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대하라
요한복음 16장 1-33
예수님은 감란산으로 가는 길 위에서 제자들에게 성령에 대해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라는 말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제자들을 출교시키고 죽이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떠나실 것을 말씀하셨고 당신을 대신하여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실 것인데 내가 있는 것보다 그가 오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성령이 오시면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여인이 해산하는 수고를 통해 아이를 낳고 기뻐하는 것처럼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지금 잠시 고민하고 고난을 당하나 보혜사로 인하여 기뻐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평안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5장 후반부터 예수님은 세상이 자신을 미워했던 것처럼 제자들도 미워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본장 2절부터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인해 출교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 이유로 1절에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박해를 당할 것을 아셨고 그 박해로 인해 많은 이들이 실족할 위기를 겪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 이유로 오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실족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연히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인해 주어진 박해와 고난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많은 성도들은 이미 수많은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자 굴에 던져지고 가죽이 벗겨져 죽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작게는 사회 경제적 고립과 궁핍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교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자신들의 공동체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기록한 성경이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는 유대 공동체에 있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으로 인해 박해를 당하게 되자 다시 유대 공동체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이 때 유대공동체로 돌아가지 말라는 말씀을 기록한 성경이 히브리서인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실족합니다. 그 실족의 이유는 여러 가지나 육체적으로는 박해와 미움이여 경제적으로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할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가지 밭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 가시밭에 뿌려진 씨앗은 싹이 나고 자라나 가시가 기운을 막아 결실치 못한다고 했는데 이를 해석해 주시기를 “가시떨기에 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많은 교인들은 말씀을 수없이 들으나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앗처럼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가는 자가 많은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본문에서처럼 “실족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실족의 위기를 겪기에 주님은 오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고하시기를 사람들이 제자들을 출교시킬 것이라고 먼저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출교는 지금 한국교회가 하는 교회에 내보내고 다른 교회로 가는 정도의 출교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회당에서 출교 시킨다는 뜻은 하나님에게서 끊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것은 출교였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제자들을 죽이기까지 할 것이라고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제자들을 출교시키고 죽이는 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박해는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도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죽이는 자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확신했었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로마의 네로가 정치적인 박해를 하기 전에 최고의 박해자들은 유대교도들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유대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고 복음전파를 막았습니다. 그 후에 네로의 박해와 함께 성도들은 로마로부터는 정치적 박해를 유대교도들로부터는 영적인 박해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했기에 주님은 오늘의 말씀을 해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
주님은 제자들이 그 때를 반드시 당할 것을 전제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에게는 고난이 당연히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키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대는 반드시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세상 주관자 사탄이 성도를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 절 후반에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함께 계실 때 이 말씀을 하지 않은 이유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에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기보다 주님께서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께로 가시기에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염려하여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이 고난을 당할 것을 염려하셨으면서 당신이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유익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당장은 내가 떠나는 것이 제자들에게 근심이 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떠나지 않으시면 보혜사가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먼저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이 존재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오셔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동안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후 제자들에게 주어진 성령은 시간적,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는 존재로 임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성경은 24시간, 356일 평생 동안 제자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계시기에 예수님께서 떠나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 유익한 두 번재 이유는 다음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8절부터 11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성령이 오시면 죄에 대해, 의에 대해, 심판에 대해 책망하시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먼저 죄에 대하여 책망하신다는 말씀을 본문에서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라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죄라 헬라어로 “하말티아”라고 하는데 이는 “빗나감, 악행, 위범” 등의 의미를 갖고 있지만 원래는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간 것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이 용어는 예수에 대하여 믿지 않는 것에 국한되어 사용되었습니다. 당시 유대 인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한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그들은 직접 예수의 말씀을 들었으나 믿지 않았으며, 예수를 보았지만 메시야로 영접하기는 커녕 오히려 미워했습니다(1:11). 결국 자기들의 메시야를 아무런 연고 없이 미워하고(15:25) 핍박하여 십자가에 죽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죄를 성령이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또한 죄에 대하여 책망함이란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의 죄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 강림 후 복음이 세계 각처에 전파되는데 성령은 그 복음을 믿지 않은 자들도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죄인임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영접하는 자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지만(1:12) 아들에게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리라(3:18)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믿지 않는 자의 죄와 그에 따른 사망에 대해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어두움 속에 있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어두움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각 사람의 양심에 빛을 비추심으로 그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셔서 죄에서 돌아서게 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다음으로 의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의”는 본서에서 본 절 외에 8절에서만 사용되었으며 본문에서 그 개념은 '죄'와 반대되는 것으로 사용되었고, '심판'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먼저 '의'는 9절의 죄와 문맥상 상관관계에 의하여 나온 말로 예수의 무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세상의 의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의 의는 공의의 심판자 되신 하나님의 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무죄를 증명하는 '의'는 하나님의 본성에 속하는 '의'로서 죄 가운데 있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공의'가 되기도 합니다.
세상은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롬 10:3) 오히려 의의 성취자이신 예수를 십자가에 달았습니다(행 7:2). 이처럼 세상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를 영접하지 않은 죄로 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 의의 심판은 세상에 의해 죽임을 당한 예수가 부활하여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심으로 더욱 더 확증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라고 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심판에 대해 책망하는데 그 의미를 본문에서는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죄, 의, 그리고 심판에 대한 성령의 책망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죄와 의에 대한 성령의 책망이 그리스도의 '무죄'와, '완전한 의'를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이라면 심판은 그가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임금이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세상 임금은 사단의 세력을 의미한다. 이처럼 사단은 모든 죄인들 위에서 군림한다는 뜻에서 '공중 권세 잡은 자'(엡 2:2),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엡 6:12)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단에 대한 예수의 심판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시작되었으며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더 이상 사망이 왕 노릇하지 못하게 사망의 권세 잡은 자들을 심판하셨습니다(히2:14).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이 심판을 더욱 확증함으로써 사단에 대한 자신의 승리를 확인하셨습니다. 성령은 이 심판을 세상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십니다.
한편 '심판을 받았다'란 표현은 헬라어 본문에서 완료형으로 기록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의 사역 가운데서 이미 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에 의해서 귀신들이 쫓겨나는 것은 그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되었음을 입증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심판하는 권세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5:27). 다만 성령은 예수의 심판하시는 사역을 마지막 심판 때까지 지속시키실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성취될 승리를 내다보시고 완료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자가 심판에 이르지 않고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표현과 같이(5:24) 승리가 확정되어 있으므로 심판도 확정된 것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떠나시고 보혜사 성령이 임하시는 것이 유익한 이유는 다음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령이 오셔야 유익한 마지막 이유는 바로 성도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심으로 스스로 진리를 계시하셨으며 보혜사 성령은 이 진리를 드러내 보이시며 성도들을 위해 그 진리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만드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신 목적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 일입니다(15:26). 성령은 세상을 책망하시는 반면(16:8-11) 제자들과 성도들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에서 생활하는 모든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주의 성령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하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진리 가운데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16절에서 제자들에게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제자들은 무슨 말씀인지 알 수 없어 주님께 묻고자 하였을 때 주님께서 이를 아시고 이 말씀의 뜻을 알려 주셨습니다.
19절부터 22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말씀의 일차적 의미는 조금 있으면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보지 못하고 그 후에 조금 더 있으면 부활하여 다시 보게 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넘어 성령의 내주하심을 의미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산모이야기를 통해 산모가 아기를 낳기 전에 힘들어하지만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이 태어난 것으로 즐거워하듯이 제자들은 현재는 산모가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처럼 힘이 들지만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나아가 성령이 임하시고 나면 기쁨이 될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기쁨이 얼마나 큰지 22절에서는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제자들이 결코 슬픔을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제자들이 받게 될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므로 세상 사람들이 잠시 체험하는 일시적인 기쁨과 구별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제자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한 후 더욱 심화된 기쁨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이 임한 사람의 특징은 기쁨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의 특징도 기쁨인 것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놀라운 기쁨이 그 안에서 넘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그리하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리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이 받을 환란과 제자들이 받을 환란, 그리고 그 이후에 오실 성령에 대해 말씀하신 주님은 이제 그 시간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3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주님은 당신이 혼자 있게 되고 제자들은 모두 흩어질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랬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모두 흩어졌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세 번 부인하고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본 절 후반을 보면 예수님께서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도 환란을 당할 때는 오직 자신만이 혼자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을 도와 줄 이가 하나도 없을 때, 그 때도 하나님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주의 백성들이 환란으로 인해 철저히 혼자가 되었을 때, 주변의 친구들도 다 떠나고 가장 힘이 되어주어야 할 가족들까지 자신을 외면 할 때도 주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시작하면서 하셨던 말씀을 마치면서도 다시 해 주셨습니다.
3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렇게 많은 말씀을 하신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평안할까요? 그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평안해 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환란과 풍파가 많지만 오직 내 안에 거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함으로 평안해 지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2절에서 베드로는 평안이 더욱 많아지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평안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더욱 넘치는 것입니다.
나아가 본 절에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담대하라고 하신 주님의 방법은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사탄이 주장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로서 이 땅을 사는 것이 때로는 힘들고 돌이키고 싶을 때가 있어도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우리에게 주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제 담대 합시다. 세상의 유혹 앞에서 담대 합시다. 세상의 박해와 환란 앞에서 담대 합시다. 재물의 유혹과 세상의 염려에 대해 담대하게 거절합시다. 주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이기셨고 그 주님을 우리가 하나님으로, 왕으로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세상 권세 잡은 사탄에게 굴복하지 마시고 말씀 부여잡고 심령을 단단히 하여 이기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