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발을 씻기라
요한복음 13장 1-20절
예수님은 제자들과 잡히시기 전날 밤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만찬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찬을 하시다가 갑자기 일어나 밖으로 나가시더니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는 웃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며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에 놀란 베드로는 자신의 발을 씻기실 수 없다고 만류하였으나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고 베드로는 그렇다면 자신의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며 너희도 서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통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요한은 유월전 전날에 있었던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생각하고 계신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 뿐 아니라 이 말씀의 일차 대상자였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놀라운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해를 받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육체적인 어떤 것으로 느끼길 원하였지만 현실은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살려달라고 기도했지만 그 기도는 공기 중에 흩어져 버렸고 황제숭배를 하지 않으면 거래를 할 수 없었기에 경제적 궁핍에서 헤어날 수 없는 현실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했지만 그것도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 그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느냐? 혹시 그분은 이기적이라 자신만 섬기라고 하고 자신만 증거 되기를 원하시며 당신의 백성은 죽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는 분은 아니냐?라고 생각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요한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속적인 것들의 필요를 채우고자 주님을 찾고 그것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금식하며 기도하고, 작정하고 기도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느냐? 심지어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느냐고 의심을 품고 종국에는 주님을 떠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요한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라고 말입니다.
그분의 사랑은 변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의 방법과 손길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말라기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그들의 반항이 나옵니다. 1장 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후에도 자신들이 기대했던 영광스러운 모습이 회복되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는 모습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반문하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맞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왔고 여전히 힘이 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에서의 후예인 에돔은 바벨론에 망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평안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하는데 우리들을 사랑하신 것에 대한 증거를 대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서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분명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 고멜을 데리고 광야로 나가 그곳에서 그와 말하고 난 후에 그곳을 소망의 문으로 삼았던 것을 통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죄악과 세속적 욕망을 충족시켜 줄 복과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켜줄 하늘의 복을 동시에 얻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사랑이라면 하나님은 세속적인 욕망을 끊어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고 천국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사랑하심과 우리가 원하는 사랑의 방식은 충돌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장 인간적인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나 그분과의 관계가 온전해 지면 그것이 그 어떤 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본문에서처럼 이 땅에 사역을 마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사랑의 증표로 다른 보혜사, 곧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요한은 그 사랑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어 말해주고 있습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예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꺼내어 말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가룟 유다의 배신입니다. 하나님과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 동안 이스라엘과 동행하는 방법과 그 무리 안에 거하실 집에 대해 행복하게 말하고 있을 때 산 아래에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만들어 놓고 뛰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처럼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과 가룟 유다의 배신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배신에 대해 요한은 본문의 중간 중간에 계속해서 넣었습니다.
10절과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8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18절 말씀은 시편 41편 9절과 55편 12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인용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시편 41편 9절은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라고 하였고
시편 55편 12절부터 14절은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우리가 같이 재미있게 의논하며 무리와 함께 하여 하나님의 집 안에서 다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편들은 모두 다윗이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 지은 비탄시입니다. 이 시에서 발꿈치를 든 자와 나의 동료, 나의 친구, 나의 가까운 친구라는 말은 압살롬을 도와 반역을 일으켰던 “아히도벨”에 대한 묘사입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모사였지만 다윗에게 반기를 들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자신의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자신을 팔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날은 당신이 그 제자들을 위해 죽으실 것을 말씀하시는 날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들도 주님의 사랑에 대해 온전히 반응하기보다는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는데 아니 더욱 강해지시는데 우리들은 여전히 세속적 욕심과 이기적인 욕망이 채워지지 않음으로 인해 하나님을 배반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자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가룟 유다의 배신을 말하면서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요한은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해 말하면서 동시에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목숨까지 내놓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랑을 말하기 위해 요한은 가룟 유다의 배신을 예고하고 계속해서 대화 중에 그 배신에 대해 다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목숨을 내 놓으시며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은혜에 날마다 감사할 줄 아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과 가룟 유다의 배신을 기록한 요한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있었던 이상한 일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명 “세족식”이라고 부르는 행위를 하신 것입니다.
3절부터 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예수님은 식사하시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을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 일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밖에 있다가 집에 들어가면 입구에서 손과 발을 씻었습니다. 누군가의 집에 들어간다면 그 집에 종이 나와 손님의 발을 씻겨주었고 주인이 생각할 때 존귀한 분이라면 주인이 직접 씻어주기도 했습니다. 또 지금 예수님의 무리들처럼 초대받아 간 것이 아닐 때는 무리 중에 제일 막내가 무리들의 발을 씻어 주어야 했습니다.
미루어 보건데 제자들은 어느 누구도 발을 씻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오는 동안 했던 대화와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오면 예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위치를 확보하는데 혈안이 되었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의 어머니까지 나섰는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좌우편의 자리를 요구했었고 이를 본 제자들은 분노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누구도 자신을 낮추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스승의 발도 씻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이 일은 낮아지기를 싫어하고 스스로 높은체하며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자들에게 무언의 말씀을 전하시며 그들의 교만하고 어리석은 행실을 꾸짖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며 섬김이 무엇인지 행동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 알듯이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나아가 자신의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못하실 것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으셨는데 그까짓 발을 씻김이 대수였겠습니까?
이렇게 충격적인 일을 행하시는 예수님께 베드로가 나서서 자신의 발은 씻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이 발 씻음이 단지 발을 씻기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셨습니다.
8절부터 10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베드로의 입장에서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싶습니다. 동시에 얼마나 부끄럽고 죄송했겠습니까? 그러기에 자신의 발을 못 씻게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은 이해 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내가 발을 씻겨 주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은 베드로는 한 술 더 떠서 자신의 머리와 손도 씻어 달라고 합니다. 이에 주님은 목욕한 자는 이미 온몸이 깨끗함으로 발 밖에 씻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의 대화는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내용은 각각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발 씻음을 통해 죄에 대한 용서와 섬김에 대해 말하고 있다면 베드로는 여전히 육체적인 정결에 대한 이야기를 할 뿐이었습니다. 이 이상한 대화를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주님께서 발을 씻겨주지 않으시면 상관이 없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상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메로스 메타”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아랫사람이 직책이 높은 사람의 전리품이나 재물 혹은 영광 등에 참예하는 것을 일컬을 때 사용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발을 씻어주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씻어주심, 즉 용서해 주심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예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두 가지로 나누어 씻음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목욕, 하나는 발 씻음입니다. 여기서 목욕은 근본적인 죄의 씻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죄 용서입니다. 그리고 발 씻음은 그 후에 짓는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발 씻음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 주님은 다시 설명해 주셨습니다.
13절부터 15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일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신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목욕이란 말을 통해 근본적인 중생에 대해 말씀하셨고 발 씻음을 통해 중생한 자임에도 삶에서 짓는 죄에서 돌이킬 것을 말씀하셨다면 이렇게 씻음을 입은 제자의 또 다른 한 가지 삶에 대해 다시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섬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말대로 내가 스승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에 발을 씻어 주었다 그러므로 너희도 이와 같이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다”라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처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고 서로 섬기라고 말입니다.
이 글의 일차 수신자였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주님을 부인하고 심지어는 고발하여 그리스의 공동체에 위해를 가한 자라고 하더라도 용서하고 섬길 것에 대해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서로 자신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던 제자들에게 서로 섬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도 한국교회는 이 싸움에 에너지를 너무 소모합니다. 어느 교단이 제일 세력이 크냐?, 어느 교회가 사람 숫자가 제일 많으냐?, 어느 목사가 유명하냐?, 어느 성도가 교회 수석이냐? 를 두고 싸웁니다. 자신이 교회에 얼마나 많은 헌신을 한 줄 아느냐고 하며 자기 멋대로 교회를 움직이려하고 자신보다 늦게 온 사람이 자신보다 더 열심히 하고 인정받으면 시험에 들고, 교회의 직분에 서열을 매겨 그것에 목을 매는 모든 사람들이 본문의 제자들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은 서로 섬기라고 하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종이 되어 발을 씻기는 자세로 살아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렇게 해야 할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16절과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여기서 제자들의 정체성이 명확하게 규정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종”이며 예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사역을 함에 있어서 때때로 성도들로부터 섬김을 받고 높은 자리에 앉힘을 받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모든 섬김과 높은 자리를 거부하고 스스로 낮아져 다른 사람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 주시면서 제자들 또한 종으로서 보냄을 받은 자로서의 직분을 망각하지 말 것을 당부시한 것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얄팍한 자존심이나 대접받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에 섬김의 도를 실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결국 스스로 예수님보다 더 윗자리에 앉고자 하는 격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도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이며 보냄을 받은 자로서 주인이시고 보내신 자인 예수님께서 행하신 본을 따라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그러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알고 행하면”이란 말이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아는 것에는 행함이 따라야 됨을 말씀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통해 단순히 자기 내면의 작용에만 머물 수 있었습니다. 즉, 행함은 없고 교훈을 통해 받은 감동에만 사로잡혀 만족을 얻는 자가 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될 것을 염려하여 주님은 “알고 행하면”이란 말씀을 하셔서 섬김이 행동으로 드러나야 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많은 말씀을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듣는 것에서 만족하라고 하신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들은 자는 반드시 행해야 할 의무를 가진 것입니다. 바라기는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몸을 씻기시고 발을 씻겨 주셨듯이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에게,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섬김의 본을 보이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