게 하시며 믿는 자들의 신랑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각자 처해진 곳에서 세례를 베푸실 때 문제가 발생됩니다.
24절과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이에 요한의 제자 중에서 한 유대인과 더불어 정결예식에 대하여 변론이 되었더니”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힌 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례요한이 옥에 갇힌 후에 죽은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옥에 갇히기 전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요한의 영향력이 유대 땅에서 강력하게 행사할 때였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세례와 세례 요한의 세례에 대해 비교하며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누구의 세례가 더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지, 누구의 세례가 더 능력이 있으며 사람들의 지지를 누가 더 많이 받고 있는지에 대해 변론이 일어 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세례 요한이 스승에게 세례를 받았던 예수란 자와 비교 되는 것도 기분이 좋지 않았겠지만 스승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간다는 것은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에게 달려가 이 사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그들이 세례 요한에게 말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스승에게 세례를 받았던 그 이, 즉 예수란 자에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간다는 것입니다. 이를 세속적으로 말하면 우리 식당에 오던 손님들이 우리 식당에서 음식을 배워나간 사람이 차린 식당으로 몰려간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이 시대 교회에서도 벌어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동네에 새로운 교회가 개척되어졌는데 그 교회가 은혜가 충만하다고 하며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가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고 천국에서 그 영혼들로 인해 잔치가 벌어질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교회 성도들이 그리로 갈까 두려워하면서 그 교회와 비교하고 그 교회의 흠을 찾아내어 사람들이 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들의 어리석은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비단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우리들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수없이 이 싸움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제자들은 서로 누가 크냐를 가지고 다투었습니다. 그들이 그 싸움을 하며 예루살렘에 도착했고 주님께서 죽으시기 직전까지 계속했습니다. 그 증거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한 가지 행동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집에 들어가면 손과 발을 닦았습니다. 주인이나 집의 하인이 해 주지 않으면 무리 중에 제일 낮은 사람이 대야에 물을 떠다가 그들의 손발을 닦아 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날 아무도 그것을 행하지 않았고 음식을 먹는 순간이 이르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식사하시다 말고 일어나 대야에 물을 떠오시고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루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섬김을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너희도 서로 발을 씻겨 주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크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으며 세력을 규합하고 세상에서 행하는 우리의 영향력에 대해 연연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만을 생각하면 되는 것입니다. 유명하게 되고, 큰 교회를 만들고, 큰일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나쁘진 않지만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온전하고 바르게 드리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누가 크냐의 생각에 빠지면 다툼이 일어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세속적이 방법을 동원하고 주께서 맡겨주신 낮은 곳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섬기는 그 일의 영광스러움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세속적 가치에 사로잡힌 제자들의 말에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27절과 2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행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하기를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정말 답답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외적인 행동을 보면서 그를 메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금욕적인 삶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추종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말함에도 사람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을 좇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규모, 유명한 목사님, 사람들의 많은 지지 등이 예수님을 가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성경을 강좌하다 보면 종종 만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교회나 목사님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며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도, 전통도, 가르침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위에 설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말씀보다 사람이나 전통, 그리고 규모를 위에 두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합니다.
사실 이러한 것을 좋아하는 이는 성도들보다는 사역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도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만들기보다는 자신들의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목회 잘한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바르지 않습니다. 사역자들은 성도들이 자신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게 하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목회를 잘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바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자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신분에 대해 아주 적절한 비유를 들어 말해주고 있습니다.
2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신랑으로, 성도들을 신부로, 자신은 신랑의 친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자신이 아니라 신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제자들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간다고 하며 그것을 막기 위해 무엇인가 대책을 세워야 할 것처럼 흥분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신부인 성도들을 취하면 안 되는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신부인 성도들은 오직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취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기쁨은 친구의 기쁨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말하기를 신랑과 신부의 만남을 크게 기뻐하는 친구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신랑의 친구들은 역할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랑과 신부 사이를 중매하는 것부터 신부를 신랑에게 무사히 인도하는 역할과 결혼식에서 신랑의 들러리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결혼식을 주관하는 역할까지 담당했었습니다. 그런 신랑의 친구들은 누구보다도 신랑과 신부의 결혼을 기뻐했고 그 기쁨으로 인해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기쁨이 그러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본문에서 그 기쁨을 표현하기를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충만이란 말은 헬라어로 “페플레로타이”라는 말로서 물이 넘치기 직전의 상태를 말하는데 이처럼 신랑을 신부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로 인해 기쁨이 충만하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몰려가는 것으로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쁨이 넘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감정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말을 세례 요한은 하고 있습니다.
3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세례 요한의 마음을 이 문장처럼 잘 표현한 것은 없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은 흥하는 것이 당연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을 넘어 자신은 쇠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일을 통해 자신의 삶이 흥하기를 기대합니다. 얼마 전에 아는 목사님과 대화 중에 자신의 아들이 신학을 한다고 하는 말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제 귀에 거슬리는 말을 그분이 하셨습니다. 그것은 “요즘은 자신만 잘하면 목회가 직장 생활하는 것보다 나아” 그러면서 또 말하기를 “큰 교회 후임으로 가면 기업 회장 부럽지 않아”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각이라고 생각되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일을 통해 흥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세속적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는 모든 것이 주님의 일을 통해 흥하려는 우리의 모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주님 때문에 쇠해지는 모습은 무능력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얼마 전 우리 통독원에서 공부하신 목사님과 통화했습니다. 그분은 섬기던 교회에 사표를 냈습니다. 그 교회에서 인정받았고 성도들의 입에서 후임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로 열심히 사역했고 인정받았던 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표를 내고 사임한다는 말을 들어서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 분이 대답해 주시기를 자신은 소외되고 어려운 사람들, 시험 들고 연약한 성도들에게 관심을 가져야하고 그 한사람을 위해 교회의 재정과 사람들을 동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돌볼 생각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담임목사님의 말씀은 그를 더 이상 그곳에서 사역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생각은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힘을 쓰는 시간에 힘 있고 부요한 자들에게 동일한 에너지를 쓰는 것이 교회에 유익하고 연약하여 시험에 든 자들을 돌보려고 하는 것은 패배자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저히 있을 수 없어 사표를 냈답니다. 이러한 모습이 비단 그분의 담임목사님의 모습 뿐 일까요?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교회 사역과 일상의 삶에서 우리의 흥함만을 추구하지 않나 돌아보아야 합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우리 목회자들의 부끄러운 모습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은 어떨까요? 자신이 잘되는 일을 위해 예수님은 도구이고 조력자일 뿐인 사람은 없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손해가 된다면 예수님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는 일이 많은 교인들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의 일 사이에서, 하나님과 자신, 하나님과 자녀, 하나님과 재물 사이에 고민하며 하나님 때문에 자신이 쇠하는 일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본문의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은 흥해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하는 것을 잊지 않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서 요한은 세례 요한의 또 다른 말을 통해 영생에 대해 다시 한 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31절부터 36절까지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위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고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것을 말하느니라 하늘로부터 오시는 이는 만물 위에 계시나니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그의 증언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참되시다는 것을 인쳤느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의 손에 주셨으니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에서부터 오셨으며 땅에서 난 자들은 땅에 속하였기에 예수님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땅에 속한 자’는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그것은 요한의 글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아주 많은 양의 ‘땅에 속한 자’에 대해 언급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땅에 속한 자’란 믿지 않는 자들을 표현할 때 주로 사용했습니다. 이로 보건데 본문에서 땅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본문에서는 세례 요한 자신 앞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고 이 글의 1차 대상자였던 주후 90년경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당시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32절에서 그의 증언 즉, 예수님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36절에서 말하기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요한은 1장 11절과 12절에서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세례 요한과 그의 제자들의 말은 통해 예수님만이 메시야이며 그의 말씀을 전하며 그의 일을 하는 우리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씀을 전하는 나팔의 역할을 하는 사역자들에게 집중하는 것에서 시선을 돌려 나팔이 소리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예수님을 보게 하려는 강력한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흥하여야겠고 우리는 쇠하여야 할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뿐 만 아니라 그렇게 살고 신앙 생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