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만도 못해서야
예레미야 8장 1 - 7절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도 이와 비슷한 표현들을 사용하여 그들의 죄와 잘못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그 백성을 향해 “금수만도 못한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1장 3절은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우리가 읽은 8장 7절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새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새만도 못한 인간이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변함없이 심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1절부터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유다 왕들의 뼈와 그의 지도자들의 뼈와 제사장들의 뼈와 선지자들의 뼈와 예루살렘 주민의 뼈를 그 무덤에서 끌어내어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그 뼈가 거두이거나 묻히지 못하여 지면에서 분토 같을 것이며 이 악한 민족의 남아 있는 자, 무릇 내게 쫓겨나서 각처에 남아 있는 자들이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은 당시 사람들이 가장 치욕적인 죽음에 대한 묘사로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시체를 끄집어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뼈의 주인이 어떤 한 부류의 사람들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왕들, 지도자들, 제사장들, 선지자들, 백성들의 뼈입니다. 어떤 한 부류도 예외가 없이 모든 사람들의 뼈를 무덤에서 끌어내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것은 느낌으로도 알 수 있듯이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온전한 자가 없었습니다. 총체적 부패였습니다. 심지어는 제사장과 선지자도 부패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무엇이라 말합니까? 그들의 뼈를 끌어내어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 별 아래에 펼치겠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섬겼던 것들을 열거하는데 그들이 섬겼던 것들이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 우상 앞에 펼쳐 놓아 수치를 당하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이 심판이 얼마나 힘들고 수치스러울지에 대해 말하기를 그들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정복자였던 바벨론은 이스라엘의 무덤을 파헤쳤습니다. 그것은 단지 바벨론 세력만 그렇게 행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정복자들은 무덤 속에 함께 묻혔던 부장품들을 찾고 정복된 자들에게 모욕을 주기 위해 무덤을 파헤쳤습니다. 그렇게 파헤쳐진 무덤에서 나온 뼈들은 해와 달과 뭇별들 아래 거름과 같이 뿌려졌던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의 사람들은 이 심판을 받아야 할지 모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 뿐 아니라 교회 안에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라 자신이 의지하는 것들이 원하는 삶 즉, 세상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그의 책 4장 6절에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호세아는 안타깝게 외치기를 6장 3절에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6장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시는데 말씀하시기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결과적으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그들의 패역을 하나 더 지적하고 계십니다.
4절부터 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찌함이냐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악을 뉘우쳐서 내가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하나님은 4절부터 6절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을 몇 가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느냐”는 것과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엎드러지면 일어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죽지 않는 한 엎드러진 자는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비유하신 것은 그들의 영혼이 사망의 상태에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 “떠나갔다,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갔다, 고집을 부리고 돌아오기를 거절했다, 자신들의 악을 뉘우치는 자가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외치는 하나님의 소리는 울리는 꽹과리 소리가 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영혼은 죽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에게는 사망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말한 것이 “전쟁터로 향하여 달리는 말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죽을 줄도 모르고 전쟁터로 달리만 하고 있는 말같이 막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제가 종종 한국교회의 현재를 표현 할 때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언덕을 내려가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현재 우리 한국교회는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바르지 않은 말씀을 분별하지 못할 뿐 아니라 바른 말씀을 전해도 듣지 못합니다.
영어 단어 하나 모르는 것은 부끄러워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 무지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법을 어기는 것은 얼굴을 들지 못하여 옷으로 가리고 모자이크 처리해 주기를 바라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인간의 도리를 행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워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의 도리를 행하지 못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러한 것을 말하면 시대에 뒤쳐진 고리타분한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상한 현상이 오늘날에만 있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 당시에도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13장 23절에서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그들의 죄가 너무 깊어 돌이킬 수 없는 상태까지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아모스도 그의 책 6장 12절에서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겠느냐”고 하고 있습니다.
위에 모든 말씀들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표범이 반점을 없애지 못하듯, 구스인이 피부색을 바꿀 수 없듯, 말이 산에서 못 달리고 소가 바위를 갈 수 없듯이 하나님의 사람은 세속적으로 살 수 없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끊임없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정의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산비둘기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들이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본문에 학, 제비, 두루미는 철새입니다. 그들은 때가 되면 날아갔다가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오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비둘기는 집을 나갔다가도 때가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회귀본능을 갖고 있는 새입니다. 왜 주님은 이 새들을 언급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는 것에 대해 책망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선지들을 비롯하여 많은 현상들을 통해 부르셨지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전쟁으로, 때로는 메뚜기 재앙으로, 때로는 전염병으로, 때로는 기근으로 불렀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새만도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하면 새대가리만도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했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새만도 못합니다. 강단에서 외쳐도 듣지 못하고 일상의 삶 속에 주님께서 깨닫게 해주셔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영적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사람들 같습니다.
왜 당시 사람들과 현대 교인들이 이렇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였기 때문입니다.
먼저 8절과 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냐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안다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8절 후반에 “서기관의 거짓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공동번역성경은 “보아라, 거짓 선비의 붓끝에서 법이 조작되었다”라고 했고 새번역성경은 “사실은 서기관들의 거짓된 붓이 율법을 거짓말로 바꾸어 놓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하고 망하게 된 원인은 말씀을 맡은 서기관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왜곡하였습니다. 말씀을 자신들이 원하는 말로 조작하여 전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백성들은 바르지 못한 말씀을 들었고 그것이 진리인줄 알고 따랐습니다. 그러기에 바른 말씀을 전했을 때 백성들은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심지어는 반항하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역자들이 말씀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바르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교회를 유지하고 자신의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불의에 눈감고 하늘의 복을 땅의 복으로 대치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들은 슬픈 이야기는 어떤 교회에 신천지교인들이 있는데도 내 쫓지 못하고 보고만 있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나가면 교회의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자칫 잘못하면 교회를 닫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지켜만 보고 있답니다.
우리교회에 신앙생활 하다가 사정상 교회를 옮기신 분이 얼마 전에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서 있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 교회는 연말에 일명 말씀 뽑기를 하는데 그것을 목사님이 집례하면서 “이것에 대해 비판하는 분들이 있는 줄 알지만 이것을 통해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기에 한다”고 하면서 했답니다. 바르지 않다는 비판이 있음을 알면서도 그것이 주는 유익을 위해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바른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하고 그렇게 훈련된 성도들은 말씀에 대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말씀을 말씀 그대로 받지 못하고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 쪽으로 재해석하고 선별하여 받는 자가 됩니다. 결과적으로 무능력한 교인, 심지어는 사탄의 밥이 되는 교인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비롯한 말씀 사역자들이 말씀을 어느 부분을 왜곡하여 순간의 이익을 얻을 수 있고 잠시 성도들을 위로하고 보이는 교회에 성장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행위가 되기에 결과적으로는 교회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왜곡하는 자들에게는 이유가 있습니다.
10절부터 12절에서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1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밭을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욕심내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먼저는 욕심입니다. 말씀을 왜곡하는 이유는 욕심에 기인합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에스겔서 13장 19절에서 “너희가 두어 움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내 백성 가운데에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를 비롯한 이 땅의 교회 지도자들은 욕심을 끊임없이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욕심 뿐 아니라 주의 일이라고 포장한 자신의 욕심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영혼들의 삶을 쥐어 짜 목회자의 욕심을 채우면 안 됩니다. 자신의 욕심을 주의일로 포장하고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여 성도들을 과하게 지치게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부자인데 성도들은 가난하게 하고 그것을 당연히 여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말씀을 왜곡하여 전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말씀을 전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는 일은 영혼을 죽이고 교회를 무너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역자들 뿐 아니라 이 땅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세속적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욕심은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합니다. 주님은 마가복음 4장 19절을 통해 가시밭에 말씀이 뿌려진 것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에 대한 욕심, 성공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 15절에서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라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려야”(엡4:22)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왜곡하는 이유의 첫 번째는 욕심입니다.
이어서 두 번째는 백성들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는 자세 때문입니다.
1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당시 지도자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상태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했습니다. 마치 그냥 내어버려두면 죽게 되는 환자에게 괜찮다고 말해주는 의사와 같습니다. 속히 치료하면 나을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말씀을 맡은 자들도 마찬 가지입니다. 바르게 가르치면 처음엔 부딪히고 갈등하지만 그 속에 있는 주의 영의 활동하심으로 인해 고쳐지고 바르게 가게 살 수 있는데도 그 백성들의 상태의 심각성을 알지 못하여 방치하고 심지어는 거짓 평안의 약을 처방하여 돌이킬 기회도 주지 않고 죽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맡은 자들이 백성들의 죄를 지적해주어 자신들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보게 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끊고 돌이킬 수 있었는데 그들은 반대로 행했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거짓 평안의 약을 처방했다고 했듯이 당시 영적 지도자들은 백성들을 향해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망하는 길을 가면서도 고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같은 시대 다른 곳에서 말씀을 전했던 에스겔도 “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겔13:10)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했기에 백성들에게 바른 말씀을 가르칠 수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에게 잘해주면 복을 빌어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회 속에 편만하게 나타나고 있는 죄악과 영적 타락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고 그러기에 지적도 하지 못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도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사회의 타락과 영적 타락이 극을 달리고 있음에도 교회에서는 죄에 대한 설교나 회개를 외치는 설교가 없습니다. 성도들을 세속적 가치로 위로하고 이 땅의 복에 대한 설교나 교훈적인 설교가 강단을 장악하고 있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강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예기나 우스갯소리를 하여 성도들을 즐겁게 하는 곳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진실로 죄를 회개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게 하고 거룩한 삶에 대한 강력한 요구를 하는 설교는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그것은 이 땅의 영혼들이 얼마나 심각한 병에 걸렸는지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평강만을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세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귀가 없습니다.
세 번째는 자신들의 행위를 부끄러워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왜곡합니다.
1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온갖 음행과 우상숭배를 하고 있음에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 죄를 지적하는 선지자들을 박해했습니다.
이러한 일은 고린도교회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교회문제의 집합소라고 할 정도로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내에서 파당을 나누어 싸웠고 음행을 하였으며,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게 일컫는 것은 생각도하지 않고 법정싸움을 하였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이러한 일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도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땅의 교회가 점점 인본주의 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인본주의에 빠진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 예배드리고, 헌금하고, 찬송합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말하지만 중심과 목적은 자기 자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의와 거룩, 바름과 사랑, 공의와 정직입니다. 그러한 것이 차고 넘쳐야 할 교회가 돈과 권력에 집착하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벨탑이고, 맘몬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양심에 화인을 맞지 아니하고서는 이렇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행한 죄에 대해 전혀 양심에 가책도 못 느끼고 부끄러움도 없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종이 되기를 포기한 자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 주의 백성들은 자신의 바르지 못한 행위로 인해 가슴을 치며 어떻게 행해야 옳은지를 고민하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제목이 “새만도 못해서야”입니다. 우리들도 종종 세상에 취하여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새가 때가 되면 자신이 갈 곳을 알아 찾아 가듯이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가야할 하나님의 품,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돌아 올 줄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