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7장 1-53(37-39)
예수님은 초막절을 앞두고 형제들과 예루살렘에 내려가는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형제들은 예수님께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자가 어디 있느냐고 하며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람들에게 보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시며 자신은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은 따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유대인의 절기인 초막절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등장에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해 졌습니다.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 사람과 백성들을 미혹하게 하는 자라고 하며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혼란한 기간을 모두 마치고 초막절의 큰 날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외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구약에서 예언했던 참 선지지라고 했지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을 듣도록 합시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파격적인 행동으로 인해 유대인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이러한 미움은 극기야 예수님을 죽이려는 마음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래서 1절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이유 때문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만 다니시고 유대지역으로는 다니려 하지 않으셨다고 요한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이 두려워 유대지역으로 다니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아직 당신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죽으시기 전까지 계속해서 말하고 있는 때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입니다. 그래서 본문 6절도 8절도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때를 생각하신 것은 아직 전해야 할 복음과 제자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도 그 때를 준비하며 사셨다면 지금도 주님은 다시 오실 때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당장 오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아직 재림하시지 않는 이유는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때는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고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맡겨주신 영혼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찾을 때까지인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유대인의 중요한 절기인 초막절이 다 되어갔습니다. 이에 형제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형제들이 이렇게 말함은 형제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의 눈에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원하는 자로 보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을 버려 영혼들을 구원하려는 것이 목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들은 그렇게 오해 한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스승이신 예수님의 절대적인 의도인 영혼구원에만 관심이 가져야 함에도 자신을 높이고 영화롭게 되는 것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추구하는 이들이 많음을 봅니다. 이러한 모습은 주께서 원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나타나심은 당신의 나타나심을 통해 당신에게 나아온 자들이 영혼의 구원을 얻기를 원하셨던 것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6장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임금 삼으려하자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산으로 가셨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기를 원하고 높임받기를 원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따르는 이 땅의 모든 성도, 즉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셨던 낮고 천한 길, 섬기고 낮아지는 삶,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께서 가셨던 영문 밖으로 기꺼이 나아가는 사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대화가 시작된 이유가 유대인의 절기인 초막절이 가까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 가지 중요한 절기를 지켰습니다. 유월절 또는 무교절, 맥추절 또는 오순절, 초막절 또는 수장절이라는 절기였습니다. 거기에 에스더 사건을 계기로 부림절을 지켰고 헬라의 셀류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해 오염되었던 성전이 마카비혁명을 통해 정화되었던 사건을 기념하며 지켰던 수전절이 있었습니다.
이 중에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었던 절기는 바로 초막절입니다. 이 초막절은 현대교회의 추수감사절에 해당되는 절기입니다. 초막절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3대 절기는 모두 농사와도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은 첫 보리를 추수하여 드리는 절기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유월절은 1월 14일에 지키고 그 다음날인 15일부터 7일간 무교절을 지키게 되는데 이 무교절의 첫날을 초실절 또는 요제절이라 하여 첫 번째로 추수한 보리를 새벽에 드리게 됩니다.
이 때부터 보리를 계속해서 추수하고 오십일 후인 맥추절이 되면 보리는 모두 추수가 끝나고 밀 추수가 한창 진행됩니다. 이 오순절이 처음 시작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시내산에 도착한 때가 오십일 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이 절기가 농사와 관련하여 추수의 절정에 이르게 되는 때인데 이것이 신약에 와서는 성령강림절이 되어 영혼들을 본격적으로 추수하게 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리고 7월 15일이 되면 초막절을 지키게 됩니다. 이 절기를 농사와 관련하여 말할 때는 수장절이라 하여 모든 추수를 끝내고 창고에 들인 후에 드리는 절기인 것입니다.
이 절기들을 농사와 관련하여 다시 정리하면 유월절에 보리를 첫 추수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맥추절에 밭에서 나는 작물들의 추수가 절정에 이르고 포도와 올리브 등의 과일들까지 모두 추수하여 창고에 들인 후에 지키는 절기가 수장절 즉, 초막절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초막절의 특색은 포도원 무도회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막절에 포도원에 모여 풍성하게 수확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포도원에서 무도회를 가졌습니다. 사사기에 이 축제가 등장합니다. 사사기 21장에 보면 베냐민 지파가 다른 지파들과의 전쟁에서 모두 죽고 600명만 남았을 때 그 중에 400명은 길르앗에서 시집 안간 여인들을 잡아다가 결혼을 시켰고 200명은 포도원 무도회에서 무도회에 참석했던 여인들 중 200명을 납치해서 결혼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러한 축제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더 보편화되고 예루살렘에서 축제로 정착했습니다. 이처럼 유대인들이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순례하여 축제에 참가하는 사실은 장차 모든 민족과 나라 중에서 당신의 백성들이 모여 구원에 참여하게 될 것을 예표 하는 절기로 발전했습니다(슥14:16).
이 초막절은 7일간 지켰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7일간 거하게 될 초막을 지었습니다. 이 초막을 지을 때 주의 사항은 벽면은 무엇으로 해도 괜찮지만 천정은 나뭇잎과 풀로 하되 엉성하게 하여 하늘이 보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살던 것을 기억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풍성한 계절에 가장 어려웠던 광야와 그 곳에서 돌보아주셨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초막을 만들고 7일을 거하는 동안 종려나무 가지들을 묶어 기쁨의 상징인 “룰라브”라는 축제의 장식물을 만들어 매일 “할렐”인 시편 113편부터 118까지 부르는 동안 휴대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시편 118편 1절 초두인 “여호와께 감사하라”라는 구절을 낭독할 때마다 이 종려나무를 높이 흔들어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을 표시하였습니다.
또한 밤마다 거행되는 촛불 축제가 벌어졌습니다. 제사장들은 초막절 기간 내내 매일 저녁마다 일곱 갈래로 뻗은 4개의 커다란 촛대에 불을 붙여 성전의 전 지역을 밝게 비추게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조상이 광야에서 방황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밤중에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구원의 은혜를 기념하고 이를 즐거워하는 의식이었습니다. 이 때 순례자들은 피리 곡조에 맞추어 횃불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축제는 밤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 동쪽 문에서 거행되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표현하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이 의식은 초막절 기간 동안 제사장들은 새벽마다 동쪽 문으로 가서 해가 뜨는 순간에 성전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서쪽을 향해 서서 다음과 같이 간절한 마음으로 구절을 낭송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 태양에 경배했지만(겔 8:16), 우리의 얼굴은 주께로 향하여 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렇게 외치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는 원인 중의 하나가 젊은이들이 성전을 등지고 태양신을 섬겼었는데 이것을 기억하며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과 관련된 하나의 행사가 더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일 아침에 드려지는 헌수식이었습니다. 초막절 기간 동안 제사장들은 매일 아침마다 줄을 지어 성전에서부터 실로암 못까지 행진하였으며 실로암에서 황금항아리에 물을 담아 제단으로 가져왔습니다. 이 때 백성들은 그 행렬을 따르면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물은 제단으로 가져와 제단을 한 바퀴 돌고 제단에 부어드렸습니다.
이렇게 제단을 돌 때 제단에는 평소에 없던 것이 하나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줄기에서 꺾이면 곧 바로 시들기 시작하는 특징을 가진 버드나무 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버드나무 가지를 세워놓은 제단을 실로암에서 길러온 물을 가지고 돌고 백성들은 호산나를 외쳤는데 이렇게 하는 이유는 첫 번째로 광야에서 갈증에 시달릴 때 호렙산 반석에서 물을 내어 먹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버드나무 가지처럼 자신들의 목마름을 해갈시켜 달라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초막절이 지나면 오랜 건기가 끝나고 농사철이 시작되는데 이 때 비를 풍성하게 주셔서 농사가 잘 되게 해 달라는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은 동생들을 올려 보낸 후에 나중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형제들이 올라가야 한다고 할 때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나는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8)”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셨던 주님은 10절에 보면 뒤에 따라 올라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올라가셔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율법논쟁을 벌이고 죽이고자 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을 보고 말씀을 듣고서 예수님을 믿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주님께서 명절의 마지막 날에 사람들 앞에서 서서 외치시는 일이 있었습니다.
37절과 3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사람들은 실로암에서 떠온 물을 따르면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우리가 들은 이 호산나 외침이 익숙한 때와 장소는 예수님께서 나귀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입니다.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예수님을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바닥에 깔고 겉옷을 바닥에 펴며 외치기를 ‘호산나’라고 했었습니다. ‘호산나’라는 단어의 뜻은 ‘구하옵나니 우리를 구원하소서’입니다. 이렇게 유월절 어린양으로 입성하셨던 예수님께 사용되었던 이 ‘호산나’라는 말은 원래 초막절에 사용되었던 말인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백성은 건기를 마치고 우기가 시작 될 때 바짝 말라 먼지를 날리는 자신들의 밭에 비를 내려 달라는 말로 ‘호산나’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 건조함 속에 비를 내리셔서 우리를 구원해 달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렇게 호산나 행렬의 마지막에 제단에 물을 부었습니다. 그 제단에는 매일 아침마다 꺾어다 놓은 버드나무가 말라가고 있었는데 그 버드나무는 자신들의 땅과 삶에 물이 없어 말라가고 있는 현실을 상징합니다. 그와 같은 자신들에게 물을 주셔서 구원해 달라고 하는 기도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렇게 7일 동안 행사를 한 후에 마지막 8일째가 되면 잔치가 벌어집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8일은 축제의 날입니다. 이 팔일은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로 표현되어 예수님께서 부활의 날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이 8일째를 오늘 본문에서는 큰 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날에 예수님은 사람들 가운데 서서 외치시기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절기 마지막 날에 외치신 말씀은 몇 가지 의의를 갖습니다.
먼저는 자신의 목마름을 인식하는 자들을 향한 외침인 것입니다. 본문에서 유대인들이라고 칭함을 얻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들은 영적인 목마름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 사회적 기득권으로 만족하며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자체로 만족한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종교적 선입관을 버리고 구약에서 예표 한 메시야를 기다리며 예수님의 행하심과 말씀하심에 영향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온 모든 자들은 목마른 자인 것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보면 이 목마른 자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6장에서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6:39)이며 들을 귀가 있는 자이며 창세전부터 택하심을 입은 자인 것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육신의 것에 목마름을 날마다 느껴 이 땅의 것들을 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채우지만 채워지지 않음을 느끼지만 그 채워지지 않는 원인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그것을 위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의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그것을 무엇으로 채워하는지를 아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들은 목마른 자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켜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 초반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생의 목마름을 세상 것으로는 해결하지 못함을 아는 자인 것입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는 평소에는 알지 못하나 인생에 기근이 닥쳤을 때는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아닌 사람은 인생의 기근을 만나며 그것을 해결하려고 세상으로 나가고 성도는 그것은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 그 동안 멀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더 밀접하게 하는데 힘을 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온 자들에게 주님은 약속을 주고 계십니다. 그것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온 자 속에서 생수가 넘치기 위해서는 그 속에 생수가 채워져야 한다는 전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 속에 생수가 근본적으로 공급되지 않고서는 그 속에서 생수가 흘러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속에 생수를 채운다는 것은 무슨 말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39절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3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생수가 공급된다는 말은 믿는 것이고 믿는 것은 성령이 주입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 속에서 생수가 흘러넘치기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령을 성경은 말하기를 “예수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고 요한복음 14장에서는 “다른 보혜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수가 넘친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과 그 성령이 주실 그리스도의 생명력이 넘칠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다 제단에 부었던 실로암의 물은 바로 자신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로암이란 말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보내심을 받은 자였습니다. 매번 제단에 붓는 물이 이스라엘의 기근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기근과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는 분임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1장에서는 말씀으로 오신 주님을 말씀하고 있다면, 2장 가나혼인 잔치 사건을 통해서는 창조자이신 주님과 성전정결 사건을 통해 성전의 주인이신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서는 당신을 영생을 주시기 위해 대속해 주시는 분으로 나타내셨고, 4장 사마리아여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는 당신이 예배를 받으실 분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5장 데베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주님은 자신은 생명의 주인임을 말씀하셨고, 6장 벳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 표적을 통해서는 당신이 생명의 떡이심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통해서는 당신이 생수의 근원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생수의 근원이십니다. 구약에서 이미 수도 없이 예표 했습니다. 예레미야서 2장에서는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시면서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렸다”고 하셨고 에스겔서와 스가랴서에서는 성전에서 흐르는 물을 말씀하시면서 그 물이 모든 생명을 살릴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세상에 다니며 그것들이 목마름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오직 예수님께 나아가 영혼의 만족함을 얻고 그 은혜가 넘쳐 주변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