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예레미야 16장 14-21절
예레미야를 주인공으로 한 성경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의 초반을 보면 예레미야는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아나돗 들판에서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는 중에 예레미야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분향한 후에 돌아와 결혼하기로 약속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결혼하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각시키기 위해 설정 된 장면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를 오늘 본문을 통해 보면서 주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2절부터 4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이 곳에서 낳은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머니와 그들을 낳은 아버지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오니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묻어 주지 않아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리라”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때에 예레미야가 결혼하여 아내를 두고 자녀를 둔다면 그것은 가장으로서 감당 할 수 없는 고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하시고는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 특별히 결혼하여 자녀를 낳은 자들과 그들이 낳은 자녀들은 모두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독한 병으로 죽거나 칼과 기근에 망하여도 그들을 매장해 줄 사람도 없고 슬퍼해 줄 사람도 없을 것을 말씀하심으로 그 땅이 당할 고난의 정도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심판에 대해 강도를 더해 가면서 말씀하십니다.
5절부터 7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 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머리털을 미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 죽은 자로 말미암아 슬퍼하는 자와 떡을 떼며 위로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그들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상사를 위하여 위로의 잔을 그들에게 마시게 할 자가 없으리라”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은 이제 초상집에 들어가지도 말고 통곡하거나 애곡하지도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초상집이 부정해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앞으로 닥칠 민족적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한 개인의 죽음 앞에 슬퍼할 겨를이 없을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과 7절에서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 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머리털을 미는 자도 없을 것이며 그 죽은 자로 말미암아 슬퍼하는 자와 떡을 떼며 위로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그들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상사를 위하여 위로의 잔을 그들에게 마시게 할 자가 없으리라”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와 민족의 현실이 그렇습니다. 심각하게 부패하여 하나님의 진노의 때가 문 앞에 이른 것입니다. 아니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국교회의 무능과 죄로 인하여 심판하고 계신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아직은 교회의 규모가 있고 아직은 교회가 소리를 내는듯하여 살아있다고 말들을 하지만 실상은 심각한 병이 들어 어디서부터 치료해야 할지를 모르는 상태인 것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이 그러한 것입니다. 이 심각한 상태에 대해 5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5절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을 심판하시는 모습에 대해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서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했다는 것은 가혹하고 철저하게 그리고 무자비하게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서 4장에서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기고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하고 엘리와 그의 두 아들이 죽었을 때 그날 엘리의 며느리, 비느하스의 아내가 아들을 낳고 죽었는데 그 여인은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이가봇” 즉,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고 지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평강도 인자도 사랑도 제하겠다고 하신 것은 “이가봇”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서 떠나 그룹 위에 머문 것(겔10:18)을 보았던 에스겔의 상황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8절과 9절을 보면 예레미야에게 잔칫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8절과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잔칫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 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
하나님은 왜 예레미야에게 잔칫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선지자가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 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라고 외치면서 자신은 잔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고 있다면 자신의 설교를 스스로가 부인하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향해 왜 이렇게 무자비하게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1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네가 이 모든 말로 백성에게 말할 때에 그들이 네게 묻기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이 모든 큰 재앙을 선포하심은 어찌 됨이며 우리의 죄악은 무엇이며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냐 하거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심판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심판하느냐고 물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자신이 당하는 어려움 앞에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런 어려움을 겪느냐고 묻습니다.
열왕기상 17장을 보면 엘리야가 머물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습니다. 이에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에게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왕상17:18)하고 하였습니다.
욥도 고통 가운데 부르짖기를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욥31:35)라고 하였습니다.
인생들은 본능적으로 고난이 오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절대자에게 묻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에게 대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 묻고 따지기만 할 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는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졌을 때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려하거나 하나님의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오직 법궤만을 들고 나갔던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시간에 말씀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고난의 때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때인 것입니다.
이렇게 묻는 중에 문제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범한 죄는 무엇이뇨” 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죄악을 책망하고, 큰 재앙을 광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때에도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하고 책망하시니까,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1:6) 하고 항변했고,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이까”(2:17) 했으며,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3:13) 하고 도리어 대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죄를 범한 것만이 문제가 아니라 더욱 치명적인 문제는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한 죄가 무엇이뇨” 하고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있다는데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은 환란과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지만 이들과 같은 강팍함이 있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여간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왜 그런 고난을 당해야하느냐고 물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이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11절부터 13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조상들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에게 절하고 나를 버려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너희가 너희 조상들보다 더욱 악을 행하였도다 보라 너희가 각기 악한 마음의 완악함을 따라 행하고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내가 너희를 이 땅에서 쫓아내어 너희와 너희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땅에 이르게 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주야로 다른 신들을 섬기리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지 아니함이라 하셨다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완악하게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버렸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람처럼 행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연인이 헤어지고 난 후 우연히 길에서 만났으나 아무관계 없는 사람처럼 행한 것입니다. 심하게는 하나님께 반역한 것입니다. 이미 3장 7절에서 보았듯이 하나님을 반역한 것입니다. 반역이란 히브리어로 “바가드”인데 계약관계 속에서 속이거나 하극상을 벌이고 배반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섬겼다고 말합니다. 질투가 많으신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는 것을 너무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가리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서로 사랑하는 관계인데 사랑하는 그 백성이 다른 상대에게 눈길을 주고 그에게 가서 안기는 것에 대해 질투하신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백성을 정말 사랑하시기에 당신의 백성이 다른 신에게 가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다른 신을 섬겼다는 것은 우상숭배를 한 것을 말합니다. 우상이란? 무엇일까요? 영어로는 “Idol”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 “eidolon”, 라틴어 “idolum”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단어의 어근이 “id”입니다. 이는 “생각하다, 보다, 동일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Video, Idea, Identification”라는 말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은 보고 생각하고 정체성을 갖게 합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은 그의 보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삶의 정체성이 그것에 고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은 모든 것이 돈과 관련되어 보이며 돈만을 생각하고 돈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쾌락을 우상으로 섬기는 사람은 당연히 모든 생각이 쾌락에 있고 쾌락과 관련된 것이나 관련하고 보고 쾌락에 붙들려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사람이 새기거나 부어 만든 형상을 가리켜 “우상”이라고 말할 때가 많습니다. 십계명 중 제2계명에 나오는 우상이 바로 그것인데, 히브리어로는 “세펠”이라고 합니다.(출20:4; 신5:8; 삿17:3; 사44:15, 17 등) 또한 “가증한 것”이라는 의미의 “식쿠츠”(신29:17)라고도 하며, “헛것”이라는 뜻의 “엘릴”(대상16:26; 시2:8; 96:5; 97:7)이란 단어가 있고 “길룰”(레26:30; 신29:17) 그리고 “아웬”(삼상15:23; 사66:3)과 “드라빔”(삼상15:23) 같은 단어도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우상이라고 말 할 때는 사람이 만든 것으로 헛되고 가증한 것이란 의미로 쓰였습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고 그것을 신이라고 섬기기에 헛되고 가증한 것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우상숭배를 하는 근본 원인은 “탐심”에 있다고 바울은 정의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3장 1절부터 6절에서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땅에 것과, 위엣 것”이라는 말이 두 번씩 강조되어있습니다. 땅에 것은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 하십니다. 그러면서 도달한 결론이 “탐심은 우상숭배니라”하셨습니다.
이렇게 가증한 우상숭배를 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이나 우리들은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헛되고 가증한 것에 눈을 두고 마음을 빼앗기며 삶이 그것에 물들어 살아가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11절과 1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 조상들보다 더 악을 행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바르지 않은 교인들이 몸은 교회에 있으면서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자들이 있습니다. 이 말은 말로만 교인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세치 혀로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반드시 삶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믿음은 거짓입니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긍휼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미성숙한 믿음이라 삶이 온전치 못한 것이라고 예쁘게 봐 줄 수 있겠습니다.
삶이 없는 믿음은 거짓이라고 한 것은 야고보서 2장에 근거합니다. 야고보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나의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8)하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삶이라? 완전한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완전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7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완전이라는 히브리어는 “타밈”입니다. 이 단어가 하나님께 쓰일 때는 “완전”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쓰일 때는 “성실”로 번역해야 옳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만이 완전하실 뿐 인간은 완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타밈”하라고 하면 그것은 성실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백성이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삶은 흠도 점도 없는 완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누구도 믿음이 있다고 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지 말씀하신 것에 대해 성실하게 준행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객관적으로도 보이는 것입니다. 마치 성전에서 기도하던 바리새인과 세리와 같습니다. 세리가 삶이 온전치 못했지만 주 앞에서 가슴을 치며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몸부림쳤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성도는 악을 행하고 악한 마음으로 완악하게 행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완악이란 말을 개역성경은 “강팍”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선한 마음으로 온유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인 것입니다.
이렇게 심판을 말씀하시던 주님은 갑자가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4절과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무슨 말씀인 줄 아시겠습니까? 이 말씀은 바벨론 포로 이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말 할 때 출애굽 속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했고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바벨론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동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면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우리들에게 조금 더 편하게 적용하면 이렇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성경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에서 자신의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동하게 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좀 더 편하게 하면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만 거하시는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삶 속에서 실제 하시는 하나님을 증거 하는 삶을 사는 자들이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이 성경이나 머릿속에 머물게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반드시 우리의 삶 속에 실제 하게 해야 합니다. 이를 에스라의 말을 빌려하면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을 이렇게 심판하고 구원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손과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목적도, 바벨론 멸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주시려는 목적도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오늘 제목처럼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책망하시는 목적도 오직 하나,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주시는 목적도 오직 하나,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의 손과 능력을 늘 인식하시고 우리를 책망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아 그분이 여호와 하나님인 줄 아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