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
요한복음 17장 1-26
예수님은 13장과 14장에서 성찬식과 세족식을 행하시며 보혜사 성령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방을 나와 감람산으로 가시다가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는 농부로, 자신은 참포도나무로, 제자들을 가지로 말씀하시며 자신을 떠나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이 박해를 받을 것을 말씀하셨는데 그 박해로부터 이기라고 하시며 성령에 대해 다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감람산으로 가시던 주님은 감람산에 다다랐을 때 멈추어 서셔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이 기도를 “대제사장적 중보기도”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가시다 말고 서서 기도하시는 이유는 제자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의 내용을 보면서 성도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고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1절과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예수님은 이제 곧 잡히시게 됩니다. 그러시기에 자신이 잡힌 후에 두려움에 사로잡힐 제자들을 생각하지 않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으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기도 내용 중에 첫 번째가 자신을 영화롭게 해 주셔서 아들인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도 영화롭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영화롭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이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을 무엇일까요? 그것은 본문 안에 이미 있습니다. 1절에서 “때가 이르렀사오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은 영화롭게 되는데 그것은 2절 말씀대로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얻은 영화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시는 권세인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성공하고 부요해 짐으로 영화로워지려하는데 예수님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죽음을 통해 영화롭게 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생에 대해 분명한 정의를 내려주고 계십니다.
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아는 것이니이다”라는 말로서 십자가의 죽음 뒤에 있는 부활을 바라보며 예수는 '영생'에 대하여 정의를 내리고 계십니다.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은 선지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어 왔었습니다.
호세아는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호 6:3)라고 했으며 예레미야는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다'(렘 9:24)고 했습니다.
'안다'는 헬라어는 “기노스코”인데 이 말은 체험적인 지식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을 지식과 모든 경험의 세계를 통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행복과 영생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 자신이 생명의 주인으로서 영생의 주체가 되시는 것입니다(11:35;행 3:15).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땅위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한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이 땅에 그 어느 것으로도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4절에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일이고,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모든 사람을 영생에 이르게 하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유일한 구원의 길인 예수님을 알고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얻게 된 영화는 2절에서 읽었듯이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다음 6절부터 계속하고 계십니다.
6절부터 8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며 그들은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아들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당신에게 맡겨진 주의 백성들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잃어버린 양의 비유를 통해 당신을 끝까지 찾고 찾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선한 목자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 주님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9)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지금 제자들을 두고 가야 하는 시간이 된 것을 아시고 제자들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계십니다.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주님은 잡히시기 직전까지 오직 당신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이 땅의 성도들만을 생각했습니다. 그들에게 주실 생명, 나아가 그들이 이 땅에서 당할 고난과 환란을 생각하시며 그 속에서 주께서 주신 생명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며 사탄과 싸울 당신의 백성들을 생각하셨습니다.
현대교회 성도들보다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를 통해 더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을 로마 정부의 박해와 유대교도들의 방해로 인해 많은 고난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을 주님은 끝까지 생각하시며 기도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기도해 주신 내용이 11절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단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첫 번째 거론 하신 것이 당신과 우리가 분리 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은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시지만 우리들은 사탄의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영적 전투를 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사탄에게 시험을 당하셨고 사탄에게 속한 사람들의 수많은 공격을 당하고 심지어는 죽게 될 것인데 그의 제자들도 필연적으로 똑같은 현실에 놓일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기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만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잠시 후 감람산에 가셔서 마지막 기도를 하실 때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요구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40절은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고 46절에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내려오시기 전에 변화산 사건 후에도 제자들에게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하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사역 후반으로 갈수록 제자들에게 기도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보았듯이 시험을 이기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성도들을 보존해 달라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읽은 11절에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라고 하셨습니다. 나아가 12절에서 더 깊게 기도해 주고 계십니다. 기록되기를 “내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 그 중의 하나도 멸망하지 않고 다만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사역하시는 동안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을 보존하였다고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한사람 가룟 유다는 멸망의 자식이었기에 자신의 길로 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말씀은 당신에게 맡겨 주신 영혼을 당신이 살아 계실 때나 승천하여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실 때나 변함없이 보존하여 주시는 이심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보존해 주셔야 할 이유를 14절에서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1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성도들을 보존해 달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성도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워하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성도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성도는 하늘에 속한 자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나의 시민권을 하늘에 있다”고 하였고 베드로는 이 땅에서 사는 동안을 나그네로 있는 시간이라고 하여 자신의 본향이 하늘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어떠십니까? 정말로 하늘이 본향이십니까? 여전히 이 땅의 것에 얽매여 참 가치가 무엇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살지는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날마다 이 땅의 것들을 벗어 버리는 일에 힘을 내야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말처럼 “얽매이기 쉬운 것들”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이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영적인 즐거움이 그 안에 있는 것과 비례하여 이 땅에서 미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공격을 받고 말씀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 핍박과 손해가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미 받으셨기에 그의 뒤를 따르는 그의 사람들도 당연히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16절에서도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라고 하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듯 힘들고 어려운 믿음의 여정 속에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면서 주님께서 성도들을 향한 두 가지 기대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악에 빠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1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 21절부터 24절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그네가 속히 집에 가서 편히 쉬고 싶은 것처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가장 기다려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말처럼 이 땅에서 사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기꺼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시면서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성도들을 향한 기대를 말씀하셨는데 바로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성도들에게 원하는 것이 “악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 첫 번째 기대는 성도들이 세상의 악에 물들지 않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성도를 향해 기대하시를 거룩함을 얻게 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17절부터 19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첫 번째 기대로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 소극적이라면 이 두 번째 기대인 거룩을 얻게 되는 것은 적극적인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거룩을 기대하시면서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는 말로 자신이 먼저 거룩했고 그것처럼 제자들도 거룩해 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이란 주제로 쓰고 있는 레위기도 19장 2절에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거룩을 말하면서 이 거룩은 “진리”로 거룩해 진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거룩해 지는 것은 도를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명상을 하거나 참선을 행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의 거룩은 진리를 알고 듣고 깨달으며 그 진리를 근거로 살아가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은 어떤 외형적인 모습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구별을 말합니다. 생각을 구별하고 말을 구별하고 음식을 구별하고 삶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성경의 가치관을 구별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거룩입니다. 주님은 잡히시러 가시면서도 우리들에게 기대하신 것이 “악에서 건져주시는 것과 거룩함을 얻게 되는 것”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주님은 하나 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21절과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주님은 먼저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이 하나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하나 되기를 원하시는 목적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 그것은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것을 통해 세상은 하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면 세상을 우리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성도들은 이미 하나입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에서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 되라고 하신 것 일까요? 이 말은 에베소서의 말씀처럼 힘써 지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렇게 힘쓰는 것을 통해 세상은 예수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써 지키는 것, 하나 되는 것을 23절에서는 “온전함을 이루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 되는 것이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어 성경은 이 구절을 “완전히 하나가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하나 되게 하신 뜻을 깨달아 하나 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직으로 주님은 하나를 더 기도하고 계십니다.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을 성도들도 보게 하기를 원하신다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영광'은 지상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 죽음과 주로 연관된 것임에 반해 본 절은 미래에 회복될 영광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영광은 그가 창세전부터 가지고 있던 하나님으로서의 영광을 의미하는데 본 절은 그리스도의 신적 선재성을 회고하며 동시에 미래적 완성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지금은 거울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있으나 그때에는 얼굴을 맞대고 보는 것과 같이 보게 될 것입니다(계 22:4).
그렇습니다. 성도는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사의 사환이 엘리사의 기도로 자신들을 둘러싼 아람군대보다 거 강한 하나님의 군대를 영안을 열어 보게 되어 평안을 찾은 것처럼, 여호수아가 여리고성 함락을 놓고 근심할 때 하나님의 군대장관을 보고 그의 말씀을 들으므로 평안해 지고 결과적으로 이긴 것처럼 영적인 눈이 열려 주를 보고, 귀가 열려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게 되고 결과적으로 이기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말씀을 마치신 주님께서 마지막 말씀으로 모든 성도들을 위로해 주시고 계십니다.
2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본문에서 주님은 제자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기록되기를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긴장 문장 중에 끝에서 말하기를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안에 계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이 이미 예언되기를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이름이 예고 되었습니다.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그리고 그 예고는 보혜사 성령님이 임하여 성취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결코 우리를 악과 환란에 그냥 내어버려 두는 분이 아니십니다. 지금도 끊임없이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시고 우리의 심령에서 탄식으로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십니다. 이 말씀을 잊지 말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