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오려거든
예레미야 4장 1-4절
지난주에 예레미야 3장 말씀을 통해 “돌아오라”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이어서 오늘은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지 본문을 통해 보고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왔으나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항상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까지 끊임없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말라기 3장 7절에서도 하나님은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고 반문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반응한 것은 그들의 몸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 있었고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하고 있는데 왜 자꾸 돌아오라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자신에게서 멀리 있다고 말합니다. 이 시대 우리도 그러할 때가 많기에 우리를 향해서도 끊임없이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제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돌아보고 우리는 어떻게 주님께 돌아가야 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들을 인도하신 주님을 배반하고 떠났음에도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3:12) 그러면서 돌아오면 배역한 이스라엘을 고치시겠다(3:22)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르신 주님은 “누구에게로,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말씀하셨습니다.
먼저는 “내게로”입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부르시는 이가 “내게로”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내게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본문을 시작하면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라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돌아왔지만 결코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돌아오는 것은 마치 속이는 활(호7:16)과 같았습니다. 진심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주님께 돌아오는 듯 했으나 그들은 주님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얻어내는 어떤 것에 관심이 있을 뿐 주님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그들이 주님께 돌아와 부르짖는 목적을 말하기를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로 말미암아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호7:14)라고 하였습니다.
본서 2장 17절에서도 “그들의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들의 얼굴은 내게로 향하지 아니하다가 그들이 환난을 당할 때에는 이르기를 일어나 우리를 구원하소서”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께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생각과 추구하는 목적이 우리 속에 있는 죄성에 근거하여 자주 치우치기 때문입니다. 마치 밸런스가 깨진 바퀴를 달고 달리는 자동차의 핸들이 자꾸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처럼 우리들의 본성이 기회만 있으면 죄와 세상을 향하기 때문에 핸들을 꽉 잡아 주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있지만 끊임없이 주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신 주님은 어떻게 돌아와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 번째로 그것은 우리가 읽은 대로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입니다. 가증한 것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하고 있습니다.
“가증한 것”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쉬쿠츠”로서 구약에서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인데 “몹시 싫어하는 것”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불결한 의복(나3:6), 우상에게 바친 음식(슥9:7), 그리고 우상(왕상11:5; 왕하 23:13; 대하15:8)을 가리킵니다. 때로는 거짓 신들을 섬기는 사람을 뜻하기도 하였습니다(호9:10).
예레미야는 이스라엘백성들의 우상숭배와 죄 된 삶을 가리켜 ‘가증한 것’이라고 말하며 그러한 삶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히 맺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곱도 벧엘에 올라가면서 자신의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창35:2)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가족들은 야곱에게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창35:4)을 야곱에게 주어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올라갔습니다.
주께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은 이런 가증한 것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가증한 우상과 죄악들은 하나님과 양립될 수 없고 화합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증한 것들을 버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버리다”는 히브리어는 “수르”라는 말입니다. 이는 “옆으로 빗나가다, 고개를 돌리다, 벗어나다, 떠나다, 제거하다, 끝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가증한 것을 버리라는 말은 그것을 버리는데 다시는 눈도 두지 말고 완전히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것과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 안에서의 전쟁규례는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죽이게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우상숭배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칠 악한 영향 때문에 그 가능성조차도 완전히 멸하게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편지하면서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살전5:22)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우상숭배와 죄악들에 대하여 우리가 그렇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3절에서 말하기를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향락과 무법한 우상 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따라 행한 것은 지나간 때로 족하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족하다는 말은 더 이상 우리와는 무관하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6장에서도 11절은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자로 여기라는 말은 반응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성도는 오직 의에 대하여만 반응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 속에 여전히 있는 가증한 것들을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버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 돌아가는데 있어 흔들리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자세입니다. 그래서 1절 후반에 “네가 흔들리지 아니하며”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흔들리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누드”라는 말입니다. 이는 “이리저리 움직이다, 흔들다, 방황하다”는 뜻의 단어입니다.
왜 주님께로 돌아오는데 두 번째 자세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상과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돌아오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쉽지 않음은 그것들을 버리는 것에는 대가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상과 그것이 주는 것 같은 쾌락과 부요를 포기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데 이러한 것에서 자유로는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떠날 때 뒤를 돌아본 롯의 아내처럼 우리들은 세상에서 버리고 온 것들을 자주 뒤돌아보며 그것이 주는 풍요와 쾌락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9:62)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리석은 비둘기같이 때만 되면 세상으로 향합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의 아내감을 찾아오라고 종을 보낼 때 철저히 다짐 시켰던 것은 친족 중에서 아내감을 찾아올 것과 이삭을 그곳으로 데리고 가지 말 것이었습니다.
바울도 부활의 영광에 대해 가르치면서 성도로서의 삶에 힘을 다할 것을 가르치면서 말하기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15:58)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풍요와 성공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고 인생에 즐거움은 교회 안에선 찾을 수 없고 오직 세상에만 있는 것처럼 속여 주님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한 것에 발목 잡혀 주님께로 온전히 돌아서지 못하는 자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을 굳게 잡고 주님께서 원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의 노년의 고백은 우리들에게 귀한 도전이 됩니다. 말하기를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 돌아서는 세 번째 자세는 “여호와의 살아계심 앞에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맹세하는 자세”입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여호와의 삶을 두고 맹세하면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거짓과 죄를 합리화하고 감추기 위해 수많은 맹세를 했습니다. 그들은 남의 것을 도둑질하고 하지 않았다고 하며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했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높이기 위해 자신를 미화시키는데 맹세를 하곤 했습니다.
레위기 6장 2절과 3절을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께 신실하지 못하여 범죄하되 곧 이웃이 맡긴 물건이나 전당물을 속이거나 도둑질하거나 착취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줍고도 사실을 부인하여 거짓 맹세하는” 행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의 것을 훔치고 착취하고 거짓말 하였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주님의 동생 야고보도 “맹세하지 말지 말라”(마5:34, 약5:12)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유익이나 죄를 감추기 위해 하는 맹세와는 다르게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위해 하는 맹세를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돌아오는 자는 진실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인 주의 말씀에 입각해 거짓 없는 진실 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정의와 공의로 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정의와 공의는 히브리어로 “미슈파트”와 “츠다카”라는 말입니다. 이는 이웃과 마음을 같이하며 자신에게 대하듯 이웃을 대하는 올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또한 외모나 뇌물에 휘둘리지 않고 올바르게 내린 판결과 연관되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의와 공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웃과 정의롭고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규정하며, 특히 가난한 이웃을 향하여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명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18:19)입니다.
바로 여호와의 도를 지켜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은 자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과 함께 이 사명도 함께 받은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날마다 순간마다 말씀 앞에서 이 거룩한 맹세를 하고 지켜 살아가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다시 말씀드리면 주의 백성이 가증한 것을 버리고 흔들이지 않으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맹세하며 돌아와서 살면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2절 후반에서 읽은 대로 “나라들이 나로 말미암아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고 한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쉬운 성경은 “그러면 모든 나라들이 여호와의 복을 받고, 여호와를 찬양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은 주의 백성들의 회복을 통해 회복되고 복을 받는 것입니다. 나아가 주님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알지 못하지만 세상이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9절은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이러한 놀라운 일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세상이 복을 받기 위해 주의 백성들이 가증한 것을 버리고 흔들이지 않으며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맹세하며 돌아와서 살아야 한다면 이를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3절과 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와 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 악행으로 말미암아 나의 분노가 불 같이 일어나 사르리니 그것을 끌 자가 없으리라”
먼저는 묵은 땅을 갈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호세아 선지자가 이미 말했었습니다. 호세아는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공의를 심고 인애를 거두라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마침내 여호와께서 오사 공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호10:12)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묵은 땅”은 히브리어로 “니르”라고 합니다. 이는 오랫동안 경작을 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한 땅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니르’라는 단어가 말하는 ‘묵은 땅’은 경작된 바가 없는 “새 토양”을 뜻하는 말입니다. 결국 본문은 형식적이고 피상적 회개가 아닌 근본적 회개를 요청하는 내용으로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마9:17; 막2:22)라는 예수의 비유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묵은 땅은 말씀을 항상 듣기만 할 뿐 한 번도 그렇게 살아보지 않은 것에 대해 실천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끊어야 할 것도 알고 돌아서야 할 것도 알지만 온전히 실천하지 않았던 수많은 주의 요구에 이제는 응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가시덤불에 파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다'라는 토지가 과거, 특히 므낫세 통치 이후에 악행이라는 가시덤불로 만연되어 있으며, 유다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새 토지를 경작하는 것뿐임입니다. 즉 우상 숭배와 죄로 인해 야기된 온갖 종류의 폐단들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곧 가시덤불을 회개와 순종이라고 하는 쟁기로 갈아서 온전히 제거해 버리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묵은 땅을 기경하고 가시덤불을 제거하는 것은 너무 오래된 습관과 죄악을 갈아엎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경이 우리에게 계속해서 죄의 영향을 끼친다면 그 환경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이것들을 제거하지 않고 씨앗을 파종하면 그것들이 성장을 막고 열매 맺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이 가시덤불을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마지막 것은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라는 것입니다.
할례가 이스라엘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스라엘에서는 여호와의 백성임을 나타내는 표시였습니다(창17:1-14). 나아가 할례를 통해 할례 이전의 과거는 죽고 새롭게 되어 다시 태어남을 의미했습니다. 그러기에 할례를 통해 과거를 끊으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하라는 말이 상징하는 바는 잘라내는 것입니다. 과거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요구한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실하게 기다리지 못한 불신앙을 끊어내는 것이고 여호수아에게 요구한 할례는 광야의 불순종을 끊어 내는 할례였습니다.
이러한 할례를 요구하는데 남성의 성기 표피가 아니라 마음 가죽을 베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외적인 어떤 행동이 아니라 그것의 원인인 마음의 회개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지성과 의지, 감정 등을 다 포함하는 내적 삶의 전체를 뜻합니다. 즉, 마음이 이방인으로 남아 있는 한 물리적인 할례 의식으로는 언약의 취지를 달성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의 할례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례를 행하라고 하시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 강제로 행함을 입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절대로 버려두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원하는 것을 들어주신다는 것 뿐 아니라 당신의 자녀를 향한 징계도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2장 6절부터 8절에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헬라어로 징계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이데이아”입니다. 이는 “교육, 훈련, 교정”등을 의미하는 단어인데 이는 “사람 만들다” 뜻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행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하지 않으면 4절 후반부터 4장 끝까지 말씀하고 있는 징계가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난주와 오늘 말씀이 “돌아오라”는 주제와 “돌아오려거든”이란 주제였습니다.
바라기는 묵은 땅을 기경하며 마음을 할례를 행하는 일을 통해 가증한 것들을 버리고 세상이 주는 거짓 즐거움과 풍요에 흔들리지 말고 진실과 정의와 공의로 주께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