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냐?

요한복음 119-28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서론에서 세례 요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직전의 상황을 세례 요한과 결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례 요한이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증거자임을 입증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에 대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세례 요한의 대답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세례 요한의 사역과 정체성을 알아보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도 보는 시간이 되길 원합니다.

 

유대인들은 요한에게 와서 네가 누구냐고 묻고 있습니다.

1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언이 이러하니라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유대지도자들을 가리켜 유대인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보내 요한에 대해 묻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회개의 촉구 그리고 세례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군중들 중에 일부는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까지 간주하기도 하였습니다(3:15;13:25). 이러한 현상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 지도자들의 민감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의 공회인 산헤드린은 요한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 사람들을 파견했던 것입니다.

 

모세 율법에 대한 해석을 주해한 미쉬나에 의하면 거짓 선지자에 대한 규명과 재판이 산헤드린 공의회의 주요 직무 중 하나로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세례 요한이 누구인지가 궁금했습니다. 나아가 세례 요한에 대해 꼬투리를 잡아 고소할 이유를 찾고자 한 것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고 있고 사람들이 그를 따르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었습니다. 더불어 그들은 요한이 메시야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에게 사람들을 보내 네가 누구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요한을 가리켜 누구냐고 묻는 것은 본 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21절에서도, 22절에서도 누구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러한 물음에 요한은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유대인들의 의도를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을 메시아로 오해할 수 있는 일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단호한 어투로 말한 것입니다. 특히 세례 요한은 ''라고 하는 1인칭 대명사를 사용하는 강조법으로써 예수의 탁월성에 자기 자신을 비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세례 요한이 강력하게 부인했던 '그리스도'란 히브리어인 '메시야'와 같은 의미를 지닌 헬라어 표현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며 이 그리스도께서 언약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하실 분이며 자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 개념은 이스라엘의 선민사상과 융합되어, 식민지적 상황을 종식시켜 줄 정치적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즉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메시야 사상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와 세속적인 왕을 동일시하는 오류에 빠졌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이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님을 강력히 말했던 것은 먼저는 옛언약의 완성이자 새 언약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의 증언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는 알았고 그 일에 충실했던 것입니다. 또한 로마 제국으로 하여금 자신을 제국에 반대하는 정치적 모반자로 오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어서 그들은 요한에게 엘리야냐고 묻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물은 이유는 요한이 엘리야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요한은 (1)약대 털옷을 입고, (2)금욕적인 식사를 하고, (3)이스라엘을 향해서 회개를 선포하고, (4)헤롯의 비리를 꾸짖은 행동들이 구약의 엘리야를 연상케 한 점도 아울러 작용했던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요한은 자신은 엘리야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요한을 가리켜 엘리야라고 하신 말씀(11:14;17:12)과 비교해 보면 본 증언은 오류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의 질문의 배경을 자세히 분석하면, 요한의 대답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려면 먼저 하늘로 승천 했던 엘리야가 다시 와서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세례 요한이 바로 '구약의 엘리야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요한은 자신이 당시 유대인들이 인식한 엘리야도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은 실제 엘리야가 아니라 단지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엘리야적 사역 즉 '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사역을 수행하는 자'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4:5,6).

 

이어서 요한에 대한 그들의 질문은 네가 그 선지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공동번역성경은 우리가 기다리던 그 예언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여기서 그 선지자는 모세가 한 말에 근거한 질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물은 이유는 신명기 1815절에서 모세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라고 한 말씀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선지자를 기다렸습니다. 그 선지자는 유대인들에게 메시야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한 후에 사도들은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이해했으며 이를 선포했습니다.

 

이 질문에도 요한은 자신은 그 선지자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요한의 하는 말을 들은 그들은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요한의 대답이 있습니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르되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 하니라

 

요한은 자신에 대해 첫 번째로 한 자기 증거는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유대인들의 거듭된 질문에 세 번이나 아니라고 대답을 하고 자신에 대해 첫 번째로 한 말이 소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소리라고 한 것은 자신은 도구일 뿐이라는 의미입니다. 소리라고 자신을 묘사한 이유는 자신은 주목받을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소리를 통해 누군가가 주목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의 일을 할 때 이러한 자세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주께서 맡겨주신 일을 하다가 칭찬을 듣거나 존경을 받으면 자신의 역할을 잊습니다. 즉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소리일 뿐 소리가 주목하게 하는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소리 자체를 높이고 소리는 자신이 영광을 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은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헤롯 아그립바가 가이사랴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신이라고 환호하는 두로 시민들의 환호를 듣고 영광을 취하였다가 충이 먹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 소리가 거하는 장소가 본문에 있습니다. 그것은 광야입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훈련받았고 요단강에서 백성들에게 세례를 베풀며 군중 속에서 회개를 외쳤습니다. 그런데 왜 광야에서 외친다고 했을까요? 먼저는 지리적으로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도 광야에 속한 지역이었고 영적으로는 세례 요한이 말씀을 전하는 대상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영적 상황이 광야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심령은 진정한 메시야를 대망함이 없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외쳤던 세대는 영적 광야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소리로서 살아가야 하는 곳이 광야입니다. 말씀이 뿌려지나 하나님의 은혜의 비가 쏟아지지 않아 열매 맺지 못하는 세대 속에서 주의 오실 길을 예비하며 회개를 외치는 자들인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비롯한 구약의 선지자들이 말씀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했던 것처럼 이 시대 주의 백성들도 핍박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세대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교회가 거하는 땅을 광야라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성도는 복음을 전하다 죽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의 성체성은 첫째로 소리인데 그 소리가 있을 곳은 광야라는 것입니다.

 

또한 소리의 내용은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인 것입니다. 우리가 소리로서 사명을 감당하되 바른 소리를 내야 합니다. 악기가 연주자가 원하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그 악기는 더 이상 악기가 아닙니다. 사신의 최대 사명은 자신을 보낸 이의 의사를 분명히 전달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소리의 최대의 사명은 주의 길을 곧게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소리가 정말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를 전하겠다고 신학의 길에 들어서고 목사 안수를 받고 강단에 섭니다. 대부분의 사역자들은 정말 온 삶과 정성을 다하여 그 일에 헌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안타까운 것은 적지 않은 분들이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이 주의 길을 곧게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고 많은 말씀을 전하고 열정을 다해 전하지만 성경대로 전하지 못합니다. 열심히 사역하지만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 소리를 듣고 따라갔던 많은 양떼들이 독을 먹고 중병에 걸리고 바른 복음에 굶주려 이웃의 밭을 기웃거리다가 이단에게 빠지는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성경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리들의 가장 큰 사명은 많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의 사명은 바른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를 소리로서 살아가야하는 사역자를 비롯한 모든 성도들은 일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우리들은 사역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첫 번째 정체성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입니다.

 

두 번째 정체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27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한이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한 말 이후에 벌어진 질문과 답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들은 묻기를 또 물어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세례를 베푸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질문한 이유는 당시 사람들의 세례에 대한 생각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를 베풀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첫째로, 유대 사회에서 세례는,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할 경우 이방 세계에서 오염되었던 죄악을 떨쳐버린다는 의미로 사용했던 공인된 의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자들은, 세례 요한이 개종자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할 세례를 유대인들에게 실시한 사실에 대해 질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겔 36:25; 37:23; 13:1 등에서 물로 씻음, 곧 세례 의식이 메시야 대망과 관련되어 언급되어지고 있는데 이와 같은 범민족적 차원의 정결과 성결은 오직 메시야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는 과업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본문과 같은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요한에게 네가 왜 세례를 베푸느냐고 한 질문 속에는 그의 자격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네가 누구이기에, 무슨 자격으로 세례를 베푸느냐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요한은 자신이 세례를 베푸는 이유에 대하여는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질문에 대한 합당한 대답이 아니라 다른 말을 하는데 그것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이에 대한 말씀입니다.

 

26절과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

 

요한은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 뒤에 한 가지 말이 숨어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인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자이다라는 말입니다.

 

나아가 말하기를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서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알지 못한다는 말은 그들은 육신으로 주를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 후에 요한으로부터 주께서 세례를 받은 후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그를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 속에서 계속해서 자신을 나타내시는 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요한은 자신의 두 번째 정체성인 그의 신발끈도 풀지 못할 자로 나타고 있습니다. 정말로 요한은 이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임신하여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찾아왔을 때부터였습니다. 요한은 뱃속에서부터 메시야를 보고 뛰었습니다. 그는 사역하는 동안 오직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데 온힘을 다했습니다. 심지어는 죽기 전에 옥에 갇혔을 때도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 제자들 스스로 예수님을 메시야로 발견하고 주님의 뒤를 따르도록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죽기 전까지 예수님의 신발끈도 풀지 못하는 존재로 자신을 낮추어 사역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그와 반대로 살았다면 그는 요한파를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존경을 받고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습니다.

 

성경 민수기에 보면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것은 물로 인해 생긴 단순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백성들은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아론을 상대로 불평을 했습니다. 이에 모세가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모세에게 응답하시기를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은 말하기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고 말하고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을 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광야에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였고 명하신 방법으로 하지 않고 반석을 쳤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이들처럼 자신이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신발끈을 푸는 자는 당시 노예를 의미합니다. 손님이 집에 오면 노예가 나가 손님의 신발끈을 풀고 발을 씻어주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은 그 예수님 앞에 노예만도 못한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소리이며 주의 신발끈을 풀지도 못할 자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기드온의 겸손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사시대 주변 세력들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당하여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300명만을 군사로 데리고 갈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전쟁에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기드온이 전쟁에 이기고 돌아왔을 때 사람은 기드온에게 나아가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기드온은 단호히 거절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의 아들 중 아비멜렉이라는 자는 자신이 스스로 왕이 되어 기드온의 70명의 아들을 죽이고 자신을 높였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내 아버지는 왕이다인데 그 이름을 통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는 자신을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 왕으로 높인 자의 최후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정체성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신발끈을 풀지도 못할 자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자신의 사역이나 삶이 잘되어지고 높은 위치에 올랐을 때 자신이 예수님의 자리에 앉으려는 유혹을 떨쳐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세례 요한의 뒤를 따르는 주의 백성들의 정체적은 정체성은 두 가지입니다. 사역적인 측면에서는 소리요, 지위적인 측면에서는 노예보다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세례 요한과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것은 '네가 누구냐'에 대한 우리의 삶의 대답인 것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모세가 말한 위대한 선지자도 아닙니다.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길을 준비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푸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내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그 사명을 감당하는 것으로 만족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은 내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아질 수 있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모셔드릴 수 있다면, 그냥 소리가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세례 요한의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런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02
    Mar 2014
    16:51
    No Image

    요한복음 3장 22 - 36절 주는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By하림 Views7295
    Read More
  2. 16
    Feb 2014
    13:46
    No Image

    요한복음 3장 16 - 21절 영생을 얻게 하심2

    By하림 Views12710
    Read More
  3. 12
    Feb 2014
    17:41
    No Image

    요한복음 2장 23절-장 15절 영생을 얻게 하심

    By하림 Views2732
    Read More
  4. 12
    Feb 2014
    17:40
    No Image

    요한복음 2장 13-22절 성전을 헐라

    By하림 Views10128
    Read More
  5. 12
    Feb 2014
    17:39
    No Image

    요한복음 2장 1-12절 물로 포도주를

    By하림 Views12372
    Read More
  6. 12
    Feb 2014
    17:38
    No Image

    요한복음 1장 35-51절 보고 따르라

    By하림 Views5698
    Read More
  7. 12
    Feb 2014
    17:37
    No Image

    요한복음 1장 29-34절 하나님의 어린양

    By하림 Views6789
    Read More
  8. 12
    Feb 2014
    17:36
    No Image

    요한복음 1장 19-28절 네가 누구냐?

    By하림 Views6622
    Read More
Board Pagination Prev 1 ... 59 60 61 62 63 64 65 66 67 68 ... 71 Next
/ 71

Address: 서울특별시 강남구 학동로77길 49 하림교회 (청담동 10번지)Tel: 02-456-3927Email: haezra@hanmail.net
Copyright 2000 스토리바이블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Nature wi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