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에 대한 증언
요한복음 5장 31-47절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병자를 고치신 후 심판에 대해 말씀하셨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을 더 보완하시기 위해 당신이 하시는 언행이 허황된 것이 아니라 근거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본문은 증언이라고 했는데 특별히 본문에서는 네 가지 증언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 네 가지는 세례 요한의 증언, 예수님의 역사, 하나님의 직접적 증언, 그리고 말씀의 증언입니다. 이렇게 당신의 언행의 객관적 증거를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믿고 당신께 나오는 자만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영생을 주시는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아버지와 동등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듣고 있는 자들이 예수님께서 자신에 대하여 하는 증거가 증거로서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법정에서 어떤 증거가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스스로에 대해 증언하는 것은 합당한 증거가 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참되지 않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참되지 않다는 뜻은 “합당하지 않다” “정당하지 않다”는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신에 대한 자신의 증언이 참되지 않다는 뜻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두 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그 증거가 정당한데 자신의 증언이 두 명 이상의 증언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위한 자신의 증언이 참되지 않다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이제 유대인들이 원하는 증인의 수, 객관적인 증언들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러기에 32절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32절에서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다고 했는데 여기서 ‘증언하시는 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르튀레오”입니다. 이는 현재시재로 그 증거가 계속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앞으로 언급될 네 개의 증언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 증거들을 하나씩 보겠습니다.
33절부터 3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요한이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을 요한에게 집중했습니다. 그가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등장하신 후에도 세례 요한을 메시야라고 생각하고 따랐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계신 중에도 그러했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사도들의 시대에도 세례 요한의 제자들은 여전히 남아 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례 요한에게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한 말씀 중에 메시야라고 지명하신 이가 본인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증언이 첫 번째 자신을 향한 증언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세례 요한의 증언을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증언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례 요한을 거론한 목적은 청중이었던 유대인들이 증인과 증언을 보고 듣지 않고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세례 요한을 거론하는 이유에 대해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례 요한을 얼마나 좋아하고 따랐는지 하는 것에 대해 35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요한이라는 빛 안에 즐거이 있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즐거이 있기를 원했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갈리아오”라는 단어인데 이는 “기뻐 날뛰다”, “기뻐서 미칠 지경이다”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극도의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이 단어는 혼인 날 신랑이 신부를 맞을 때의 기쁨을 표현할 때나 종교적인 열정을 표현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등장에 기쁨과 흥분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기뻐했던 이유는 세례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빛을 뜻하는 단어가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마오르”라는 단어로 해와 달처럼 발광채를 의미하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오르”라는 말로 빛 자체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본문에서는 요한을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라고 한 것은 “마오르”인 것입니다. 이 의미는 요한은 빛 자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요한은 세상에 빛을 비추는 도구요 통로일 뿐 빛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오직 빛은 예수님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마오르”인 세례 요한은 “오르” 즉, 빛 자체이신 예수님의 등장으로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증언이 세례 요한의 것이었다면 두 번째는 예수님의 역사입니다.
3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말씀 하시면서 예수님의 역사하심이 당신이 메시야라고 증언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룬 역사가 자신을 증언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역사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말합니다. 가르치시고, 병을 고치시고,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성전을 정화시키셨던 일들입니다. 이 일들이 예수님께서 메시야 임을 증언한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 일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께 주셔서 이루게 하신 역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는 예수님을 증언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기적을 일으키시며 말씀을 가르치심은 그것 자체를 드러내려하심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교회 내에 많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주님의 은혜로 표적과 기사가 일어납니다. 그러한 것이 벌어짐의 목적은 예수님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욕심 많은 인간들은 그 표적만을 추구하며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이 표적을 추구할 뿐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마치 시내산에 도착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에게 자신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모세를 통해 듣게 해달라고 했던 것과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만남과 그로 인한 삶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그분이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만을 추구할 뿐입니다.
어떤 면으로는 신앙생활 중에 종교적 행위와 그것이 주는 신비적 체험이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것보다 쉽고 재미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것은 때로는 손해가 되고, 때로는 핍박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죽을 수도 있지만 개인적 신앙생활을 통한 신비적 경험은 그런 모든 어려움은 없고 오직 종교적 황홀경과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으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거룩한 삶을 살기보다는 개인적 신비체험과 종교생활을 하면서 자신은 신앙이 좋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셔서 이루게 하신 역사, 즉 신비적 사건과 표적은 그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예수님을 보게 하려는 또 다른 형태의 증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 증언은 하나님이십니다. 3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세 번째 증언은 하나님 아버지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친히 증거 하셨습니다. 마태복은 3장 17절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9장 7절에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을 때 구름이 와서 예수님을 덮으며 그 속에서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헬라인들이 명절에 올라와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가리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11:28)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님에 대해 직접 증언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도 또한 믿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했던 말도 믿지 않았고 예수님의 행하시는 역사들을 보고도 믿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말씀하시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서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그들이 믿지 않은 이유를 본문에서는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증언에도 믿지 않는 것은 ‘듣지 못하고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함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예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듣고 본다는 것은 육신의 귀와 눈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영혼의 귀와 눈입니다. 그것이 닫히면 아무도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귀와 눈이 닫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눈과 귀가 열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분이 들을 수 있는 귀와 볼 수 있는 눈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육신으로는 본적이 없지만 보게 되고 육신의 귀로는 듣지 못하였으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증언하는 네 번째는 말씀입니다.
38절과 3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을 증언하는 마지막의 것은 성경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이유가 그 속에 말씀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유대인들이 성경을 연구하면서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두 가지를 행하였습니다. 먼저는 선행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성경을 상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말씀을 어릴 적부터 연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씀이 나타내는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소스톰은 말하기를 “그들은 성경을 읽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바인 영생이나 구원을 이룰 수 있는 도구를 찾으려고만 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본질은 보지 못하고 껍데기만 본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 특별히 교인들이나 성경에 관심이 있다고 하는 자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성경 속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찾을 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예수님을 만나거나 그 분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성경 속에서 성공하는 법을 찾고, 성경 속에서 복 받는 방법을 찾고, 성경 속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을 찾으며 성경에서 위로와 격려의 말씀 등을 찾는 것으로 만족해하는 종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나 예수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들은 종교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으나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그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책이나 고전 문학을 읽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성경 읽기의 가장 중요한 핵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연구하나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기를 40절에서 “내게로 오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근본적으로 배척하기에 그 말씀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님께 나온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서였고 심지어는 예수님을 넘어뜨리고 죽일 이유를 찾기 위함이었기에 예수님을 못 만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영생을 얻지 못합니다. 반대로 예수님께 나온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지적하셨습니다.
4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예수님은 자신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영접하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도리어 다른 사람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였을 것이라고 지적하셨습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온다는 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이 바라는 방식대로 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들이 바라는 정치적 메시야, 그들이 바라는 이 땅의 것을 채워주는 메시야로 오는 자들은 영접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을 증언하는 여러 가지 증언에 대해 말했는데 그것들을 들으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틀과 바라는 방식대로의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을 믿고 그 말씀에 근거하여 신앙생활 해야 함에도 거짓 메시야를 따르고 거짓 사역자들을 따르며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객관적으로 이단이라고 정의한 종교단체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보편적인 교회라고 여겨지는 많은 교회의 강단과 가르침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주는 예수님으로 바꾸어 섬기며 따르고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방편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일 뿐이며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가장한 우상숭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나 이 땅의 교회들이 이렇게 예수님이 아닌 세상의 썩어진 것들을 따르며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이유에 대해 44절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4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그들이 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온 다른 사람을 영접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본문의 말씀처럼 ‘서로 영광을 취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을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영광을 취한다는 것은 서로 하나님이 바라는 신앙생활이나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가 아니라 인간들 서로의 종교적 만족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통해 자신들의 지적인 만족감과 칭찬을 들으려고 할 뿐 그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나 영광스러움에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말씀을 연구하는 목적이 사람들의 칭찬과 그것을 통해 연약한 사람들을 자신의 종교적 노예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성경을 연구하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분의 말씀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말씀을 최종적 심판의 도구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5절부터 47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믿지 않는 것은 성경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데 그들은 심판을 받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심판의 근거는 바로 선포된 말씀인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연구했는데 말씀을 기록한 모세도 믿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모세를 믿지 않았다는 것은 모세가 기록한 모세오경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세오경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도 믿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당신이 메시야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을 증언하는 네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요한의 증언이며, 둘째는 예수님 자신의 역사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직접적 증언이며, 마지막으로는 성경 말씀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께서 이것들 중 가장 강조한 것이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예수님에 대해 말씀하고 있으므로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나아가 이 말씀을 믿지 못하면 예수님도 믿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 말씀을 연구합시다. 연구하되 그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찾아내는 자가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성경 말씀을 통해 주시고하는 영생을 얻고 생명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