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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강해) 예레미야 33장 10-12절 (양 떼를 눕게 하리라) 하림교회 황규관 목사 www.storybible.k -성경통독원-                                                                                                                                                                                                                                                                                       

 

 


양 떼를 눕게 하리라

예레미야 3310-12

 

성도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예레미야서의 말씀은 오늘 본문에 있는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바로 2절과 3절의 말씀입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때문에 재미있는 말이 생겼는데 하늘나라 전화번호는 333-3927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부분은 세절 밖에 되지 않지만 전체 본문을 보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도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 주신 말씀입니다.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 번째로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 두 번째 말씀을 주셨습니다. 첫 번째 주신 말씀은 우리가 지난 주에 보았던 32장의 말씀입니다. 32장은 다시 밭을 사게 되리라는 회복의 말씀을 주셨었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도 작게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와 크게는 느부갓네살에게 포위되어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회복과 위로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냥 말씀하시면 될 것을 왜 두 번째라는 말을 사용하시면서 본문의 말씀을 주신 것일까요? 그것은 히브리문학의 특징상 두 번이상의 반복된 말이나 단어, 또는 행동은 그 말한 것을 반드시 이룰 것을 말하는 강한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강하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본문의 후반부부터 보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설교본문으로 읽었던 10절부터 12절까지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가리켜 말하기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다 하던 여기 곧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주민도 없고 짐승도 없던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리니 이는 내가 이 땅의 포로를 돌려보내어 지난 날처럼 되게 할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황폐하여 사람도 없고 짐승도 없던 이 곳과 그 모든 성읍에 다시 목자가 살 곳이 있으리니 그의 양 떼를 눕게 할 것이라

 

본문을 보면 다시라는 말은 두 번 반복합니다. 10절 중후반에 한번 그리고 12절에서 한번입니다. 당연히 다시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회복을 표현하면서 그의 양 떼를 눕게 할 것이라라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우리의 정서로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당시 목축문화를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표현은 완전한 회복을 의미하는 말로 들렸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23편을 보면 다윗은 노래하기를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23:2)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완전한 회복과 쉼을 주실 것을 말씀하시면서 양 떼를 눕게 하겠다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양의 특성 때문입니다. 양이 눕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배가 불러야 합니다. 둘은 대적의 위협이 없어야 합니다. 주변에서 이리와 같은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눕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누웠다 일어났을 때 먹을 것이 보장되어야 눕습니다. 그러니까 양 떼를 눕게 하겠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완전한 회복을 예언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런데 이러한 회복의 약속이 얼마나 공허하게 들리는지를 지난주에 말씀드렸었습니다. 오랫동안 예레미야는 예언하기를 이스라엘은 망하고 도시는 폐허가 되며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갈 것이라고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언한 예레미야는 그 폐허 위에서 폐허가 보이지도 않고 폐허였다는 것을 상상하지도 못하게 풍성하게 하여 회복 시켜 주시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과 11절에서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말씀하시기를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즐거워하는 소리, 기뻐하는 소리, 신랑의 소리, 신부의 소리와 및 만군의 여호와께 감사하라,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 하는 소리와 여호와의 성전에 감사제를 드리는 자들의 소리가 다시 들리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 떼가 눕게 되는 것과 함께 12절에서 다시 목자가 살 곳이 있으리니라고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관계하여 15절에서 한 가지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이 말씀은 사무엘하 712절에서 다윗에게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라고 하셨던 약속입니다.

본서 235절에서도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라고 했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11:1)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약속하신 하나님은 이것을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하셨는데 이 약속의 불변함과 확고함을 보증하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20절과 2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깨뜨려 그에게 그의 자리에 앉아 다스릴 아들이 없게 할 수 있겠으며 내가 나를 섬기는 레위인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할 수 있으리라

 

25절과 26절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리고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그 포로 된 자를 돌아오게 하고 그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나님은 거듭해서 천지의 법칙이 변할 수 있다면 내가 세운 언약도 변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서 408절의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라고 한 것과 같이 주께서 하신 약속은 절대로 취소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정말로 맹약하신 대로 이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14절 후반에도 성취할 날이 이르겠다고 했고 2절에서는 하나님을 일을 지어 성취하시는 여호와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약속은 정말로 성취되었는데 마태복음 11절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로 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한 사역은 우리를 푸른 밭에 누이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목자로 당신의 양인 우리를 눕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눕게 하시는 데에 있어서 우리에게 어떤 조건을 요구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훌륭하게 변했거나 하나님의 기준에 합당하게 변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냥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그분의 자비에 근거하고 약속에 근거하여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사야는 이사야서 489절부터 11절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노하기를 더디 할 것이며 내 영광을 위하여 내가 참고 너를 멸절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였노라 나는 나를 위하며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 어찌 내 이름을 욕되게 하리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에게 이루어 주신 회복의 역사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자신이 사도가 된 것에 대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되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본문 6절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전적인 회복의 역사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6절부터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내가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이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

 

우리가 읽은 구절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시키시는 주체에 대해 내가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낫게 하고”, “내가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여”, “내가 그들을 정하게 하며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로 주의 백성 되게 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조금도 우리의 공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성도 된 것에 대해서도 에베소서 29절에서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의를 입는 방법은 오직 하나입니다. 믿음으로 얻는 의”, 그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약속하시고 예언하신 그리스도가 오셨고 우리를 위해 죽어주시고 그것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셔서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었는데도 그것을 믿지 못합니다. 그들이 이를 믿지 못함은 말씀을 모르거나 증거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로마서 25절의 말씀처럼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 예수님 믿어도 삶이 바라야 구원을 받는다고, 야고보서의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을 들어 행위가 없기 때문에 구원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우리를 우리가 지은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행위가 필요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의의 기준을 만족시키려면 얼마만큼의 행위가 필요한 것일까요?

 

갈라디아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2,3)라고 말입니다. 이 말은 처음 예수님을 믿을 때 믿으면 구원 받는다고 하여 믿기 시작했는데 어느 정도 지나면 너같이 믿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며 행위가 없으면 구원을 못받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하여 바울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시작했다는 말을 로마서 5장에서는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5: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5:10)라고 하신 것인데 이는 우리가 아무 행위가 없을 때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가 죽으셨고 그 결과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시면서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말씀하셨습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여기 중요한 계시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일을 행하는 자, 그것을 만드는 자, 그것을 성취하는 자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서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은 멸망에 직면해있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갈 처지에 놓여있으며, 예레미야 자신도 시위대 뜰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를 처지에 있을 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일을 행하는 자, 그것을 만드는 자, 그것을 성취하는 자이십니다. 하나님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십니다. 여호와라는 이름대로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또한 창세기 171절의 말씀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말씀대로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일을 행하는 자, 그것을 만드는 자, 그것을 성취하는 자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신 역사를 중단 한다던가 미완성으로 놓아두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9:6-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서 4313절에서는 과연 태초로부터 나는 그이니 내 손에서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라고 했고

로마서 831절에서는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하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들은 이렇게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만드는 여호와, 그것을 성취하는 여호와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담력을 얻고 이 땅을 믿음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지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2,33)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입니다.

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성취하신다고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에스겔은 너희 사방에 남은 이방 사람이 나 여호와가 무너진 곳을 건축하며 황폐한 자리에 심은 줄을 알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으니 이루리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36:36-37)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르짖으면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 크고 은밀한 일이란 인간이 이해 할 수 없는 놀라운 것으로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죽은 사라의 태를 통해 약속하신 이삭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크고 은밀한 일이었습니다. 애굽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애굽의 바로를 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으로 가게 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크고 은밀한 것이었습니다. 후에 페르시아라고 하는 당시 아주 작은 나라에 고레스라는 사람을 일으켜 당시 강대국의 연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메디아, 리디아,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토로 돌려보낸 것이 하나님의 크고 은밀한 역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보다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죄인의 모습으로 오게 하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으로 그것을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 크고 은밀한 일인 것입니다.

 

그 결과 저와 여러분을 푸른 풀밭에 눕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을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했고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 존재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도 우리를 세상이 알 수 없는 놀라운 기쁨과 평강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고 그분의 강력한 사랑과 돌보심을 확신하는 자들은 이 땅의 일들로 인해 일희일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풀밭에 눕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인 것입니다. 이를 믿고 이 땅에서 주의 백성의 삶을 성실하게 살다가 때가 되었을 때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천국이라는 초장에서 눕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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