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요한복음 4장 25-42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여인을 전도자로 만들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발견하고 곧 마을로 내려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쳤습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자세히 보도록 하겠습니다.
25절과 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여인이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앞에서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다 알았을 뿐 아니라 예배에 대해 물었을 때 영과 진리로 예배 할 때가 오는데 곧 이때라고 말한 것 때문입니다. 이 여인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수님께 확인하며 묻고 있는 것이 본 절인 것입니다.
여인은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면 자신들의 조상들의 주장대로 사마리아에서 예배해야 하는지 유대인들의 말처럼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하는지 아니면 지금 자신 앞에서 말씀하시고 계신 예수님의 말처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것이 옳은지 하는 것은 메시야가 오시면 알 수 있다고 말하면서 메시야만이 정확하게 알 수 있는데 당신은 누구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은 신명기 18장 15절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모세같은 선지자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이라고 믿었는데 그를 “타헤브”라고 불렀습니다. “타헤브”란 “다시 오실 분” 혹은 “회복시키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모세같은 선지자, 즉 메시야인 “타헤브”를 기다렸기에 여인은 예수님에게 ‘그 선지자 즉, 메시야’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여인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그” 즉, “타헤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신이 메시야이며 지금까지 말한 것이 바로 메시야의 말이라고 한 것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 할 때가 바로 이때이며 자신이 그 예배의 대상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메시야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신적 자기계시라고 말하는데 헬라어로는 “에고 에이미”라고 합니다. “나는 ....이다”라는 뜻인데 이렇게 표현한 것이 요한복음 무려 177회나 됩니다. 공관복음을 모두 합쳐야 34회인 것과 비교하면 요한복음은 온전히 당신이 누구인지를 강력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메시야라고 거듭 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메시야이십니다. 우리를 ‘회복시키실 분’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다시 오실’ “타헤브” “메사야”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대화를 하고 있는 가운데 제자들이 마을로부터 돌아왔습니다.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그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자가 없더라”
제자들이 돌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여자와 대화하고 계신 것을 보았고 이를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 전통에 의하면 랍비는 여자들과 공적으로 대화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금지되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랍비로서 여자와 대화하는 것을 넘어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너무 이상한 것입니다. 당시 랍비가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함께 있거나 대화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우리가 좀 더 객관적으로 본다면 지금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는 자신들의 부정은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행실이 자신들의 기대와 어긋날 때 교회를 비난하고 나아가 죄인들을 용납하시는 예수님을 이상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오심이 죄인들의 위함이었기에 그것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목사이고 집사이며 거룩하신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 이상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시선은 교회 밖의 사람들보다 교회 내에 오래된 신자들 사이에 더 많습니다. 자신의 과거는 생각하지 못하고 현재 연약한 성도들의 모습을 보며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마치 제자들이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이 이상했던 것처럼 바리새화 된 성도들의 눈에는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교회 내에 있고 그들이 직분을 맡는 것이 이상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준이 항상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좀 열심일 때는 모든 사람을 비판합니다. 그러다가 자신이 충만하지 못할 때는 어떤 사람이 자신을 비판하거나 정죄하면 그를 바리새인 같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 누구도 죄인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비판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신 죄인들과 함께 있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이 예수님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길 때 여인은 한 가지 행동을 실행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들어간 것입니다.
28절과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여인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너희가 기다리던 메시야라고 말씀하시자 지체하지 않고 행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물동이를 버리고 마을로 들어가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친 것입니다.
이 여인이 버려두고 간 물동이는 메시야를 만난 감격의 한 표현인 것입니다. 메시야를 만나자 그는 자신에게 물을 제공했던 그 도구를 버린 것입니다. 이는 메시야가 주신 생수로 인해 더 이상 자신이 추구하던 이 땅의 물은 필요치 않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서 이전까지 자신에게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주었던 것이라고 여기던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울인 것입니다. 그는 고백하기를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3:7,8)이라고 하였습니다. 거리에 앉아 구걸하던 소경 바디매오는 주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자신의 전 재산인 겉옷을 벗어 던지고 달려갔습니다(막10:50).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물동이를 버리지 못하고 여전히 그것 붙들고 있지 않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따르지만 여전히 한손에는 물동이를 붙들며 그것이 인생의 갈증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제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동네로 뛰어 들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여인이 뛰어 들어간 동네를 좀 생각해 보면 그 여인에게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숨기고 싶은 장소인 것입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알려야 했습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저주받은 여인이라 여기는 자들이게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거룩하신 메시야를 만났다고 외쳐야 하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 장소로 여인은 뛰어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될 곳, 그곳은 바로 우리의 연약과 부끄러움을 다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입니다. 사실 가장 복음을 전하기 힘든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우리에게 “너나 잘하라”고 할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마을로 내려간 여인이 한 일은 첫 번째가 “이르되”라는 말처럼 외치는 것이었고 두 번째가 “와서 보라”는 말처럼 초청하는 것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논리와 이전에 자신의 삶의 모습들로 인해 그들에게 메시야를 전화는 것이 무리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 여인은 와서 직접 만나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여인이 전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니냐”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티”라는 단어인데 이는 부정적인 답변을 예상한 부정어로서 질문자가 자신의 진술에 확신이 있을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즉 상대가 반박할 것이 전제되지만 그 반대보다 자신이 하는 말이 더 확실하다는 것을 말할 때 쓰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은 세상 사람들의 반대에 부딪힙니다. 하지만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이 생명의 주님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고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전하는 일에 있어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확신하지 못하는데 어찌 남에게 그분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여인의 이 강력한 확신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확신하는 데는 몇 가지 단계를 거쳤다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는 “유대인”으로, 대화가 진행되면서는 “선지자로”,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메시야”로 변하였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교회 올 때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 싶어서나 답답한 현실 앞에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나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이 땅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그 다음은 천국을 주시는 분으로, 그 다음은 우리와 친구인 분으로, 더 나아가 우리의 생명을 다 드려도 될 주님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을 통해 영혼들이 주께 돌아옵니다.
그래서 30절은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나오는 동안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31절부터 34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제자들은 동네에서 구해 온 음식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님의 양식은 무엇일까요? 제자들도 의아해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먹을 것을 같다 드린 일이 없었기 때문이며 그들의 눈에 먹을 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 글을 객관적인 관점에서 읽기 때문에 알 수 있는데 그것은 기록된 대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며 그 일을 행하는 것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음식을 드시지 않아도 배가 불렀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이 땅에 와서 해야 할 일을 이루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어떤 일이 잘 풀리거나 그 일에 전념하게 되면 배고픔을 잊을 뿐 아니라 먹지 않아도 배부른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식은 영혼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도 영혼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양식을 말씀하신 주님은 제자들과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해 주고 계십니다.
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유대인들의 추수가 4월부터 시작되기에 12월에 말씀하신 것인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넉 달은 그리 중요한 말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는 말입니다.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는 말은 최종적으로는 성령이 임하시면 본격적인 추수가 됨을 말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고 난 후 베드로가 복음을 전했을 때 하루에 3,000명, 5,000명씩 돌아오는 일이 벌어졌고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전 유럽에 복음이 전하여진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보다 먼저 한 가지 사건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여인이 동네로 들어가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했고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오는 모습을 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 동네에서 이틀을 더 유하시며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41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1차적으로 이 추수를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은 희어져 추수할 때인 것입니다. 단지 우리들이 외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여인처럼 동네로 뛰어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동네로 뛰어 가지 않을까요? 그것은 첫째로, 그 여인처럼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강력하게 만난 사람은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예수님을 전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변화된 모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후 움츠리고 살던 모습에서 당당하게 사람들에게 들어내는 모습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바꾸게 하신 그 분을 만나보길 원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싶어 합니다. 그 변화된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보고 싶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변화되지 못한 사람들의 행실은 주변의 사람을 낙심하게 하고 주님께 나아왔던 사람들까지도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가복음 9장 42절에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여기서 연자 맷돌을 매어 바다에 던지라는 것은 실족시킨 사람이 아니라 실족된 사람의 목에 매는 것입니다. 이는 한 영혼을 실족하게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그가 실족하기 전에 죽여 버리는 것이 낫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가선지자는 성도답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으로 인해 연약한 영혼들이 하나님을 떠난 것에 대해 말하기를 “그들의 어린 자녀에게서 나의 영광을 영원히 빼앗는도다.”(미2:9)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대의 문제는 밭은 희어져 있는데 추수할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어져 추수해야 할 이 땅의 밭에 나가 추수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을 만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만나고 기도를 통해 만나며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야 주님을 전하게 되는 것임을 알고 주님을 먼저 깊이 만나고 주님의 눈으로 이 땅을 보게 되어 추수할 영혼들이 보이는 복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3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거두는 자가 이미 삯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모으나니 이는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거두는 자는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거두는 자가 이미 삯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삯은 구원의 은혜입니다. 이미 영생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힘입어 영혼을 추수하는 일에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일은 복을 받거나 천국에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받았기에 기꺼이 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부득불 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삶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땅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옵헤일로”라는 말로 빚을 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은 빚을 갚은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하면 이미 삯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미” 받았다는 말은 받았으므로 속히 하라는 의미입니다. 영혼구원의 긴박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농사를 지어보면 씨앗을 심을 때와 가꿀 때, 그리고 추수 할 때가 있어서 농사에는 “시기”가 아주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추수 할 때를 놓치면 일 년 농사 헛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영혼 추수는 뒤로 미룰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추수를 하는 자에게는 보상이 따르는데 그것은 “즐거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함께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뿌리는 자는 주님을, 거두는 자는 제자들을 일차적으로 말합니다. 특별히 거두는 자는 제자들을 넘어 이 땅의 모든 전도자들인 것입니다. 정말로 영혼이 돌아오는 것을 보는 즐거움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영혼구원의 즐거움은 영혼을 구원해 본 사람들만 아는 즐거움입니다.
목회자의 즐거움도 별만 다르지 않습니다. 영혼이 돌아오고 그들이 자라는 모습은 정말로 행복합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그 말씀을 배운 대로 사는 성도들을 보는 것은 목회자의 최고의 기쁨입니다. 제게 성경을 배운 사역자가 바뀌고 그들의 사역이 바뀌는 것을 보는 것으로 인해 그 일은 병으로 몸에 힘이 없어도 입술을 벌려 말 할 수만 있다면 죽는 날까지 하고 싶은 일은 것입니다. 제게서 그 일이 사라진다면 차라기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 기쁨은 세상이 주는 어떤 즐거움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땅의 성도들의 최대의 즐거움은 영혼 구원인 것입니다.
이 놀라운 즐거움을 주님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37절과3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한 사람이 심고 다른 사람이 거둔다 하는 말이 옳도다 내가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 다른 사람들은 노력하였고 너희는 그들이 노력한 것에 참여하였느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추수하는 즐거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추수하는 수고에 대해 “너희로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러 보내었노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 즐거움에 참여할 뿐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를 비롯하여 이 땅에서 선택한 자들의 죄를 사해주셨고 당신의 영인 성령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주셨기에 우리들은 단지 거두는 것뿐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주님과 함께 누리는 것뿐인 것입니다.
그 증거가 본문에 있는데 4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동네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에 대해 여인에게 말하기를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인의 입장에서 조금 서운할 수 있겠지만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즐거움을 같이 누리고 있기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인은 전하기만 했을 뿐 그들이 변화된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추수 꾼으로 일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에 참여할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기를 마태복음 25장 21절에서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눈을 들어 밭을 봅시다. 희어져 추수할 것이 많은 밭을 향해 나가는 우리가 되어 주님의 즐거움에 함께 참여하는 복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