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요한복음 41-24

 

예수님을 유대를 떠나 갈리리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런데 평소 바리새인들이나 경건한 유대인들은 유대지역에서 갈릴리로 갈 때는 요단강을 건너갔다가 다시 건너 들어오는 방식으로 사마리아 지역을 거치지 않고 다녔습니다.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하면 3일이면 갈 것을 6일을 소모하면서 돌아가는 방식을 택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 가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시간을 아끼시려는 이유가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고 그 지역에도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지역의 수가성에 있는 우물곁에 가셨고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을 때입니다. 이 때 마을에서 한 여인이 물을 뜨러 나왔고 그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임을 밝히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야인 당신이 예배의 대상임을 말씀하셨고 이를 깨달은 여인은 마을로 내려가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쳤습니다. 주님은 그곳에서 이틀을 유하시며 복음 전하셨고 그곳에서도 믿는 자들이 많이 생겼음을 말씀해 주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시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것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만 신경을 쓴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바리새인들이라고 말하지만 바리새인들 뿐 아니라 모든 유대지도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유대지도자를 대표하는 산헤드린 의회는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한 사두개파는 소유에 불과했고 대다수가 바리새인들이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들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이라고 꼬집어 말한 이유는 요한이 이글을 쓸 당시 유대사회는 바리새인만 남아있었습니다. 주후 70년에 성전이 파괴되면서 제사장과 사두개파는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고 유대사회의 핵심 지도자는 바리새인이 유일하다 시피 했었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신 사건에 대해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 알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아신 것을 인하여 유대지역을 떠나신 이유는 그들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요한이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예수님의 때때문인 것입니다. 아직 죽으실 때가 되지 않았기에 불필요한 부딪힘을 원치 않으신 것입니다. 아직은 사람들을 만나 당신이 누구인지 알리셔야했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일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주님은 유대지역에서 갈릴리를 향해 가셨습니다.

3절과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주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는데 본문은 사마리아로 통과하여 가야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면 갈릴리는 이스라엘의 상부에 있고 유대지역은 남부에 있습니다. 그 중간에 사마리아가 있습니다. 지도상은 당연히 지나는 길입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의 경건한 사람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지역을 통과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는 주전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면서 인종적 혼혈과 종교적 혼혈이 일어났습니다. 그 후 정통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방인 취급하였고 끊임없이 부딪히며 살아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유대지역에서 갈릴리로 가시면서 사마리아지역을 통과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이나 바리새인들에게 또 다른 시비 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곳을 통과하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 지역을 통과하는데 있어서 주님의 단호함과 분명한 목적의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먼저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시려는 것이고 나아가 그 일을 통해 버림받고 소외된 사마리아지역에 복음을 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에 관심을 갖고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온전치 못해도 온전히 우리를 위해 기꺼이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풍랑 중에 고통당할 때 바다 위를 걸어 오셔서 바다를 잔잔케 하신 분이셨습니다. 주님은 두로 지방에 오직 수로보니게 여인을 만나시기 위해 찾아가셨고 거라사 광인을 만나 귀신을 내어 쫓아주시기 위해 밤에 배를 타고 건너가셨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기 전에 여리고로 들어가셔서 삭개오를 만나셨습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한 사람을 기꺼이 찾아가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병든 자를 위해 의원이 필요하듯이 잃어버린 자를 위해 오셨다고 하셨고 우리 안에 아흔아홉 마리의 양떼를 놓아두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나서는 분으로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주님께서 본문에 한 곳을 찾아 가셨습니다.

5절과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주님은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는 동네에 들어가셨습니다. 이 땅을 본문에서 설명하기를 야곱이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다고 했는데 그 땅은 세겜입니다. 세겜은 야곱이 100크시타를 주고 산 땅이었고 요셉의 뼈가 묻혀있는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야곱의 우물이 있었고 그 곁에 주님은 잠시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여섯 시라고 하고 있습니다. 로마식으로 하면 오후 6시이고 유대식으로 하면 정오가 됩니다. 아마도 이야기의 정황상 시간은 정오라고 여겨집니다.

 

일반적인 모든 종교는 인간이 신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종교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만은 신이 인간에게 찾아오신 종교인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에 인간 속에는 종교성이 남아 있으나 그것이 온전치 못합니다. 인간이 신을 찾기는 찾으나 하나님을 스스로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찾아 오셔서 당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알 수 있고 섬길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당연한 진리가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우리같이 더럽고 추한 인간들을 위해 하늘보좌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갖고 오신 것도 모자라 우리가 지은 온갖 더러운 죄들을 뒤집어쓰시고 죽으셨다는 것은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은혜인 것입니다.

 

이렇게 찾아오신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7절과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제자들이 동네로 음식을 구하러 간 사이에 사마리아여인이 물을 길러 나왔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을 두레박을 자신이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 여인에게 부탁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그 여인의 반응합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퉁명스럽게 말하기를 유대인으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고 묻습니다. 이렇게 반응하는 이유를 본문에서도 말씀해 주듯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랍비 엘르아살은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 빵을 먹는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과 같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을 혐오스러워했는데 그 중에서도 사마리아 여인을 더 혐오스러워했습니다. 18절을 근거로 해서 생각해 보면 이 여인은 부정한 여자 중에 부정한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주님은 물을 달라고 했으니 그 여인의 반응이 이렇게 퉁명스러운 것을 당연한 것입니다.

 

주님은 3장에서 경건한 자들을 대표하는 한 사람인 니고데모와 영생에 대해 대화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부정한 사람의 대표와 영생에 대해 대화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나름 경건하다고 하는 이는 자신이 찾아와 주님께 영생에 대해 물었다면 부정하여 감히 나올 수 없는 그 여인에게는 주님께서 친히 찾아가 주셔서 만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여인에게 이제 처음으로 당신을 계시하여 주십니다.

1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물을 달라고 하신 주님의 부탁에 평소에는 상종도 하지 않은 당신들이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냐는 여인의 말에 주님의 대답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혐오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둥 미안하다는 등의 말이 어울리는데 엉뚱하게도 주님은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교통신호를 위반해서 경찰에게 면허증을 요구받는 사람이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그 여인의 대답이 있습니다. 우리라도 이렇게 물었습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물을 뜨려면 두레박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으면서 물을 준다고 하고 이 물이 아니면 다른 물이라도 있어야 할 텐데 그것도 없어 보이기에 하는 말이었습니다. 나아가 여인은 말하기를 야곱의 우물보다 더 나은 물은 없다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물리적 물을 통해 영적 물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니고데모가 거듭남에 대해 육적인 출생 밖에는 생각할 수 없듯이 여인도 물리적 물 외에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당신이 물을 줄 수 있는데 그것도 생수를 줄 수 있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생수를 통해 영생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후에 요한복음 73839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13절과 14절에서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주님은 지금 눈에 보이는 야곱의 우물 물과 당신이 주는 물을 비교하여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 물을 먹으면 다 목이 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물은 그 속에서 계속해서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 얻는 것을 통해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합니다. 돈을 많이 모으고, 명예를 쌓고, 자식을 성공시키고, 죽는 날까지 건강을 지키는 것 등으로 인생에 행복을 채우고 싶어 하고 그것이 그 갈증을 해갈해 줄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생이 동일하게 깨닫는 것은 그것이 인생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 예수님만이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인간에게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렇게 생수를 주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이유, 그것은 우리의 영혼의 구원을 위함입니다. 그 영혼의 구원은 내세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주의 생명을 갖고 살아가며 그 생명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함이라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을 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통해 자신이 하는 기도가 더 잘 응답받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대부분 자신의 부요와 영화를 위한 것입니다. 여전히 야곱의 우물을 최고라고 여기던 여인처럼 이 땅의 것이 최고라고 여기고 그것만을 구하는 어리석음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의 여인도 그 물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여인도 우리도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이유 중 최고의 이유는 육신의 평안과 부요함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 즉 성령은 육신이 잘 먹고 잘 살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생명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이 흘러 넘쳐 또 다른 사람도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성령의 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기쁨의 근거가 다릅니다. 눈물 흘리는 이유가 다른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바르게 받은 사람들은 자신은 쇠하고 주님은 흥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삶의 고통의 문제로 흘리는 눈물보다 그분과의 사랑의 교통으로 인해 더 많은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여인에게 물리적 물을 주고자 하심이 아니라 영원한 물을 주시고자 여인의 아픈 부분을 자극합니다.

16절부터 18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주님은 그 여인에게 남편을 데리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했고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이 정오에 물을 뜨러 올 수밖에 없는 그 여인의 아픔을 건드셨습니다. 그 여인은 이스라엘의 고엘 법칙을 따라 남편을 여섯 번째 받아들인 여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아이가 없이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동생과 관계를 하고 아이를 낳아 대를 이어야 했습니다. 이 여인은 다섯 남편 모두 그러했고 현재도 남편이 아닌 가장 가까운 친족을 통해 고엘을 수행하고 있는 여자였습니다.

 

이러한 문화는 그들에게 종종 있던 일이었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부활에 대해 논쟁을 하면서 어떤 여자가 일곱 형제와 부부로 살았는데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는냐는 질문으로 주님을 넘어뜨리려 했습니다. 예수님의 조상 중 유다의 며느리 다말도 유다의 두 아들과의 관계를 통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유다와 관계를 통해 쌍둥이를 낳아 베레스와 세라라고 명한 적이 있습니다.

 

바로 본문의 여인이 바로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는 저주받은 여인으로 취급을 받았었고 그것 때문에 그 여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던 여자였습니다. 그 여인에게 당신의 메시야적인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이에 여인은 주님께 자신이 가장 알고 싶은 한 가지를 묻습니다.

19절과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 여인은 자신의 삶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는 예수님께 당신은 선지자입니다.”라고 말하고 곧 바로 물은 것이 예배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예배의 장소에 대해 묻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우고 하나님을 예배했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했습니다. 이 둘 중에 어느 곳에서 예배해야 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사실 장소도 달랐지만 신앙의 대상과 신앙의 형태도 달랐습니다. 그 여인은 삶의 결핍이 하나님을 찾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정확한 답을 얻지 못했기에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왜 예배에 대해 물었을까요? 그것이 왜 가장 중요한 문제일까요? 그 여인은 자식을 달라고 구하는 것이 첫 번째 아닐까요? 자신에게 제대로 된 남편을 달라고 하는 것이 기도의 첫 번째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 여인은 예배의 장소와 대상이 바르게 되어야 자신의 삶의 문제가 해결 되도 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의 장소에 대해 물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으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21절부터 24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은 장소나 형식의 문제를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는데 곧 이 때라고 하셨습니다.

 

여인은 예배의 물리적 공간과 형식에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방식을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당신 안에서 예배하고 당신을 통해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장소와 형식에 집중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예배는 장소와 형식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며 예배의 대상과 자신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예배당에서 잘 짜인 순서에 근거하여 예배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그 분 앞에서 자신을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장소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배는 영과 진리로 드려지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속에 있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놓고 그 말씀의 책망을 들으며 말씀을 통한 하늘의 위로를 받으며 말씀의 요구에 온전히 순종하는 예배가 진정한 예배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배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는 23절 후반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성가 중에 주를 위한 이곳에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 예배하는 자들 중에 그가 찾는 이 없어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 내가 그 사람 되길 간절히 주께 예배하네

 

주 은혜로 이곳에 서있네 주 임재에 엎드려 절하네

그 어느 것도 난 필요 없네 주님만 경배해

주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에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

 

두 번째로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하는 이유는 24절 말씀처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많은 영 중에 한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이 바로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게 형식적인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영혼이 진정으로 주님을 예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영적인 예배를 위해 장소를 정하고 시간을 정하고 복장을 갖추고 물질을 구별하며 마음 다해 드리는 것입니다. 주객이 전도되어 영과 진리는 없고 형식과 분위기만 있는 예배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예배의 대상인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
    신윤정 2017.03.16 04:28
    은혜롭게 말씀을 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겸손 2017.09.13 12:03
    말씀을 쉬우면서도 핵심을 잘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하림 2017.09.13 18:27
    감사합니다. ^^
  • ?
    모세스 2019.01.22 11:30
    지나가다 우연히 들렸습니다. 평이한 것 같은 말씀이지만 참 은혜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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