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장 1-25절
예수님은 부활 하신 후 제자들에게 몇 번 나타나셨습니다. 처음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다음은 그날 밤에 도마를 제외한 제자들이 모인 방에서, 얼마 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그 다음은 부활 후 8일 만에 도마를 포함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주셨습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은 시름에 잠겨 고기 잡으러 갔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전부터 어부였던 제자들 뿐 아니라 목수였던 도마와 나다나엘 등도 따라갔던 것을 보면 고기 잡는 목적보다는 무엇엔가 마음을 두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밤을 지새운 제자들에게 주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밤새도록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있던 제자들을 보시며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순종하여 그물을 내렸고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았습니다. 이 때 이 글의 저자인 요한은 말씀하신 분이 예수님인 줄 알고 “주시라”라고 말했고 베드로는 겉옷을 걸쳐 입고 바다로 뛰어 들어 예수님께 헤엄쳐 왔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숯불에 떡과 고기를 굽고 계셨고 건져온 고기를 더 가져오게 하여 제자들과 아침을 드셨습니다. 아침 식사 중에 주님을 베드로에게 세 번에 걸쳐 자신을 사랑하는지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며 양들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어떻게 죽을 것인지 말씀하셨고 옆에 있던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을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라고 묻는 베드로에게 그는 상관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며 주께서 주시는 은혜를 함께 받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먼저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그들은 4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고기 잡고 있었습니다. 서두에서 말씀 드렸지만 그들은 고기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출신들로서 그전까지 한 곳에 모여 시름에 잠겨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던 중 베드로가 고기나 잡겠다고 했고 모두 함께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3절을 보면 그들은 한 마리도 못 잡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맨 처음 예수님을 따랐을 때도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었습니다.
요한은 왜 제자들이 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았던 것을 기억하며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베드로를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 주시겠다고 했었던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지금 요한은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못 잡은 그 밤의 이야기를 통해 예수님이 아니고는 단 한명의 영혼도 건질 수 없는 존재임을 알려주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5절을 보면 제자들의 철저한 실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기를 “얘들아”라고 부르십니다. 이렇게 부르심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친근하게 여기시는지 보여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음에도 낙심하고 근심에 잠겨 3년간 예수님을 따르며 배우고 받은 사명을 모두 잊고 있던 제자들을 책망하시기 보다는 그들의 연약과 실패를 불쌍히 여기시고 다정하게 불러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조금 전에 말씀 드렸던 방식으로 해석하면 “너희에게 영혼이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글이 쓰인 시기인 초대교회의 최대 사명은 영혼구원이었습니다. 고기잡이와 비유하면 사람을 낚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때 예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고 예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일을 하였을 때 무엇인가 건진 것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의 대답이 어땠습니까? 그것은 “없나이다.”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그의 동료 제자들이 주님과 관계없이 일을 시작했을 때 그들은 완전한 실패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않은데서 오는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사도적 사명 즉, 사람을 낚는 사명은 온전히 주님의 지시를 따르고 함께 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명하셨습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5절까지의 이야기와는 대조를 이룹니다. 스스로를 고기잡이의 전문가라고 생각했던 베드로와 제자들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바다에 그물 한번 던져 본 적 없으신 주님의 명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을 때는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잡힌 것입니다. 영혼을 낚는 사명도 마찬 가지입니다. 온전히 주님의 지시를 따를 때만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과 경험으로 주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결과는 처참한 실패입니다. 그 사람이 목사건 그렇지 않건 상관이 없습니다. 저도 종종 기도하지 않고 손톱만한 지식과 경험으로 말씀을 가르치려할 때가 있습니다. 이전에 잘하던 것이었고 반응이 좋았던 것이었음에도 그 말씀을 듣는 청중들이 전혀 반응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나름의 실패를 경험하고 차를 몰고 돌아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영혼을 전도하거나 변화시키는 일은 인간적인 재능과 경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주의 일을 감당 할 때 그것이 이미 익숙한 일이라 할지라도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아름다운 결과를 얻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복종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물을 들 수 없을 정도로 잡혔다고 했는데 여기서 “들다”라는 단어는 “엘퀴사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끌다, 잡아당기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6장 44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라는 말씀에서 사용되었는데 바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이라고 말 할 때입니다.
그러니까 그물을 들 수 없다는 말을 영혼을 구원하는 말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를 요한이 다시 사용한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고기를 들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잡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지만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말씀은 영혼 구원에 있습니다.
즉, 고기는 개종자를, 고기를 잡는 행위는 사도직의 수행을 뜻한다고 볼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했을 때 단 한 사람의 개종자도 이끌어 낼 수 없었으나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했을 때 그들은 놀라울 만큼 많은 개종자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절대 의존의 관계에 있으며 그들의 능력의 원천은 오직 예수님에 대한 절대적 복종에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기를 많이 잡은 후에 이 말씀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요한이 알았습니다. 이에 요한은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벗고 있던 겉옷을 두른 후에 곧바로 바다에 뛰어 내렸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급하게 뛰어 내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8절을 보면 배에서 해안까지의 거리가 한 오십 칸쯤 된 거리라고 하는데 이는 지금의 거리개념으로 환산하면 약 100여m가 되는 거리입니다. 짧다면 짧은 거리임에도 그물을 끌어올린 후에 갈 여유가 없었습니다. 주님이라는 말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께 헤엄쳐 온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그랬을까 싶습니다. 비록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 했지만 3년 반전에 예수님을 처음 따를 때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따랐던 것처럼 지금도 그 첫사랑의 기억으로 주님을 향해 나온 것입니다. 자신을 다시 찾아오신 주님이 너무 반가워 일초의 시간도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와 제자들을 불을 피워 떡과 고기를 구우며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고기를 굽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고기를 더 가져오라고 시켰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물을 당겨 고기를 세어 보기 153마리였습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님께서 고기를 더 가져오라고 하신 이유가 고기가 부족해서였을까요? 그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베드로에게 가서 그물을 끌어 올려 고기의 숫자를 세어 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물을 끌어 올리면 자연스럽게 고기를 선별했습니다. 부정한 고기와 정결한 고기를 구별하여 부정한 것은 버리고 정결한 고기만을 그릇에 담았기에 물고기를 세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었습니다. 요한은 그날 고기의 숫자를 기억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아주 중요한 두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고기”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익뒤스”라는 단어입니다. 이 익뒤스라는 단어는 우리가 잘 아는 그림에 있는 단어입니다. 물고기 속에 헬라어가 쓰여 있는 마크가 있는데 그 안에 있는 단어가 ‘익뒤스’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물고기입니다. 하지만 이 말은 단순히 물고기가 아닙니다.
이 단어는 다섯 단어의 첫 이니셜을 연결해 놓은 것인데 초대교회 성도들의 암호였습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의 앞 글자를 딴 것입니다. 이 말을 헬라어로 하면 “이수스 크리스토스 데오스 휘오스 소테르”라고 합니다. 이 고백은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던 고백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그 고기들의 수가 153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나 헬라어에 각 알파벳마다 숫자 값을 정해놓았는데 각 단어나 문장을 숫자로 환산하는 것을 게마트리아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다윗은 “14”고 네로의 헬라어 알파벳을 히브리어로 바꾸어 모두 더하면 “666”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제자들이 이해했는지 모르지만 요한은 이 숫자를 기억하여 본문에 넣은 이유는 제자들이 영혼들을 낚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베니 하 엘로힘”이라는 말인데 이를 게마트리아 하면 153이 됩니다.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할 때 함께 기록한 요한계시록은 사람들을 두 부류로 분류합니다. 믿지 않는 자를 “땅의 사람들”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주님의 명령에 의지해 말씀의 그물을 내리면 하나님의 아들들을 그물을 들어 올리지 못할 만큼 건지게 될 것을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기록하면서 그물에 고기가 많이 잡혔음에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굳이 그물이 찢어지지 않은 것을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누가복음 5장 6절에서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을 때도 고기를 많이 잡았는데 그때는 그물이 찢어졌다고 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왜 요한은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기록한 것일까요? 베드로를 처음 부를 때 그물이 찢어진 것은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은 때라 예수님을 수 없는 사람들이 따랐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그물 밖으로 다시 나갈 것을 의미했고 이제 성령이 임하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린 성령시대에는 한번 구원받은 영혼 즉, 그물 안에 들어온 고기는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과 식사를 하다가 베드로 개인에게 한 가지 질문을 세 번에 걸쳐 던지셨습니다.
1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예수님은 당신이 잡히시던 밤에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던 것을 마음에 두셨습니다. 마음에 두셨다는 것은 베드로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베드로를 사랑하기에 그를 그 실수와 부끄러움으로부터 건져내시기 위해 마음에 두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냥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 될 것을 “이 사람들보다”라는 비교급의 말씀으로 물으신 것일까요? 그것은 베드로가 최후의 만찬석에서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마26:33, 막14:29)라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거짓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단지 유대인들의 위협 앞에 그 결심이 잠시 무너졌을 뿐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 죽기를 원했던 그 마음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도 요한이 주님이라는 말에 곧바로 바다로 뛰어들어 헤엄쳐 왔던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의 연약한 모습을 주님은 그를 부르시면서 말한 이름을 통해 드러내고 계십니다. 그것은 “베드로야”가 아니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른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시몬을 제자로 부르시고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그 후로는 시몬이라는 이름이 아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오늘 본문에서 “시몬”이라고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고 시몬은 갈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시몬 즉, 갈대라고 부르신 것은 인간 베드로의 연약함을 드러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만 그럴까요? 이 시몬이라는 이름 속에 베드로를 대표로한 모든 사람들의 연약을 다 담고 있습니다. 어느 날은 반석 같은 믿음을 소유한 자 같았다가 어느 날은 믿음이 있는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연약해져 넘어지고 실망하는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베드로와 베드로 속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고 계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을 주님께서 아신다고 대답을 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이렇게 대답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네 양을 먹이라” “네 양을 치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의 은혜를 생각해 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이 말씀은 시몬에게만 주신 말씀으로 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듯이 자신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황제 신상 앞에 분향하고 칼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살아나온 자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들은 모두 베드로가 괴로워했듯이 괴로워하고 심한 죄책감으로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명도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주를 위해 일어나려하면 사탄의 참소가 끊임없이 들렸습니다. “너 같은 것이 무슨 주의 일이냐”고 “네가 주님을 정말로 사랑느냐?”고 말입니다.
이런 그들에게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부인하고 배신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우리는 “시몬”, “갈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과거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만 생각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제 넘어졌어도 오늘 다시 일어나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어제 부끄러운 일을 행했었어도 그것 때문에 넘어져 오늘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해야 함에도 사탄의 참소로 그 일을 못하는 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앞에 나와 예배하고 찬송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도 이 말씀을 동일합니다. 그러기에 세 번에 걸쳐 이 질문과 답과 명령을 해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은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생각하면서 이 말씀을 기록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의 문화대로 동일한 단어나 문장을 두 번 이상 반복하면 그것은 아주 중요하거나, 반드시 그렇게 되거나, 해야 할 것을 말씀하는 것처럼 이미 죄를 사했고 끊임없이 주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날마다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지만 주님께서 맡겨주신 복음전파의 사명, 그물을 내려 사람을 낚는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주님은 베드로의 미래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1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주님은 이제 베드로의 삶과 죽음에 대해 예언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다니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요한은 해석해 주었습니다.
1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는 네로의 박해 때 십자가에 거꾸로 박혀 순교했습니다. 시몬이었던 베드로, 그는 예수님의 이 놀라운 사랑과 용서의 은혜를 입고 성령의 충만을 입었기에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주를 위해 드린 자가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를 위해 삶을 드리고 있습니다. 왜 그들을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왜 성도들은 기꺼이 주를 위해 물질과 시간 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내어드리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주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장로교회 성도들은 열심히 없답니다. 이단들이나 카톨릭 성도들은 착하게 살려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려고 하는데 장로교인들을 그렇지 않은 것 같답니다. 정말 그런가요? 만약 그렇다면 장로교 교리가 문제가 아니라 아직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얽매이고 벌을 받을까 두려워 말씀대로 사는 것은 수준 낮은 신앙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은 은혜에 감사하여 기꺼이 삶을 드리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적게 탕감 받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많이 받은 자는 많이 사랑하느니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예고 받은 베드로는 혼자 그렇게 죽는 것이 두려웠는지 요한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주님께 물었습니다.
2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베드로의 이런 모습은 객관적으로 이 성경을 읽고 있는 우리들에게 미소 짓게 합니다. 여전히 연약하고 자신만 고난을 당하기에는 억울함과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을 우리에게 끌고 오면 이러한 질문을 결코 웃을 수 없는 현실이 됩니다.
우리들은 신앙생활하면서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그것은 “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아감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는 형통을, 어떤 이는 고난을 주시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대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자신이 고난을 당하면 곁에 함께 신앙생활 하는 사람과 비교하여 “왜”라고 묻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에는 정확한 답이 없습니다. 열왕기하 4장 1절을 보면 선지생도의 아내가 엘리사에게 와서 자신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죽었나이다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줄 당신이 아시는 바이니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처자식에게 빚더미를 안기고 죽어 그 자식들은 노예로 팔려가게 하신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형통이라는 말이 붙어야 어울립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예배도 잘하고 헌금도, 헌신도 잘 했는데 갑자가 병을 얻거나, 사고를 당한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이고 주변의 성도들과 비교하며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오늘 베드로의 질문은 우리의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불공평하다고 생각지 않을까요?
그것이 하박국의 고민이고 질문이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어찌하여 내게 죄악을 보게 하시며 패역을 눈으로 보게 하시나이까 겁탈과 강포가 내 앞에 있고 변론과 분쟁이 일어났나이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합1:2-4)
이러한 질문에 주님은 다음과 같이 답해 주셨습니다.
2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요한을 영원히 살게 한 들 너와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너는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비교하며 절망하고 힘들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냥 하나님만 바라고 갈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가난과 낮은 삶의 모습이 누군가와 비교하는 순간 갑자기 슬퍼지고 원망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럴 것 없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입니다.
조금 전에 보았던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님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2:4)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의 과거의 실수를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지난 과거의 실수와 연약에 붙들려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오늘이란 날에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살다가 때로는 고난을 당하고 원치 않는 죽음을 당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는 일을 내려놓거나 뒤로 돌이키는 자가 아니라 주를 위해 기꺼이 삶을 드리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