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하시는 예수님
요한복음 5장 19-30절
예수님께서 베데스다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에 유대인들과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안식일을 어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자신도 일한다고 말하여 유대인들의 공분을 사게 됩니다. 그 이유는 안식일을 범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자신의 친아버지라 말하며 자신과 동등하게 여기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죽이고자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들인 자신은 아버지인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나아가 아버지가 죽은 자를 살리심과 같이 자신도 자신이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고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말을 듣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심판의 권세가 있음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심판하시는 예수님에 대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본문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 어떤 사건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앞에 있는 사건에 기인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이 죽을 이유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자신은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아버지가 행하시는 것은 아들도 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고쳐짐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외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셨으므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과 동등인 것입니다.
이를 요한복음 14장 10절에서도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20절을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하사”라고 한 단어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말하는 “아가페”나 가족관계에서 사랑을 말하는 “스톨게”를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본문은 “필레오”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친구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친구간의 사랑으로 표현한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가 주인과 노예,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위치로 사랑하는 관계임을 나타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들에게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보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38년 된 병자의 고침도 하나님 아버지의 행하심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의 말이 하나님과 자신을 동등하게 여기는 것을 이유로 죽이려했기에 자신이 행한 것은 자신이 행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더 큰 일을 보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병을 고치시는 정도가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시는 것을 나타내 보이시겠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21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20절에서 큰일을 보이시겠다고 했던 것이 본분에서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처럼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에게도 주시지 않은 세 가지 열쇠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는 비를 내래는 열쇠이고, 둘째는 여인의 태를 여는 열쇠이며, 세 번째로는 죽은 자를 살리는 열쇠라고 했습니다. 이 말에 근거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증거가 되는 셈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시는 일을 통해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라는 말로 살리셨고(막5:35-43), 나인성 과부의 아들의 장래 행렬을 멈추시게 하시고(눅7:12-15) 그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또한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나사로를 살려 주셨습니다(요11:39-44).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살려 일으켜 주심같이 자신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자신과 하나님이 본질과 사역에서 동일함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기가 원하는 자’를 살려주신다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선택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베데스다의 수많은 환자들 중에 38년 된 병자만을 고치셨습니다. 수많은 무덤 속 시체들 중에 나사로만을 살리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당신께서 선택하신 자만을 구원해 내신 것입니다. 이 은혜 안에 있다는 것에 무한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리시는 이야기를 하시다가 심판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를 전환하셨습니다. 사실 살리시는 것과 심판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구원과 심판은 하나인 것입니다.
일단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독단적으로 행하시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함께 행하셨습니다. 이처럼 심판도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데 이를 본문에서는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맡기셨다는 말은 “디도비”라는 헬라어인데 이는 완료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장차 되어 질 일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랍비들은 세상의 심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를 아들에게 맡기셨다고 하심으로 생명을 구원하는 일 뿐 아니라 심판의 일까지도 자신에게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심판의 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5장에서 예수님은 인을 뗄 자로 등장하시며(5:9) 인을 떼기 시작하시면서 심판을 진행하시는 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계6:1). 또한 19장 11절에서는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23절과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아니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렇게 심판을 아들에게 맡기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아버지를 공경함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하늘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심판주로 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예수님에 대해 빌립보서 2장 10절로11절에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주로 이미 공경을 받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을 얻는 것이나 심판을 받는 것이나 그 시작이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 48절은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내가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심판의 기준은 믿었느냐 믿지 아니하였느냐 입니다.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죽이셨고 그로 말미암아 나의 모든 죄가 사하여졌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생을 얻은 자에 대해 본문에서는 한 가지를 더 말씀해 줍니다. 그것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마치 예레미야를 도왔던 바룩과 웅덩이에서 예레미야를 건져준 구스인 에벳멜렉의 생명을 바벨론이 성을 함락하며 사람들을 죽일 때 건져주신 것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노략물을 얻은 것처럼 얻게 하시겠다고 한 것처럼 성도는 최후의 심판의 때에도 심판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와 홍해를 건널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른땅을 건넜지만 애굽의 군사들은 수장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종말의 때에 성도는 알곡으로 먼저 추수되어 천국에 이르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포도주를 밟듯이 심판을 받게 됨을 말씀했습니다. 에스겔 9장에서도 요한계시록 7장과 14장에서도 이마에 인을 친 자들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한 것이 성도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고 하신 말씀의 증거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1절과 2절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본문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옮겼다는 말은 헬라어로 “에타바이노”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장소를 옮기는 것 뿐 아니라 상태의 전환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즉,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기는 것 정도가 아니라 죽었던 존재에서 생명 있는 존재로의 전환인 것입니다. 세상과 짝하던 사람이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돈과 쾌락이면 죽을 줄 모르고 달려들던 사람이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장 3절은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2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은 육신이 죽은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죽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고 합니다. 여기서 아들의 음성은 곧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들어야하는 이유는 이 말씀을 들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그 때를 말씀합니다. 그것은 본문에서는 “이 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때란 본문에서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고 있는 현재의 때를 말합니다. 이는 사마리아여인과의 하던 대화와 같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도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라고 하시면서 당신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며, 당신이 예배의 대상이며, 당신이 심판의 주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이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해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영혼들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4절은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하였고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하나님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생명이십니다. 그리고 그 생명을 피조물에게 부여해 주셔서 살게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드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살게 하셨습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을 에스골골짜리고 데리고 사셔서 마른 뼈만 있는 곳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명하여 뼈와 살이 있게 한 후에 그 속에 생기를 불어 넣어 큰 군대가 되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부활 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생수의 근원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초막절 끝날 사람들 앞에서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라고 하심으로 당신이 생수의 근원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아니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심판의 권한을 주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심판의 권한을 주신 이유에 대해 본 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인자됨으로”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인자됨”이란 말은 헬라어로 “호티 안드로푸에스텐”이란 말입니다. 이를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에”라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심판의 권한을 받게 된 것은 “인자됨”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는 죄 없는 인간으로 오셔야 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인데 그 사망을 대신할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죄인을 대신 할 수 없고 죄 없는 자가 대신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이유에 대해 히브리서 2장 14절과 15절은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친히 하늘보좌 버리시고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고 나아가 심판의 권세를 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으로 심판하십니다. 조금 전에도 25절에서 말씀 드렸듯이 “듣는 자”는 살아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심판하셨듯이 지금 성도들도 주와 함께 말씀으로 이 땅을 심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복음은 전함으로 생명도 심판도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권세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8절과 2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지금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으로 모두 놀라고 있는데 예수님은 20절에서는 더 큰일을 보겠다고 하셨고 본문에서는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더 놀라운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덤에 있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덤에 있는 자들은 육신이 죽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옥에 있는 영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벧전3:19). 그들의 불신앙을 결과가 영원한 지옥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백성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후의 심판의 때가 오면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선한 일과 악한 일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선한 일은 24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반대로 악한 일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모든 죄가 사라졌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선한 것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믿지 않으므로 그 사람의 죄악이 그대로 있기에 악한 일을 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7장을 보면 구원받은 허다한 무리들의 자격에 대해 말하기를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빤 자”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가랴서에서 여수아가 온통 더러운 죄를 지어 옷이 더러워졌을 때 그래서 사탄에게 참소를 당할 때 하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 옷을 벗기고 새 옷을 입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선한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어 생명의 부활을 얻은 자들은 요한계시록 20장 14절의 말씀처럼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라고 한 것과는 달리 둘째사망을 당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둘째 사망이란
영원한 지옥의 형벌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여 저들도 심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