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요한복음 11장 1-57
예수님께서 요단강 동편 베다니에 계실 때 요단 서편의 베다니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가 병들었으므로 오셔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곧 가지 않으시고 이틀을 더 있으시다가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셨을 때는 나사로가 죽은지 이미 나흘이 지난 후였습니다. 이에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셨더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 하였으나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에 예수님은 무덤 문을 열고 죽은 나사로에게 나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 명령을 들은 나사로는 살아서 걸어 나왔습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으나 여전히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어떤 병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자매 마르다의 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본문을 어떤 병자가 있다고 시작하면서 그의 가족과 이름을 밝혀 주는데 우리에게 익숙한 가족들입니다. 바로 마리아의 가족입니다. 그 중에 그의 오빠 나사로가 병이 들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병든 나사로의 가족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가족이었습니다. 그 증거는 본문에 있는데 나사로가 병이 들어 위급한 상황이 되었으므로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내었는데 보냄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하지 않고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사랑했다는 헬라어는 “필레이스”라는 단어로 형제사랑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나사로를 형제처럼 사랑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예수님께서 정말로 그를 그렇게 사랑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5절에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사랑했다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습니다. 이 때 사랑했다고 하는 단어는 “애가파”라는 단어인데 “아가페”의 미완료형입니다. 이 말은 이 사건 전부터 사랑했고 이 사건이 있던 지금도 계속해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병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고 말한 것은 지체하지 말고 빨리 가 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서둘러 가실 줄 알았습니다. 사랑하시는 자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4절부터 6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은 6절을 보면 그곳에서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이틀을 더 유하셨던 것이 얼마나 이상했는지를 표현해주는 그것은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가족을 사랑하셨는데 이틀을 더 유하였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한다와 어울리는 말은 속히 찾아가셨다 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하셨는데 이틀을 더 유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틀을 더 유하셨는지 정확하게는 모릅니다. 일부러 나사로가 죽고 그의 시체가 썩기를 기다리신 것인지 그곳에서 급하게 하셔야 할 일이 있으셨는지는 본문에서 밝혀주고 있지 않아서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의 생명이 촉각을 다투는 상황임을 생각하면 예수님의 이런 반응은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중을 본문을 통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사로의 병이 죽을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죽을병이 아니라고 한 것은 그 병이 감기 앓다가 툭툭 털고 일어나듯 쉽게 날 병이라거나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은 죽으나 다시 살 것을 의미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도리어 육체의 죽음은 잠시 잠을 자는 것과 같은 것임을 모두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의미가 그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이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영광을 얻으려 함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과 동일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나사로의 병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 통로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또 한 군데 더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 3절을 보면 주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되었던 자를 가리켜 누구의 죄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요한은 인간의 고통과 삶의 절망 속에서도 오직 한 가지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자신은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당해도 주어진 아픔으로 인해 절름거리면서 인생을 살아도 그 모든 것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사도들 중 가장 늦게까지 살면서 수많은 환란을 당했으나 그것에 절망하거나 주를 부인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 뿐 아니라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도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라고 고린도교인들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틀이 지난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에게 가자고 하셨습니다.
7절과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제자들의 반응입니다. 그것은 가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제자들이 본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방금이란 10장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자신들이 베다니에 온 것이 유대인들이 돌려 치려했었기 때문인 것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으로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불안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가자고 하실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실 뿐 아니라 이틀이나 더 머물러 계셨기에 한편으로는 마음을 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곳으로 다시 가자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이틀을 더 유하셨던 것은 제자들의 반응도 보고 싶어 하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그것은 유대로 돌아가면 돌에 맞을 수도 있지만 제자들이 나사로의 생명을 귀하게 여겨 가자고 하기를 기다리셨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자고 하는 말은 고사하고 가자고 하니 돌에 맞을 수도 있으니 가지 말자고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이렇게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9절과 1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될 것을 수수께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낮이 열두 시간이고 낮에 다니면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않지만 담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일까요? 먼저 낮이 열두시간이라는 것은 낮에게 주어진 시간이 열 두 시간이듯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주신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2장부터 계속해서 말씀하셨던 “때”입니다. 이 때는 죽으심으로 영광을 받으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아직 낮이라는 것은 아직 죽을 때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는 13장 1절에서 “때”가 이르렀다고 하실 때까지 계속되는데 이 때를 본문의 말씀으로 하면 바로 “낮”인 것입니다. 그렇게 낮에는 다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유대로 가면 돌에 맞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아직은 그렇게 될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다시 나사로에게 가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1절과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다고 말씀하시면서 깨우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제자들의 대답 속에 제자들의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그것은 “안 가도 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보면 나사로를 “친구”라고 말하는데 그 때는 “우리”라는 주어를 붙였고 “깨우러 간다”고 하실 때는 “내가”라는 주어를 붙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나사로와 친했고 사랑했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그가 잘못되었을 때 해결해 줄 능력은 없는 존재입니다. 걱정해 주고 슬퍼해 줄 수 있지만 거기까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깨우는 자입니다. 그래서 “내가”입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죽은 영혼을 깨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목사가 아무리 잘나고 능력이 있어도 목사가 살리거나 생명의 풍성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본문에서 알려주고 있는데 그것은 성도는 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잠잘 뿐입니다. 그래서 13절과 14절에서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나사로의 병과 죽음 사건을 통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하나 있다고 말씀합니다.
1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그 때 거기 계시지 않은 것을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거기 계셨다면 그의 병을 고쳤을 것이고 그동안 병자들을 고쳤던 사건 중의 하나로 여겨졌을 뿐 더 이상의 의미가 제자들에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은 나사로에게 가시면서 이렇게 늦어진 것으로 인해 제자들을 위하여 기뻐하십니다. 그것은 믿게 하려 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을 두 가지 목적을 이루려 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또 하나는 제자들과 그 일을 보고 하나님을 믿을 사람들을 위한 목적을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이 후로 예수님께서 이 나사로 사건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시는지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너희를 믿게 하려 하노라”라고 하시면서 “그에게로 가자”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 접속사가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써서 어색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자연스러우려면 “그러므로”라는 말을 써서 두 말을 연결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그에게로 가자”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나”를 썼을까요? 그 이유는 나사로가 죽었다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는 것입니다. 죽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가자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너희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지만 그러나 가자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이라는 절망과 환란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 그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만류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말에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향해 말하기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라고 하였습니다.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뜻을 정하여 우상에게 드려졌던 음식을 먹지 않았고 어인에 조서가 찍힌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을 향해 창을 열고 기도했던 것과 그의 친구들이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은 이유로 풀무불에 던져져 죽는 한이 있어도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겠다는 믿음을 지켰던 것처럼 우리 앞에 죽음과 환란이 기다린다고 해도 가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믿음의 선진들이 가셨던 길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12장 12절과 13절에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라고 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1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신중한 도마가 본문에서는 베드로처럼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말입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죽으러 가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사로의 생명을 살리실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예루살렘 가까이 올라가셨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으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기꺼이 같이 죽겠다는 것입니다.
도마의 이런 호기는 마치 우리들 같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을 때나 이성이 자극을 받았을 때 우리는 기꺼이 주를 위해 죽기를 작정하고 앞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얼마 안가 그럴 능력은 없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며 부끄러워하는 우리를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시고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그것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이미 와 있었습니다.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마르다에게 조용히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고 예수님께 나가 맞이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어 말하였습니다.
21절과 2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계셨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이제라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무엇이라도 구하면 하나님께서 주실 줄 안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네 오라비가 살 것이다”고 하셨고 마르다는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장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마르다는 마지막 부활의 날에 살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바라새인들처럼 내세와 부활을 마르다도 믿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대답에 예수님을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25절과 26잘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말씀이 갖는 중요한 의미는 지난 두 주 동안 계속했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원천이시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자는 육체의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반드시 살아 날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살아서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며 그 생명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쓸 때 영생에 대해 두 가지로 분명히 말합니다. 첫째 부활, 둘째 사망이라는 말로 한번 주어진 생명을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 것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여한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당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계20:6). 요한계시록을 자세히 보면 첫째 부활이 있을 뿐 둘째 부활이라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통해 한번 생명을 얻은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만약에 죽는다면 둘째 부활이라는 말도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환란과 박해로 죽어갔던 주후 1세기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놀라운 말씀이었을까요? 요한이 이 말씀을 기록할 때 당시 사람들은 도미티안의 박해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며 죽어갈 때였습니다. 그들에게 이 말씀은 육체의 죽음을 넘어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게 하며 기꺼이 육신의 생명을 복음을 위해 내 놓을 수 있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주님은 이 부활의 말씀을 주신 후에 마르다에게 “이것은 네가 믿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믿느냐고 물으시는 이유는 이렇게 말씀하시기 전의 마르다의 말 때문입니다. 이미 읽었던 22절에서 마르다는 “하나님께서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했었습니다. 여기서 “아나이다”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에이도”라는 단어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하여 알았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라비가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살줄을 아나이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알지만 믿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를 네가 믿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에 마르다의 변화가 따르는데 27절에서 마르다가 “내가 믿나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후에 마리아에게도 소식이 갔고 마리아와 그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 앞에서 슬피 울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시며 심히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고 우셨습니다.
33절에서 예수님께서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셨다고 했는데 여기서 통분히 여기셨다는 말은 “엠브리마오마이”라는 단어로 “격렬한 불쾌감”을 표현한 단어이고, 민망히 여기셨다는 단어는 “에타랔센”이란 단어로 불쌍히 여긴다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슬픔을 보면 격렬하게 불쾌하게 생각하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뭔가 이상합니다. 그 이유는 먼저 통분히 여기심을 사탄이 인간을 범죄케 하여 주어진 사망으로 인해 사탄을 향해 격렬하게 분논하신 것입니다. 또한 민망히 여기신 것은 그 사망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신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 하늘 보좌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셔서 기꺼이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 15절은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슬퍼하는 자들을 이끌고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39절과 4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명하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죽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오는 것을 직접 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도로 명하셨음에 마르다는 말하기를 “죽은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전에 “내가 믿나이다”라고 한 것은 아직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를 책망하시면서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하늘을 향해 기도하셨습니다.
41절과 4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왜 이렇게 기도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기도 내용대로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나사로를 향해 나오라고 외치셨고 말씀대로 나사로가 걸어 나왔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벌어진 두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4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53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이 사건을 통해 많은 유대인들이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믿지 못하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부류들도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주님의 의도를 볼 수 있습니다. 부활과 생명의 원천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께서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 주시는 의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을 살려 주셔서 주님을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를 죽음과 사망으로 몰아넣으시고 그 속에서 건져내시며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병 주고 약주면서 영광을 취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와 우리의 자범 죄로 인해 사망의 형벌을 받고 죽었던 우리를 주께서 살려주시고 믿음을 주시며 영생 얻게 하심으로 우리를 통해 영광의 찬송을 받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삶의 회복을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잘하고 훌륭해서 복을 주시고 영생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서 48장 11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것을 말씀하시면 그 회복의 근거를 이스라엘에게서 찾지 않으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를 이룰 것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바벨론 포로에서 돌이키게 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영광이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영벌에서 영생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