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
엡2:1-10
오늘은 하림교회 설립 14주년 감사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14년 전 경기도 광명시 광명 5동 작은 지하에서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은 지금까지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때로는 아픔과 슬픔도 있었지만 은혜 가운데 영혼들이 태어나고 성장하고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 “나는 전능하다”고 말씀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1천만 원을 빌려 시작한 하림교회는 정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단 한 번도 외부로부터 후원을 받지 않고 처음부터 선교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말씀하신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처럼 주께서 세우시고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세워진 교회, 그것은 우리 하림교회의 이야기 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교회가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자라며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에베소서 1장 3절부터 14절까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가 어떻게 성도가 되었는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4절과 5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택정하심과 예정해 주심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 예정하심과 택하심을 위해 성자 예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7절 말씀처럼 예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을 위해 피 흘려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완성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인 쳐 주셔서 완성된 것입니다(13절).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예정하심과 성자 예수님의 피 흘려주심과 성령 하나님의 인 쳐 주심으로 된 것입니다.
이렇게 성삼위 하나님의 역사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인 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그 정확한 뜻은 “밖으로 불러내어 모은 무리”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세상 밖으로 불러내어 주신 사람들의 모임이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란 세상에서 불러내어 모아놓은 무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란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러 모아놓은 무리들에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습니다.
본문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성도의 출생의 비밀은 다름 아니라 죽었던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죽음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인간의 조상이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간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여기서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죽음은 단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에덴에서 쫓겨났고 하나님은 화염검을 두어 에덴에 접근을 막았습니다. 이 때부터 인간은 죽은 존재입니다. 여기서 죽은 존재란 자연상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상태의 인간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모든 인종과 종족들에게 나름의 종교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 속에 남아 있는 종교성 즉, 절대자를 두려워하고 찾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 종교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개도 원숭이도 없습니다. 오직 인간에게만 남겨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교성만으로는 절대자를 제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복음을 통해 자신이 찾고 있는 절대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엇일까요? 복음은 바로 예수님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예수님 자체가 복음이고 그분께서 행해주신 대속의 은혜 즉,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없애 주신 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이 복음을 통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도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허물과 죄에 대해 다음절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절과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여기서 그 때란? 예수님을 믿기 전을 말합니다. 그 때에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고 말합니다.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다는 말은 죄 가운데 있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 온갖 죄를 짓고 그 이유로 인해 죽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인해 로마서는 인간을 죄인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은 유대인 외의 사람들을 죄인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온갖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온갖 짐승과 동물의 모양을 만들어 놓고 신이라고 숭배하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며 남녀 간에 바르지 못한 행실로 인해 죄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모든 불의, 악취, 탐욕, 악의가 가득하고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하며 수군수군하고 비방하며 교만하고 악을 도모하며 배약하고 무정하며 무자비한 삶을 살기에 죄인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서 2장은 유대인들도 죄인이라고 하는데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고 죄를 지었지만 유대인들은 말씀을 가지고 있음에도 죄인이라고 정의합니다. 율법을 가지고 있는 자가 의인이 아니고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함을 얻는데 그들은 율법을 받았을 뿐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3장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10절부터 18절까지 말씀에서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또한 23절에서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3절에서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행하여 온갖 더러운 죄를 짓고 사는 자들에게 주어진 형벌은 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지 않은 것만 못한 존재였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나는 것이 곧 지옥의 형벌을 받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를 가리켜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지 않음이 나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 나면서부터 지옥의 형벌을 타고난 인간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4절과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인간에게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도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계속해서 말씀드렸지만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 없으신 당신의 아들의 생명을 취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은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예고해 오신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은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고 하셨는데 이는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유혹한 뱀을 저주하시면서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께서 뱀의 머리 즉, 사탄을 벌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에게 예고하신 형벌의 사건이 광야에서 한번 있었습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길로 인해 불평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어 죽게 했던 뱀의 모양을 놋으로 만들어 장대에 달게 했고 그것을 보는 자마다 살게 해주신 사건입니다. 이렇게 달린 뱀이 상징하는 것은 인간을 물어 죽음에 이르게 했던 뱀이 심판을 받았으므로 더 이상 사망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것을 믿는 자마다 살 것이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뱀이 나무에 달린 것 같이 인자도 달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죽으심의 효력에 대해 히브리서 9장 25절부터 28절에서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라고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십자가 상에서 모두 사하여 주셨음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살게 된 것에 대해 우리가 읽은 5절에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죽으신 주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새로운 신분과 지위가 생겼습니다.
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주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켜 세워지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늘에 앉혀 주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는 아직 이 땅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고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현재의 삶에 대해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늘에 속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것들에게 대해 죽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성공과 명예, 쾌락과 정욕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란? 그것에 대해 반응하지 않는 자란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본받을 자인 사도 바울은 그 모든 것들을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기에 기꺼이 자신의 혈통과 학벌, 재산과 명예를 주저함 없이 버리고 예수님을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반대로 거룩한 삶에 대하여는 산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산자의 삶에 대해 7절부터 10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먼저는 하나님의 지극히 풍성한 은혜를 나타내는 것이 산자들의 삶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과 말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증거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억지로 등 떠밀려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일은 극히 자연적이고 자발적인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 병 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해도 그들은 나가 이 소식을 전했던 것과 같습니다. 받은 은혜가 크고 감사한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게 그분을 증거하게 되는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는 복음 전하는 자인 것입니다. 이 복음증거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도가 잠잠하면 그 일로 인해 수많은 영혼들은 복음을 듣지 못하는 영적기근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도는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등불이 등경위에 놓여 그 방에 들어오는 이들에게 빛을 비추어 그리로 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방향을 잃을 때 그 길을 찾게 하는 등불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의 성도들이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일이 당연한 것은 주께서 약속한 일이시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24장 60절에서 이제 이삭의 아내가 되기 길을 떠나는 리브가에게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외치는 이들을 통해 음부의 권세 즉, 사탄의 세력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기는 성도들에게는 중요한 사명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바로 10절입니다. 이미 읽었지만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들의 사명은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이란 먼저는 복음전하는 것이요 나아가 이웃을 돌보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이루게 하시는 것을 위해 성도를 만드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라고 한 바울을 5장부터 6장까지 선한 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이름조차 부르지 않는 것”(엡5:3)입니다.
나아가 적극적인 선한 일에 대해 말하기를 아내들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고, 남편들에게는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했으며, 자녀들에게는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했고, 아비들에게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으며, 종들에게는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상전들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했고, 상전들에는 너희 상전이 하늘에 계신 것을 기억하고 위협을 그치라고 했습니다.
이 선한 일에 대해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라고 하나님과 사귀는 것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고 했으며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주께서 성도를 구원하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삶으로 음부의 세력을 멸하고 영혼을 구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5장 4절은 세상을 이기는 것은 믿음인데 이 믿음은 사랑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을 위해 죽으시고 그 죽음을 통해 생명을 주신 주님께 항상 감사하는 성도가 됩니다.
나아가 우리를 모아 교회로 세워주시고 함께 주의 나라를 세워가며 주께서 맡겨 주신 일을 감당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또한 우리를 성도되게 하시고 교회를 이루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선한 일을 하게 하려는 것임을 깨닫고 선한 행실과 삶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나아가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