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요한복음 10장 1-21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죄을 말할 때 구약성경은 거짓목자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먹일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배만 불렸습니다. 양으로부터 나오는 부산물에만 관심이 있을 뿐 진정으로 양의 생명이나 행복은 생각하지 않은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가리켜 ‘거짓 목자’, ‘삯꾼 목자’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지도자들도 그러했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은 그들이 돌보아야 할 백성들의 삶과 신앙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배만을 위했고 종교적 행위를 통해 자신들이 얻을 유익과 존경만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때 예수님은 오늘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먼저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예수님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에 대해 절도며 강도라고 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비롯한 중동의 여러 국가들은 여전히 성경시대의 모습으로 양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통상 베두인이라고 하는데 그들은 발달된 도시 생활을 따르기보다는 그들의 조상들로부터 이어져 온 목축과 그 생활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낮에는 들판에서 양을 치다가 밤이 되면 동굴이나 임시로 만든 울타리 안으로 양들을 몰아넣습니다. 그 이유는 양들을 해치는 짐승들이 많고 밤 기온이 차기 때문입니다. 이 때 목자는 우리의 입구에 자리를 잡고 잠을 자게 됩니다. 그렇게 함으로 양떼들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기도 하고 해로운 짐승들이 양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게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문을 목자가 지키기에 절도나 강도는 문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의 목적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양을 도적질해 가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양의 우리에 넘어 들어가는 자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는 당시 종교지도라고 하는 자들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 그리고 서기관들의 행태가 진정으로 양떼를 위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들어가는 자들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반대의 사람인 선한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문을 지키고 있는 목자를 가리키는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이렇게 들어간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부터 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목자는 우리에서 양을 불러낸다고 하고 있습니다. 양은 시력도 나쁘고, 방어력도 없고, 방향 감각도 없고, 잘 속고, 잘 넘어지는 동물입니다. 그래서 양은 목자가 없으면 살 수가 없는 동물입니다. 특별히 시력이 아주 나쁜데 양의 시력을 인간의 시력에 빗대어 말한다면, 양은 마이너스 10 디옵터 정도로 안경을 써야할 만큼 시력이 나쁘다고 합니다. 1-2m 앞에 있는 사물도 분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력이 약한 반면 탁월하게 좋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양의 청력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발달되었습니다. 양들이 무리지어 이동할 때 계속해서 울음소리를 내고 가장 우두머리 양의 목에 종을 달아 놓는데 이는 무리에게 보내는 신호입니다. 이렇게 탁월한 청력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는 목자는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낸다고 하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온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러서 다 내어놓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내놓다”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크발로”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밖으로”라는 “에크”와 “던지다”라는 뜻의 “발로”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니까 “에크발로”는 직역하면 “밖으로 던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쫓아내다, 몰아내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이미 9장34절에서 한번 쓰였습니다. 소경이었던 사람이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내쫓김을 당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기득권을 위하여 소경이었던 사람을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선한목자는 양들을 먹이고 돌보기 위해 강제로 내놓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이 게으르고 혼자서는 올바른 방향을 찾지 못하기에 목자는 종종 양에게 강제력을 동원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의 게으름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강권적인 역사로 우리의 삶을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 이끄심이 때로는 고달프고 힘들어도 그 목적이 양인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고 있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사실 이 강제적 이끄심은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시작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찾을 수도 없었던 우리들의 영적 죽음과 무능력으로 인해 주께서 세상으로부터 끄집어내고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강제로 내놓음을 입은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라는 단어가 “에클레시아”입니다. 밖으로 불러냄을 입은 자들의 모임인 것입니다. 그리니까 세상으로부터 에크발로, 쫓겨난 사람들의 모임이 에클레시아, 교회인 것입니다.
양의 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양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은 놀라서 도망을 치게 됩니다. 그래서 본문 5절에서도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양들의 예민한 청각과 두려움 많은 특징은 자신의 목자의 음성이 아니면 자신을 해하려는 줄 알고 흩어지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바리새인을 대표로한 종교지도자들의 음성은 목자의 음성이 아니므로 양들이 흩어졌고 반면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온 백성들의 반응은 목자의 음성이었기에 그것을 듣고 따르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지만 사람들은 이 말씀이 무엇 뜻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7절부터 9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주님은 당신을 가리켜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문화적 배경이 있습니다. 양들이 우리에서 나올 때나 들어갈 때 목자는 양 우리의 문을 지켰습니다. 나올 때는 이름을 하나씩 불렀고 들어갈 때는 문에 서서 밖에서 하루 종일 풀을 뜯었던 양의 피부와 건강 상태를 살피며 들여보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양의 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목자보다 누군가 먼저 와서 양들을 들여보내려고 해도 양들은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목소리를 양들이 알뿐 아니라 그에게로 나아가는 양들은 위험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가리켜 절도며 강도라고 한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은 양의 문이십니다.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지 않고 넘어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절도며 강도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하면서 주님의 “양의 우리”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양의 우리인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강도 같은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문”이심은 7절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라고 하셨습니다. 9절에도 “내가 문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을 문이라고 하실 때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문이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주님께 속한 양들의 유일한 문이십니다. 양이 생명을 얻고 풍성함을 누리는 길은 유일한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다른 길로 가려고 한다면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지 다른 길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도 자신들의 종교적 열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 드나드는 양만이 구원의 꼴을 얻고 풍성하게 얻는 것입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9절의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구원이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1-12절에도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25-29절에도 명확히 밝히십니다. 자신의 음성을 듣는 자신의 양에게 영원히 멸망치 아니하는 영생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28-29절을 봅시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아담 안에 태어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육신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고 유한합니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음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또한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은 예수님 밖에 있는 모든 영혼이 죽어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이 없는 인간들은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말씀하신 대로 영적으로 죽은 시체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이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육신의 죽음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사람은 다 태어나지만 누구나, 예외 없이 죽어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죽음 가운데 있는 인간들을 위해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이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더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더 풍성하게 된다는 말씀은 구원 받은 백성, 즉 생명을 얻은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풍성함”은 이 땅의 것의 풍성함을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 믿으면 사업이 잘되고 부자가 되고 높은 지위에 오르며 자녀들이 공부 잘하고 일류대학에 가는 그런 풍성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풍성함은 앞에서 말한 영적인 생명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은 삶의 모든 형편과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동행하심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난이건 실패의 순간이건 간에 그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한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한 이유를 이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인 이유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행위 대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버리겠다는 표현을 15절에서도, 17절에서도, 18절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이 일을 이렇게 거듭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신의 대속적 죽음을 예고하실 뿐 아니라 그렇게 하실 정도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줄 정도로 양떼를 사랑하시고 계심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이 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시면서 그렇지 못한 당시의 지도자들을 비유하여 삯꾼 목자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2절과 1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예수님은 당신을 선한목자라고 하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삯꾼 목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삯꾼목자라고 한 것은 양들의 생명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생명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면 삯꾼 목자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양들의 목숨을 버리는 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양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것은 그 양들이 자신의 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나 선하신 목자인지 마태복음 18장과 누가복음 15장은 이러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목자에게 양 일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떼를 우리에 넣어두고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와 잔치를 버렸습니다. 당시 목자들은 양을 맡아 키울 때 양의 주인과 양의 20%는 잃어버리거나 짐승에게 잡혀 먹혀도 손해를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계약을 하였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일백 마리 중에 한 마리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선한 목자는 그 양을 위해 위험을 무릎 쓴 것입니다.
반면 악한 목자인 삯꾼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스가랴는 스가랴서 11장에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세 명의 목자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양의 판자, 양의 산자, 양을 맡아 돌보는 자입니다. 그들은 모두 양의 목숨과 행복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오직 한 가지 목적은 돈이었습니다. 양을 판자도, 산자도, 그것은 맡아 키우는 자도 오직 돈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삯꾼이라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다른 방법은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거두어 달라고 했지만 오직 방법은 당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 밖에는 없기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 안에 있는 생명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면서 또 한 가지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직 구원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주님은 계속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한 영혼을 찾을 때까지 찾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쉼 없이 일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서 이 일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는 죽으심에 있지 않습니다. 그 죽음이 가치 있는 것은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주님 안에 있는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더 이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은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목숨을 버리는 이유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각각 부르셔서 생명을 얻게 하셨고 풍성히 얻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선하신 목자의 인도를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