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 1-7절 이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by 하림 posted Jun 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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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요한복음 91-41(1-7)

 

예수님과 제자들은 길을 가시다가 맹인 한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날 때부터 맹인이었는데 제자들은 그가 보지 못하게 된 이유가 자신의 죄 때문인지 부모의 죄 때문인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누구의 죄 때문도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지금은 낮이고 당신은 빛이시므로 우리가 이 일을 하여야 한다고 하시며 땅에 침을 뱉으시고 흙을 이겨 맹인의 눈에 발라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맹인은 순종하여 실로암까지 가서 그의 눈을 씻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눈이 떠져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었던 날이 안식일이었고 그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공격하려했습니다. 눈을 뜬 사람과 부모까지 불러 꼬투리를 잡으려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고 도리어 맹인으로부터 너희도 그의 제자가 되려느냐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눈을 뜬 사람을 쫓겨났고 그가 쫓겨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그에게 찾아가 만나주심으로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맹인을 만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맹인에 대해 설명해 주기를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이라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의 주요 분파들은 인간의 운명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달랐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모든 것이 예정되어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인간의 의지적인 결단에 의해서 결정되기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엣세네파는 모든 것이 하나님에 의해 예정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면에 사두개파는 인간의 일에는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바리새파와 엣세내파의 영향을 많이 받고 살던 때였기에 본문에 등장하는 맹인에 대한 생각도 그들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기에 사람들의 생각에 그는 저주를 받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병들거나 가난한 것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본문의 이 사람은 엄청난 죄를 지은 사람으로 취급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땅의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맹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는 맹인인 것입니다. 민족과 나라마다 종교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신을 찾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 알 수 있는 사람도 없고 그런 종교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맹인인 자연인에게 은혜를 주셔서 눈을 뜨게 해 주셔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1절은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한 것입니다.

 

또한 본 절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의 질문은 이 땅에서 우리가 살면서 당하는 어려움과 고난에 대한 우리 자신의 질문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현재 당하는 어려움과 환란의 원인을 환란당하는 자나 그의 가족에서 찾으려는 우리들의 좁은 소견을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군가 환란을 당하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욥기가 그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욥이 환란을 당하게 된 원인은 달리 있음에도 욥이 당하는 환란이라는 결과를 보니 원인인 죄가 있다고 말하던 욥의 친구들처럼 이 시대의 사람들도 타인의 고통과 어려움에 대해 원인들을 찾아내 많은 말들을 만들어 내고 그 말에 근거해 처방까지 내려주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제자들이 기대하고 현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했고 답이라고 여겼던 대답이 아닌 다른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 사람의 오랜 환란의 이유를 사람에게서 찾지 않으셨습니다.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맹인에게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주님은 말씀하기를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함이라는 말씀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말씀은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맹인을 고쳐주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 결과적으로 맹인도 구원을 얻지만 그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줌으로 그들도 빛이신 예수님께서 나아오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욥기를 보면 욥의 세 명의 친구들과 젊은이 엘리후의 여러 번의 변론의 결과는 무승부였습니다. 욥이나 친구들이나 젊은이는 서로 이긴 것이 없습니다. 모두 졌습니다. 욥기 후반을 보면 하나님께서 욥과 그의 친구들의 무지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고난의 원인을 논하고 하나님의 뜻을 논했던 그들의 무지가 책망을 받고 욥은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떠들었던 자신의 무지를 회개하였습니다. 욥의 결론부는 하나님께서 막연히 신앙 생활하던 욥을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처럼 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함이었습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 인간을 환란가운데 몰아넣으신 후에 그를 건져내시면서 자신은 영광 받으시는 분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당하는 고난 즉, 질병과 장애, 사고와 실패, 장애와 죽음은 아담의 범죄 후에 온 원죄에 따른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건 짓지 않았건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밤과 낮, 추위와 더위,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태어남과 죽음, 병 걸림과 치유 등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 가운데 집어넣은 것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인간이 짊어지고 가야하는 형벌이었습니다. 이런 인간의 저주에서 하나님께서 건지신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것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오늘 제목이 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본문에서 주님은 때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기를 아직 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이 오겠다고 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낮은 무엇이고 밤은 무엇일까요? 여기서 낮은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밤은 아주 짧은 시간을 의미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시지 않는 기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부터 성령이 임하시기 전까지의 기간이 밤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밤에는 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절을 읽고 본문의 말씀을 다시 생각하겠습니다.

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께서 아직 낮이라고 하신 이유는 빛이신 당신이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밤일까요? 낮일까요? 지금은 낮입니다. 예수님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안에서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고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엘서 2장은 성령이 임한 증거를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2:30)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피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받은 것처럼 주께서 구원해 주심을 의미하고 불과 연기 기둥은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인도해 주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부터 16장까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셨을 때도 동일하게 역사해 주실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낮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인 지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밤은 종말의 때인 것입니다. 그 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일하는 주체를 너희라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라고 했다는 말씀에 주의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만 일을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주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무엇일까요?

6절과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주님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발라 주신 후에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침이나 진흙이 의미하는 바는 저주입니다. 침을 뱉는 행위도 저주하는 행위였고 흙도 아담이 범죄 함으로 땅이 저주를 받아 엉겅퀴를 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그도 또한 저주 가운데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주받은 흙에 침이라는 저주를 더해 그의 눈에 바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저주를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실로암이란 히스기야가 앗수르에 대항하기위해 성 밖에 있는 기혼 샘은 막아 버리고 성안으로 물길을 파 성안에 만든 못이었습니다. 이 못의 이름이 실로암인데 그 뜻은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 실로암은 바로 예수님을 의미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맹인의 저주를 풀어주는 이는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씻는 물은 생수이신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 저주를 씻는 자임을 알려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 맹인은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마다 모두 나음을 입는 것입니다. 닫혔던 눈이 열려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병들었던 심령이 나음을 입고 삶이 고침을 받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예수님과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으로 인해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13절과 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여기서 그들이란 맹인이 눈을 뜬 것을 본 자들입니다. 그들은 그가 어떻게 눈을 떴는지 들었음에도 예수님께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나아가 자신들의 문제를 내놓거나 구세주로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반응은 맹인이었다가 보게 된 자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너무 놀라서 예수님께서 메시야가 아닌가 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그 답은 우리가 읽은 14절에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한 날이 바로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을 찾아 간 이유는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을 고발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들은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서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그것은 그가 맹인의 눈을 뜨게 한 것을 보니 선지자라는 자도 있었고 선지자가 안식일을 범하느냐는 이유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라 아니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자에게 너도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그는 대답하기를 선지자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의 대답과 그가 눈을 떴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의 부모를 불러 그가 날 때부터 맹인이었는지 그가 어떻게 낫게 되었는지 등을 묻고 대답을 들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한 것을 믿을 수 없어 맹인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부인하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인정하는 말을 하게하고 있습니다.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얼마나 이상합니까? 예수님은 인정할 수 없지만 벌어진 일은 부인 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이러한 강퍅함 때문에 주님은 요한복음 1038절에서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정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그들에게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사람은 말하기를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바리새인들의 협박과 예수님을 믿으면 출교시키기로 결정된 것을 알고 있음에도 예수님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인정한 눈을 뜬 자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는 바리새인들의 대화는 이후에도 동일하게 계속되었습니다. 결국은 화가 난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자를 쫓아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화를 표출하고 동시에 자신들도 나타난 표적을 부인할 수 없음을 인정한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에게 쫓겨난 사람을 예수님을 찾아가 만나셨습니다.

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예수님은 그를 만나셔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육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는 그의 시력이 아니라 시각을 바꿔주고자 하셨습니다. 눈을 뜨게 한 표적을 나타내신 것은 그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해 보는 정도라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시력만 회복하고 싶어 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문제의 해결만을 바란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문제만 해결되면 더는 바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들이 그 정도에서 멈추는 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을 건지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심으로 예수님을 향한 우리들의 시각이 바뀌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의 질문처럼 네가 믿느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통해 당신을 믿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바람은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는 질문으로 주어졌고 그의 대답은 결론적으로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결과인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교인들에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는 것입니다. 맹인이었다가 눈을 뜬 이 사람의 변화의 과정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켜야 하고 발전시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처음에는 그 사람’(11)이라고 했었고, 다음에는 선지자’(17)라고 했으며, 그 다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33)이라고 했으며 마지막으로는 주님’(38)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입고 나서부터 예수님에 대한 시각이 점진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사는 자인 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이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입니다.

이렇게 시각이 바뀌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게 된 우리들은 주님과 함께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복음증거입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을 통해 아직 눈을 뜨지 못한 자들의 눈을 뜨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예수님, 우리가 보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저들도 보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들이 해야 하는 주의 일은 육신의 눈을 뜨게 해주는 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구제하고 봉사하는 삶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어려운 사람들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는 일이라면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시각을 바꾸는 일인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게 하고 저들도 영원한 천국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예수님과 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