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라

예레미야 319-22

 

예레미야가 활동할 당시 남유다는 깊은 우상숭배의 늪에 빠져있었습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오늘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시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요시야 왕 때에라는 말입니다. 요시야 왕 몇 년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그들이 여전히 우상숭배 가운데 있는 것을 책망하고 있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은 요시야가 왕이 된지 18년 이전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기는 우상숭배가 오래되어 뿌리가 깊게 내린 때였습니다. 요시야의 할아버지인 므낫세가 55년을 통치하고 요시야의 아버지 아몬이 2년을 통치하는 동안 하나님의 이름이 불리지 않았고 심하게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지자나 제사장들을 모두 죽였던 때였습니다. 그리고 요시야 18년에야 종교개혁을 했으니 75년간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던 나라였습니다. 요시야가 종교개혁을 했다고 해서 온전히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우상숭배와 죄악은 이미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남유다의 죄를 책망하면서 돌아오라고 외치고 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입니다.

 

먼저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본문에서 아내를 버렸다는 말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린 이유는 그 아내가 음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버려졌고 그 여자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를 다시 아내로 맞을 수 있느냐는 비유를 들어 유다가 수없이 많은 음행을 하고도 자신에게 돌아오려고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말은 돌아온 여자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전체의 의도를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라 내가 받아들이겠는 말입니다.

 

이제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라 그러면 받아들이겠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보도록 합시다.

먼저 주님은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계십니다.

2절과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은 남유다의 모든 곳과 사람들이 음행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행위에 대해 비유하기를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아라바 사람들이 음행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아라바 사람들이 여행자를 기다렸다가 약탈을 하거나 상단을 유치하기 위해 기다리듯이 유다는 온 관심과 생각이 음행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단비는 건기를 끝내고 우기가 시작되는 때에 내리는 이른 비를 말하고 늦은 비는 추수 때에 내리는 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단비와 늦은 비가 없다는 말은 그들의 삶에 기근이 임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본문의 말씀대로 하면 창녀의 낯을 가져 수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음행을 행하고 수치를 모르는 그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믿음 때문입니다.

4절과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 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 하시니라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오래 참으심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이시오니 노여움을 한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품으시겠나이까라고 합니다.

 

본문의 청년 시절의 보호자시오니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이미 22절에서 언급되었습니다. 기록되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라는 구절입니다.

 

유다는 하나님께서 청년 때의 사랑을 기억하고 계신 것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그분과의 신혼의 때의 사랑이 계속되고 있으라고 생각하며 담대해 졌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 청년 때의 보호자, 사랑이 많으신 분등으로 만들어 놓고 자신들은 온갖 죄를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 청년 때의 사랑을 기억하고 계신 분, 오래 참으신 분으로만 만들어 놓고 자신들의 욕심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세상과 짝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며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을 아모스는 그의 책 66절에서 요셉의 환난에 대하여는 근심하지 아니하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환난에 대해 근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요셉이 왕자처럼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노예로 팔려가 살았던 것을 말하는 것으로 오늘 누리는 부와 쾌락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하고 계속해서 그것을 추구하며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레미야는 이미 우상숭배와 죄로 인해 심판을 받은 북이스라엘과 아직 망하지 않았지만 그 죄로 인해 망하는 길을 가고 있는 유다를 비교하며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내쫓고 그에게 이혼서까지 주었으되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도 가서 행음함을 내가 보았노라

 

6절부터 이미 망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비교하며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기를 북이스라엘은 배역한 존재라고 말하고 남유다는 반역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배역했다고 하고 남유다는 반역했다고 하면서 배역한 이스라엘을 심판했고 그것을 유다가 보았음에도 더 심하게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배역과 반역에 차이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먼저 배역은 히브리어로 메슈바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뒤로 돌아감, 배신, 변절, 퇴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역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믿지 않던 예전으로 되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처음 솔로몬 사후에 이스라엘이 나누어질 때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던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송아지를 만들고 절기를 따로 정하며 돈만 내면 누구나 제사장이 되게 하여 우상숭배를 시작했고 단 한 번도 하나님께로 돌이킨 적이 없는 나라가 되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앗수르에 의해 철저히 심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배역한 이스라엘이 망한 것을 보도고 남유다는 배반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배반은 히브리어로 바가드라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불성실하게 대하거나 행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구체적인 방법은 배반하고 속이는 것으로 한 것을 말입니다.

 

바가드는 여러 가지 관계에서 불성실함에 대해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결혼 관계에서 불성실함에 대해 사용되었고(21:8, 2:14, 3:20). 또한 이 단어가 여호와께 대한 이스라엘의 불성실성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되었습니다(9:2). 그리고 바가드는 인간이 만든 약정과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 기대되는 사회적 책임을 깨뜨리는 것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는데 세겜 사람들은 자기네의 왕으로 삼았던 아비멜렉을 배반한 것(9)을 말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남유다가 하나님을 배반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으면서 언약을 지키고 않았고 결혼관계에 있으면서도 혼인관계에 성실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을 향하여 대항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북이스라엘은 단순히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망했는데 너희는 나를 대하여 배반하고 속이고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집을 바알로 더럽혔으므로 심판 받아 마땅하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셨는데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 형 오홀라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23:11)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아우 오홀리바는 유다는 형 오홀라는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북쪽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도 남쪽 유다에게 130년 정도의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의도를 열왕기하 819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그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저와 그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허하셨음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유다는 이스라엘보다 더욱 나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많은 사랑을 받은 자가 그 사랑을 버리는 것이 모르고 버린 자보다 더 악한 것입니다.

 

이러한 유다는 종종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한 돌아옴이 아니었습니다.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의 반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열왕기하 22장과 23장에 의하면 요시야 왕 때에 대대적인 개혁운동이 일어났음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들의 회개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 뿐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진실하지 않은 회개를 호세아서에서는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6:4)라고 하셨고 비 없는 구름, 쉬 없어지는 이슬에 비유하였습니다.

 

또한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속이는 활과 같으며 그 방백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인하여 칼에 엎드러지리니 이것이 애굽 땅에서 조롱거리가 되리라”(7:16).

 

이것이 이스라엘보다 더욱 패역한 유다의 죄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하고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13:4-5).

 

이렇게 범죄하여 심판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사실 그들을 심판하고 싶은 마음이 없으십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향해 돌아오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12절부터 14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너희를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하나님은 12절 중반절에서 돌아오라고 하시며 13절 전반절에서 자복하라고 하시고 14절 전반절에서 돌아오라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돌아오라고 하시는 주님은 그들로 하여금 돌아 올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는 자신에 대해 묘사하셨습니다.

 

12절 후반절에서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하였고 14절 후반절에서는 나는 너희 남편임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비유하셨던 집나간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습니다.

주님은 노한 얼굴로 대하지 않으시고 긍휼로 기다리며,

자녀 셋 모두를 다른 남자에게서 낳아 데리고 온 고멜을 포기하지 않는 호세아처럼 바보같이 미련한 남편으로, 집나간 자식을 매일 문밖에서 기다리시는 아버지처럼 주의 백성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2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하시니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주님은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고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온 백성들을 하나님은 속히 고쳐주십니다. 그래서 호세아서 62절은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이틀 후, 셋째 날이라는 말은 속히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행동처럼 더러운 옷을 벗기고 씻기며 새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운 후에 소를 잡아 동네잔치를 벌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고백하기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1절에서 그들이 말하기를 가령 사람이 그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가 그에게서 떠나 타인의 아내가 된다 하자 남편이 그를 다시 받겠느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네가 많은 무리와 행음하고서도 내게로 돌아오려느냐라고 한 말씀은 받아 주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비록 음행한 아내일지라도 그가 돌아오면 언제든지 받아 주시겠다는 강력한 표현이었던 것입니다.

 

본문에 그리하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지지 않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이라는 말은 버림받은 아내를 다시 받아드리면이라는 말입니다.

버림받은 여인을 받아들이면 그 땅이 크게 더러워진다는 것은 신명기 241절부터 4절에 근거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결혼의 신성을 위해서 불가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하여 이와 같은 처지인 것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요점이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도, 신약의 성도들도 하나님께 대하여 간음한 창녀와 같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를 용납하신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이 크게 손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자기 아들에게 대신 정죄하시고야 용납하실 수가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3:26)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저들의 배역을 자기 아들의 피로 치료해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율법적으로생각할 때에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사도 바울은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하고 말한 후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5:7-10) 하고 상식적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내게로 돌아올 수가 있단 말이냐”, 돌아올 수 없는 것을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신 것이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은혜인 것입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끊임없이 받아들였듯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멜의 고백은 남편이라 일컫고 바알(주인)이라고 일컫지 아니 하리라”(2:16)고 하였고 호세아의 가정을 비유로 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말씀하셨던 것을 결론부에서는 이스라엘은 내가 다시 우상과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 할지라”(14:8)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 우리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들은 언제든지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돌아오라는 말씀에 주저하거나 핑계를 대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패역과 죄악을 고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 뻔뻔해야 합니다. 염치없고 부끄럽지만 자신의 죄를 깨달고 하나님의 돌아오라는 음성이 들리거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언제든지 돌아서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용기 있는 자인 것입니다.

 

우리 한 구절만 더 읽겠습니다.

거꾸로 거슬러 가서 1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주님은 돌아오라는 말씀을 하시는 중에 당신의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바른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참 하나님의 사람으로 양육할 자를 붙여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후에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목자 되셔서 지식과 명철로 양육하여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6절에서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어 깨닫게 하시고 생각나게 해 주셔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게 행하는 우리의 자리,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통해 이루려고 하는 우상숭배에서 떠나 하나님께서 돌아서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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