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자랑

예레미야 923-24

 

어떤 중년부인에게 남편이 반지를 해줬답니다. 그 여인이 그 반지를 끼고 시장에 가서는 반지 낀 손가락으로 물건을 가리키며 이것은 얼마예요?”를 반복했답니다. 이를 계속해서 듣던 상인은 그 여인이 반지를 자랑하려는 것을 알고 자신은 손으로 입술을 들어 올려 금이빨을 보이며 가격을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랑을 하고 산다는 것일 것입니다. 금반지가 없으니 금이빨을 자랑해서라도 자신을 내세우고 싶은 것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은 자랑하는 맛에 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서 자랑거리를 찾고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그것을 드러내며 스스로 만족해하는 소이 속물근성이 모든 사람들 속에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성도들은 무엇을 자랑해야 하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성도의 자랑에 대해 말씀하시기 전에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고 계시고 이로 인해 예레미야의 슬픔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818절부터 91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슬프다 나의 근심이여 어떻게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내 마음이 병들었도다 딸 내 백성의 심히 먼 땅에서 부르짖는 소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 계시지 아니한가, 그의 왕이 그 가운데 계시지 아니한가 그들이 어찌하여 그 조각한 신상과 이방의 헛된 것들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는고 하시니 추수할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우리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하는도다 딸 내 백성이 상하였으므로 나도 상하여 슬퍼하며 놀라움에 잡혔도다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지 아니한가 그 곳에는 의사가 있지 아니한가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함은 어찌 됨인고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예레미야는 818절에서 슬프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여 추수 때가 지나고 여름이 다하였으나 추수되지 못한 밭의 곡식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받지 못하고 상함을 입고 있음을 인하여 슬퍼하고 있습니다.

 

또한 길르앗에는 유향이 있고 의사도 있음에도 이스라엘은 치료받지 못하였다고 하며 슬퍼합니다. 여기서 길르앗에 유향이 있고 의사가 있었다는 말은 길르앗에서 나는 향료로 의사들이 병을 고쳤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유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유향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향은 레보나라는 히브리어로 지금의 중동에서 생산되었고 그 값이 같은 무개의 금과 같았을 정도로 귀한 물건이었습니다. 이 유향과 달리 본문의 유향은 히브리어로 체리인데 이는 발삼나무에서 나는 수액을 농축한 향료이면서도 약재였습니다. 그 산지는 본문의 말씀대로 길르앗이었습니다.

 

이렇게 길르앗의 향료와 의사를 언급한 이유는 그들이 언제든지 찾아가면 회복시켜주는 하나님께서 계심에도 찾지 않아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음을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레미야는 91절에서 내가 내 백성을 위하여 울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와 파멸을 바라보면서 하도 울어 이제는 눈물 근원이 말라버렸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또 다른 눈물샘이 터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밤이고 낮이고 동포의 죄악을 한탄하며 울 수가 있을 것이랍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현대인의 성경은 내 머리가 우물이 되고 내 눈이 눈물의 샘이 된다면 죽임을 당한 내 백성들을 위하여 내가 밤낮 울 수 있을텐데라고 했고 새번역성경은 살해된 나의 백성, 나의 딸을 생각하면서, 내가 낮이나 밤이나 울 수 있도록, 누가 나의 머리를 물로 채워 주고, 나의 두 눈을 눈물 샘이 되게 하여 주면 좋으련만!”이라고 했습니다.

 

선지자의 이러한 슬픔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보며 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는 듯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하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심하게는 섬기지도 않는 한국교회가 추수 때를 넘겨 곡식이 밭에서 상함을 입고 있듯이 징계의 채찍을 당하고 있는데도 느끼지 못하고 여전히 세속적인 부흥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한국교회가 아직까지는 나름 풍요하기에 평안하다 평안하다하며 10-20년 후에 벌어질지도 모를 교회의 황폐함을 애써 모른척합니다. 마치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에게 내탕고를 보여주어 그 보여준 재물은 바벨론으로 옮겨 갈 것이고 히스기야의 후손은 바벨론의 환관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책망을 받고 난후에 내가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라고 한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풍요에만 관심 있을 뿐 우리가 저지른 이 세속적 신앙으로 인해 황폐함이라는 결과를 얻고 그것으로 고통 받을 우리 아이들의 영적 환경은 생각하지도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보는 눈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예수님과 함께 울고 성령님과 함께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얼마나 크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2절부터 6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광야에서 나그네가 머무를 곳을 얻는다면 내 백성을 떠나 가리니 그들은 다 간음하는 자요 반역한 자의 무리가 됨이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활을 당김 같이 그들의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며 그들이 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아니하고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각기 이웃을 조심하며 어떤 형제든지 믿지 말라 형제마다 완전히 속이며 이웃마다 다니며 비방함이라 그들은 각기 이웃을 속이며 진실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혀로 거짓말하기를 가르치며 악을 행하기에 지치거늘 네가 사는 곳이 속이는 일 가운데 있도다 그들은 속이는 일로 말미암아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예레미야는 광야에 자신이 머무를 곳만 있다면 이스라엘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간음하고 반역하며 활을 당겨 타인의 생명을 해하듯이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하여 타인에게 해를 가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악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만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읽은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판단하신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향해 서로 속이며 비방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고 하나님께서 그 속이는 자들 속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선지자로 울게 하고 떠나고 싶게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게 했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을 보시고 우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말씀하시기를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19:42-44)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이스라엘을 떠나 광야로 가기를 원했지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우리 모두의 죄악을 사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은혜를 입은 우리들도 예레미야를 넘어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 시대를 보고 울며 이시대의 아픔 안으로 들어가 복음을 위하여 죽어지는 삶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이 이렇게 패역해 졌을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간음하고 반역하고 속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그렇습니다. 간음하고 반역하며 속이기를 거침없게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간통죄가 폐기되자마다 사람들은 논에 물고 터지듯이 기혼자들 만남을 위한 싸이트가 생기고 회원이 폭주하며 나이트클럽이 사람들로 가득해졌다고 합니다. 불륜과 관련된 산업이 활성화 될 것이 예상되기에 관련 주식들이 오르는 슬픈 현실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죄악이 깊어진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본문 3절과 6절에서 반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3절 후반에서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했고 6절 부반에서는 나를 알기를 싫어하느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알기를 싫어한다는데 병의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4:6)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 돌아오라(14:1-2)고 호소했던 것입니다. 바른 성도의 삶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기 위해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해져 있기에 하나님은 그 백성을 향한 계획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이 구절을 현대인의성경은 그러므로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내 백성을 시련의 도가니에 넣어 금속처럼 연단하고 시험하겠다. 이 밖에 내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가니에 넣겠다는 것입니다. 도가니에 넣는다는 것은 순금을 만들기 위해 철광석을 부수고 녹이고 망치질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 속에 죄악이라는 불순물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 70년간 노예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그들 속에 있는 죄악들이 뽑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245절부터 7절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 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꼭 이렇게 고난의 도가니, 환란의 풀무불 속에 들어갔다가 나와야 주의 백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주의하여 듣고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가니와 풀무 속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13절이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기록되기를 그들이 내가 그들의 앞에 세운 나의 율법을 버리고 내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며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고라고 했는데 이 말씀과 반대로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취하고 주의 목소리에 순종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 봅시다.

오늘 말씀의 본문인 23절과 2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주님은 먼저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세 부류인데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고 부자는 그의 부요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지혜나 부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지혜와 부입니다. 하지만 중간에 말하고 있는 용맹은 히브리어 게브라라는 말로 , 권력, 세력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를 다시 말하면 지혜, , 을 자랑하지 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주요 자랑거리입니다. 지혜, , 돈은 세대를 초월하는 자랑거리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을 자랑하지 말하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죄로 말미암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음에도 사람들은 평강하다고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그들이 자랑하는 것들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자랑한다는 것은 그들이 의지하는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신이 자랑하고 있는 것과 의지하는 것이 같음을 봅니다. 돈을 자랑하는 자는 돈을 의지하고 자신의 힘을 자랑하는 자는 그 힘을 의지하고 자신이 지혜롭다고 자랑하는 자는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여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러한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본문의 말씀을 비롯해 자랑했던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봅시다.

 

본문의 말씀대로 지혜 있는 자 즉, 서기관들은 자신에게 율법을 아는 지혜가 있노라고 자랑했습니다. 본서 88절에서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며 두려워 떨다가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라고 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용사 즉, “게브라라는 말처럼 , 권력, 세력이 있는 자들은 그것을 자랑하고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부자는 그 부함, 즉 돈을 자랑했습니다. 이상은 우리가 읽은 23절에서 언급한 자랑거리입니다.

이 외에도 백성들은 성전이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러기에 74절에서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의 몸에는 할례의 표가 있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고 자랑했습니다(25).

 

그러나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성전, 율법, 서기관, , , 할례 등이 닥쳐올 멸망으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하여주기는커녕 도리어 없느니만 못한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하고 그것들을 의지하게 하여 자신들을 속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회개할 기회를 빼앗아 갔던 것입니다.

 

주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러했음을 성경은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할례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양 자랑했고, 성전을 자랑했으며, 율법이 자신들에게 있음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로마서 212절과 13절에서 하신 말씀을 알아야 했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무릇 율법이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헛된 것들을 자랑합니다. 교회 건물의 크기를 자랑하고, 교회 안에 사람의 숫자를 자랑하고 자신의 학벌과 재물을 자랑하고 자기 자녀들이 남들보다 조금 더 나은 것을 자랑합니다. 이는 히스기야가 바벨론 사신에게 내탕고를 자랑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내탕고를 보여주며 자랑할 것이 아니라 사신을 성전으로 이끌고 가서 하나님을 자랑해야 했던 것처럼 이 시대 우리들도 언젠가 모두 사라질 내탕고를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행하고 있는데 그러한 행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자랑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지혜와 힘과 부귀를 자랑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은 성도가 자랑해야 할 것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라고 하셨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하라고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당연히 히브리어 야다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여 아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4장을 보면 느브갓네살왕의 간증이 있습니다. 그는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신 것을 7년간 짐승처럼 살다가 돌아온 후에 고백하였습니다. 느브갓네살은 다니엘서 437절에서 고백하기를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바울도 고린도후서 125절에서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약한 것을 자랑한다는 것을 이 말씀 뒤에 기록된 9절에서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나아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915절에서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자신의 자랑이라고 한 것은 복음, 즉 그리스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시편 기자의 말처럼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20:7)라고 하는 자들이 됩니다.

 

이어서 자랑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문의 말씀처럼 사랑과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자입니다. 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바르게 아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마땅한 바인 것입니다. 이는 상사를 모시는 자가 상사에 대해 제대로 알고 그가 원하는 일을 함께 행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세 가지를 짧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는 사랑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랑이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이 말을 개역성경에서는 인애라고 번역했습니다. 헤세드란? 히브리어로 은혜, 긍휼, 인애, 자비, 신실한 사랑등을 뜻합니다. 즉 이 '헤세드'는 하나님 사랑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가 한량없음을 뜻하는 함축적인 단어인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시선이 정죄와 판단이 아닌 헤세드의 사랑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활동은 그의 백성의 불성실함과 두드러지게 대조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내어주신 십자가의 사랑처럼, 또 다윗이 대적의 후손인 므비보셋을 끌어안아준 것처럼 복음으로 세상을 사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 사랑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헤세드를 오해할까싶어서 그런지 다음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정의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종종 방종과 바꾸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속성을 제어해 주는 하나님의 속성은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정의란 미슈파트라는 말인데 샤파트라는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뜻은 재판, 심판입니다. 이 단어를 어근으로 두고 있는 또 다른 단어가 있는 우리가 잘 아는 사사라는 뜻의 쇼페팀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과 동시에 정의를 행하시는 분이시라는 뜻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이 말을 공의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의 정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레위기 제사제도에서 죄인의 죄를 속하기 위해 재물의 머리위에 안수하여 죄를 재물에게 모두 전가시키듯이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 우리의 죄를 전가시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이심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정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나아가 정의를 행하신다는 것은 여호와는 심판자로서 행악자들의 활동을 제한하시고 그를 처벌하십니다. 반면에 의인을 구원해 주시고 그를 위해 변호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 압제받는 자들은 하나님께 호소할 수 있었던 것이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불러 그들 사이에 판단해 줄 것을 요청할 수 있었습니다(16:5; 5:21; 26:1;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의 권리가 완전히 보장받기를 원하셨던 것이며, 이것은 그가 '미쉬파트', , “정의를 세우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공의란 히브리어로 체다카라는 말인데 이는 의로움, 공의, 의로운 행위라는 뜻입니다. 개역성경은 이 단어를 정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 중에,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 중에 편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모스는 아모스서 524절에서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하나님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6:33).

 

그렇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호세아서 126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라고 했고 미가는 미가서 31절에서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라고 했습니다.

 

한편 이사야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에 메시야께서 미쉬파트와 체다카”, “정의와 공의를 가지고 다스리실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9:6).

 

이렇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며 알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백성들이 자신들의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사랑과 정의와 공의”, 이는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씀인데 그러므로 우리를 구원하심도 사랑과 정의로 행하신 공의로운행사였음을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는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신 십자가 사건에 동시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를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만이 신구약을 막론하고 유일한 구원의 방도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알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자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그리스도께 나오며 나아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과 정의와 공의의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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