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고난
삼상1:1-18
사무엘서는 사사시대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사시대가 끝나는 시점이 사무엘서의 배경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시대는 신정정치에서 왕정정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대이며, 신정정치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겼다기보다는 자신들이 왕이 되고 주인이 되어 살았던 시기였습니다.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종교적으로 타락했던 그런 시기에 하나님은 사무엘을 들어 종교를 회복시키고, 정치를 안정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그 사무엘의 출생에 관계된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1장1절에 보면 그의 족보를 기록합니다. 이 족보와 역대상 6장의 족보를 함께 보면 그는 레위족속에 속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무엘의 아버지 엘가나는 에브라임지파에 살고 있는 레위족속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일부다처제가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름대로 경건하였던 엘가나도 두 명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한 아내의 이름은 “은혜”라는 뜻의 히브리 말인 “한나”이고 또 한 아내의 이름은 “진주”라는 뜻의 히브리어인 “브닌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브닌나에게는 아이가 있고, 한나에게는 아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여인이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수치였습니다. 또한 나아가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합법적인 이혼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브닌나는 한나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한나가 격었던 이 고난을 살펴보며, 이 고난이 한나에게 어떤 유익을 주었으며,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도의 고난은 세 가지의 유익이 있습니다.
1.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룹니다.
본문 3절을 봅시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 사람이 매년에 자기 성읍에서 나와서 실로에 올라가서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제사를 드렸는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거기 있었더라.’
그들은 매년 자기들의 성읍인 라마를 떠나 성막이 있는 실로에 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스라엘 남자들은 매년 3회씩 성전에 올라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 한번 유월절은 온 가족이 올라가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 이유로 하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절기는 유월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실로에 올라가 제사를 드리고 제사를 드린자의 몫을 받아 그것을 가지고 가족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며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절기 때에 엘가나는 브닌나와 그의 자식들에게는 그들의 분깃만을 주고 한나에게는 다른 사람의 배를 더하여 줌으로 그를 사랑하는 표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브닌나를 시기하게 하였고 브닌나는 한나를 못살게 굴므로 한나를 격동시켰습니다. 얼마나 괴롭혔는지 성경은 브닌나를 표현하기를 한나의 대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6절을 봅시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1:6)
한나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비하셨던 계획을 한나의 삶을 통하여 이루실 수 있도록 한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하였던 것입니다.
당시 한나는 많은 괴로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숨은 뜻이 있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도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 힘들고 어려울 뿐이지 이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떠한 일을 이루실것인지에 대한 확실한 뜻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많은 곳에 고난이 있으나 그 순간에는 그 뜻을 알 수 없었던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은 9장에 제자들과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2절)
당시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부모의 죄로 인해 자식이 저주를 받아 장애를 갖고 태어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부모의 죄도 본인의 죄도 아니라고 말씀하시며,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심으로 그를 치료해 주십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의 요셉을 보면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루려 하심”이 얼마나 실감나게 그려져 있는지 모릅니다.
부요하게 자란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열심히 일해 인정을 받고 그 집의 청지기로 봉사 할 때,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뿌리친 일로 인해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힙니다.
요셉은 억울하게 고난을 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종으로 팔린 것도 그렇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받아 옥에 갇힌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후반에 보면 요셉의 그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요셉의 고난으로 인해 그의 온 가족이 구원을 받으며 아브라함에게 했던 약속인 애굽에서 400년간 있다가 가나안으로 돌아오리라는 예언의 성취를 위한 첫 단추가 끼워진 것도 그러합니다.
요셉의 사건을 보더라도 고난은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한명을 더 볼까요?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복음의 일꾼이 되기 전에는 믿는 자들에게 고난을 주는 자였지만 주님이 그를 만나주신 이후의 삶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당한 삶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소아시아에서 흑해 방향으로 전도를 가려 할 때 하나님은 그를 정 반대 방향인 유럽의 관문인 마게도냐지방으로 가게 하십니다. 그는 순종하여 배를 타고 마게도냐지방의 빌립보에 도착했고 그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사건을 당하게 됩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하나님은 그에게 이러한 고난을 허락하신 것일까요? 성령충만한 바울도 그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는 잠시 후에 알려집니다. 무엇입니까? 그들이 찬송하고 기도할 때 지진이 발생해 옥터가 흔들리고 빌립보 감옥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의 매인 것이 풀렸습니다. 간수를 죄수들이 모두 도망간 줄 알고 자결하려고 할 때 사도 바울이 말립니다. 그 일로 그 간수와 그의 집안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는 놀라운 사건이 발생됩니다.
이 사건이야 말로 고난은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루려 하심”이라는 알려 주는 일인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갑시다. 소경을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비밀한 뜻, 요셉에게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비밀한 뜻, 그리고 바울을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나에게 아이를 주지 않으신 비밀한 뜻은 무엇일까요?
본문7절부터 보면
“브닌나가 그를 격동시키므로 그가 울고 먹지 아니하니”(1:7)라고 합니다. 제사를 드리고 난후 그들은 각각의 분깃을 나누어 배부르게 먹고 마심으로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너무 슬퍼서 먹을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슬픔을 인하여 성전에 가서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는 11절에서 기도하기를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1:11)
만약에 그가 괴로움이 없었다면 기도하기를 원했을까요? 만약에 그가 고난이 없었다면 아이를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 할 수 있었을까요?
한나는 수 년 동안 하나님께 자식을 달라고 매달리며 기도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답치 않았습니다.
그렇게 응답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뜻은 한나로 하여금 먹지도 못하고 울음으로 지새며 절박한 심정이 되어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기를 '이제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를 다시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 하겠나이다'라며 그 아이의 일생을 온전히 하나님께 헌신토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한나는 틀림없이 삼손의 어미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삼손의 어미는 한나와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아마 약 30 살 정도 연상이었을 것입니다. 역시 무자하였던 삼손의 어미에게 어느날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아들을 낳을 것을 예언하면서 그 아들의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것과 그를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친 나실인으로 키울 것에 대한 명령이 있었음을 소문으로 들었을 것입니다.
이 때 삼손은 이미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있었고 블레셋 족속에 대한 그 무용담은 이스라엘 방방곡곡에 퍼졌을 것이며 아마 벌써 그 육신의 정욕에 굴복함으로써 서서히 타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삼손이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태어났던가를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었을 한나는 하나님께 자기에게도 아들을 달라고 구하면서 절박한 심정이 되어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면 자신도 그 아들을 평생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영적부흥으로 이끌어 갈 한 지도자를 필요로 하셨는데 당시 이스라엘에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쓰실 만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이제 한 여인을 사용하시어 그러한 사람을 이 세상에 나오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고난은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루려는 뜻”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립니다. 비록 우리가 당장 그 뜻을 알 수 없으나 때가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을 인내하며 감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성도의 고난은 자신을 경건하게 만듭니다.
2장을 보면 한나의 기도가 나옵니다. 사무엘을 젖 뗀 후(만3세 이후)에 실로로 데리고 와서 엘리에게 보이고 난후 한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도를 합니다.
이 한나의 찬양의 기도는 하루 아침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 많은 세월동안 눈물 흘리며 기도하고 그 고난의 기간 동안 인격이 성숙되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훈련된 후에 경건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하는데 고난만큼 빠르고 좋은 것은 없습니다. 매일 그리고 매년 마다 영적인 브닌나로부터 괴로움을 받고 고통의 나날이 계속되다보면 자신에게 한계를 느끼며 저절로 하나님께로 달려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깊어져 영적으로 성숙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적 성숙은 경건한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평안할 때는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않다가 고난이라는 문제를 만나 자신이 어찌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께로 달려가지 않습니까?
한나는 자식이 없는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께로 자주 나아갈 수 있었고 그러므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깊이가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고난으로 인해 하나님 앞으로 밀려나온 한나를 하나님께서는 들어 쓰시어 하나님의 계획에 합당한 한 사람을 이 세상으로 내 보내는 창구 역할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일을 위해서는 우선 그 어머니가 되는 이 한나라는 여인을 먼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만드셔야 했습니다.
이 합당하게 하는 과정이 바로 한나의 기도 중에 이루어졌는데 여기서 한나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지나온 삶을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어떠셨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언제 성숙하셨습니까? 우리의 경건은 언제 더 온전해 지십니까?
그것은 고난이 올 때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실 때 그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유익을 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넉넉히 그 고난을 이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성도의 고난은 깊은 기도의 경험을 하게 합니다.
본문 12절부터 13절까지 같이 읽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 줄로 생각한지라”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아픈 마음을 쏟아 놓느라 자신이 어떻게 기도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서서 손을 들고 소리 내어 기도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에 스스로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내지 않고 입술만 움직여 기도하고 눈물로 얼굴을 뒤덮었습니다. 또한 그는 얼굴이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여기서 한나의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주석학자 풀핏은 말하기를 “ 한나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온 심령을 토로하는 깊고도 은밀한 내적기도였다. 또한 이러한 기도는 간절한 소원과 깊은 신앙심 없이는 아무나 하기 힘든 차원의 높고 고상한 기도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본 엘리는 그에게 다가가 언제까지 술취하여 있겠느냐하며 그에게 포도주를 끊으라고 말합니다. 엘리가 늙기도 했지만 그 당시 종교의 타락으로 많은 사람들이 절기 때에 술에 취해 성전에 와 주정을 하는 여인들이 많았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 말에 한나는 15절에서 말하기를 “나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여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 것 뿐이오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통하다”라는 말은 “부르짖다”, “신뢰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한나는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부르짖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도우시나니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를 모를 때에도 성령이 우리가 말로써 발성할 수 없는 탄식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우리 대신 친히 하나님께 간구해 주신다고 말하였습니다.
한나의 기도가 바로 그러한 경우였습니다. 한나의 기도는 귀에 들리도록 말로써 한 기도가 아니라 성령으로 탄식하고 자기 심정을 하나님 앞에 쏟아 놓은 것이었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는 기도는 말로써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그러한 기도를 통하여 한나는 하나님과 깊이 교통 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야곱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가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할 때, 비록 오늘의 한나와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나 그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가 천사에게 말하기를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가 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할 수 밖에 없었나요? 그것은 그의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들을 저 깊은 고난의 수렁 속으로 몰고 가시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우리가 이렇게 영적으로 깊은 체험을 하게 된 것을 하나님과 연관지어 생각해 봄으로써 그러한 순간들은 우리 인생 중 가장 의미있는 체험을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을 통채로 하나님 앞에 쏟아 놓는 기도를 통해서 그리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절박한 마음이 되어 우리의 온 마음은 하나님께로 향하고 전심으로 혼신의 기도를 드릴 때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가장 잘 만나 주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간절히 기도한 한나에게 17절과 18절에서 하나님은 엘리를 통해 응답하십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로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
한나는 이 약속을 믿고 평안해 졌습니다. 그 증거가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수색이 없으니라”라는 구절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는 고난의 유익의 세 번째가 깊은 기도의 경험을 하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1.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비밀한 뜻을 이룹니다.
2.성도의 고난은 자신을 경건하게 만듭니다.
3.성도의 고난은 깊은 기도의 경험을 하게 합니다.
이 세 가지를 기억하심으로 고난이 올 때 넉넉히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