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생을 얻게 하심
요한복음 2장 23절 - 3장 15절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단어 중 하나는 “생명”, 곧 “영생”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낸 부분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이 있은 후 어느날 밤에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와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았다면 이런 일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하였고 이렇게 말하는 그에게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그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그는 사람이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이에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구원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다”고 하셨고 나아가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를 한절씩 보면서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2장 23절부터 25절까지 먼저 읽도록 하겠습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후에 사람들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행하신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이 이상합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으면 그 결과를 기뻐하시고 그들과 함께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면 될 것을 본문의 반응은 그들을 의탁하지 아니하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들의 속을 아신다고 하시며 그들의 믿음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믿음이 진정한 믿음이 아닌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은 표적을 보고 잠시 따랐던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뿌리가 깊은 믿음이 아니었고 표적이 없으면 곧 믿음을 버릴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표적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기독교 뿐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신앙이 표적신앙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면 그들은 이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겨버립니다. 기독교도 신비한 현상이 있지만 신비만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적 신앙은 뿌리가 깊지 못하여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들이 따르는 하나님을 버리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도의 신앙은 기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이 나타내고자하는 대상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 교제를 요한일서는 ‘사귐’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표적을 추구하는 자가 아닌 당신과 교제하기를 원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귀는 자란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것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 자체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사모하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고 나아가 예수님과 함께 죽기를 원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조건이 아니라 그와 함께 있길 원하고 그가 추구하는 것을 함께 추구하고 그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길 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되 표적신앙이 아니라 예수님과 영적인 교제를 추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과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가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3장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본문을 보면 1절을 “그런데”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2장 후반에서 언급된 표적신앙인들과 다른 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문은 니고데모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최고 의결기관이었던 산헤드린의원이었습니다. 산헤드린 의원은 71명이었는데 그들은 고위 사제들과 원로원 율법학자들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는 공관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본서에만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함께 계시는 선생님”으로 인정하며, 영생에 대한 질문과 세례에 대하여 담화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예수를 두고 논란을 일삼는 바리새파와 대제사장들에게 대하여 예수를 두둔하는 말을 하였고( 7:50-52)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시신에 바르기 위해 몰약에 침향을 섞은 것을 많이 가져 왔으며, 아리마대 요셉과 더불어 예수님을 새 무덤에 모신 사람이었습니다(요한 19,39-42).
그런 그가 예수님을 찾아 온 것입니다. 그 이유는 뒤에 계속해서 드러나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었고 나아가 영생에 대해 묻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그는 밤에 찾아왔습니다. 그가 밤에 찾아 온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의 눈을 의식해서 밤에 찾아 왔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을 출교하겠다는 말이 있기 전이라 그것은 아닌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는 조용한 시간에 진지하게 예수님과 대화하길 원해서입니다.
나아가 신학자들은 요한의 사상을 빌어 밤을 영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요한은 밤을 악과 무지, 그리고 거짓의 실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11:10). 그리고 가롯 유다는 밤에 예수님을 떠남으로써 빛으로부터 사탄에게로 갔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요한은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께 찾아 온 것을 니고데모가 어둠 속에서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아온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의 시작은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시작부분에 요한은 말하기를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1:9)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세상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빛이신 예수님께 나아와 그를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시작은 빛이신 예수님께 나아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에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기록한 요한일서 1장 3절에서 전도에 대해 말하기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라고 했고 그 사귐은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랍비”라 칭하고 있습니다. 사실 랍비는 자신이었습니다. 당시 랍비라 불리기 위해서는 수년 동안 정규적인 연구 과정을 마쳐야 했고 율법을 해석하고 종교법과 형법의 문제들에 대해 독자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어야 했으며 40세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런 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습니다. 일반 군중들이야 예수님을 메시야로 따를 정도니 그렇게 부를 수 있었지만 당시 최고의 율법학자요 의결기관의 일원으로서 자신보다 못하고 나이 어린 자에게 와서 랍비라 부르는 것은 그의 겸손과 예수님에 대해 어떠한 자세로 나아왔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자 하는 자세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소리만을 듣고 싶어 합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이 부르실 때 “말씀 하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3:10)라는 자세로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자신이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먼저 말합니다. 그것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니이다”라고 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나이다”라고 함으로 자신은 예수님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니고데모는 자신이 속한 파가 “바리새파”이기에 예수님께 끌렸을지 모릅니다. 당시 바라새인들은 사제들이나 사두개파처럼 성전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성전 중심적인 신앙보다는 율법을 지켜 사는 삶에 더 관심이 있었고 영생과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런 자들이었기에 성전에서 행해지는 위선적인 행위들로 인해 불만이 있었고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예수님이 행동으로 그 모든 것들을 몰아내시는 모습에 끌려 예수님께 온 것입니다. 그러기에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행동이 사람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의 하나님의 표적 행하심”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밤에 예수님께 온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그가 원하고 갈급한 문제를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주님은 그에게 말하시면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아멘 아멘 레고”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본 절과 5절, 그리고 11절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를 찾아 나온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참 진리를 말씀하시면서 이 말씀이 아주 중요한 말씀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말씀이란 “거듭남”입니다. 그리고 그 “거듭남”은 “영생”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하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거듭남”이란 헬라어로 “아노덴”이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우리글 성경처럼 ‘거듭’이란 뜻과 ‘다시’란 뜻이 있고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의미가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위로부터”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바클레이는 이 단어를 “위로부터 거듭나다”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듭남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개과천선과는 다른 것입니다. 일반적인 거듭남은 무질서하게 살던 사람이 질서 있어지고 거칠었던 사람이 부드러워 지는 것 등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회개”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거듭남이란 그런 차원의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죽었던 생명이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무덤 속에서 이미 썩어 뼈밖에 남지 않은 시체가 살아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를 에베소서 2장 1절에서는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란 죽었던 자가 새생명을 얻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로 되는 것이라 “위로부터”만 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위로부터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보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이돈”이란 말입니다. 이는 “경험하다, 참여하다, 인식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냥 일반적으로 눈으로 보는 것은 “블레포”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여 그 나라를 경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5절에서는 “거듭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위로부터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습니다. 똑 같은 복음을 전해도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헛소리와 종교적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람들의 괴변으로 들릴 뿐입니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들은 일상의 모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지금 니고데모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수많은 율법과 종교적 열심을 내며 살아가지만 그러한 행위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최종적으로 못 박는 자들이 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했을 때 니고데모는 당황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거듭남”에 대해 인식하기를 이는 이방인이 유대교로 개종할 때나 사용하는 용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니고데모는 침착성을 잃은 대답 겸 질문을 하였습니다.
4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니고데모는 놀라서 침착성을 잃고 풍자가 가득 섞인 말로 예수님께 대답하였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었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라고 말입니다. 우리 같아도 거듭나라는 말씀에 이렇게 황당한 말로 질문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듭남에 대해 궁금했다면 “어떻게 거듭나야 합니까?”라고 묻는 것이 정상적인 어른의 질문입니다.
니고데모는 그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말도 안 되는 말로 예수님의 거듭남에 대한 말씀을 되받아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꾸짖거나 논쟁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진지하게 거듭남에 대해 말씀해 주실 뿐이었습니다.
5절을 같이 일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여기서도 “진실로 진실로”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말씀하기를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물과 성령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먼저 물은 물세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보다는 육적인 출생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나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의 피를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켜 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한번 육적으로 태어나고 영원히 죽지만 성도는 육적으로 한번 태어나고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6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육으로 난 것이란 자연적 출생을, 영으로 난 것이라는 말은 성령으로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사람이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느냐는 니고데모의 말에 대해 다시 태어나는 것은 모태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는 것 같은 육적 출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의 태어남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니고데모가 이해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7절에서는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니고데모를 몰아세우셨는데 7절에서 사용하는 인칭대명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는 “사람이”라는 말을 통해 객관적으로 거듭남을 말씀하고 있었다면 본 절에서는 니고데모를 가리키며 “네게”라는 말을 사용하심으로 거듭나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너”라고 한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받았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자신은 영생을 받은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확인 받고 싶고 더 깊은 진리에 대해 알고 싶었던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 할 자는 다른 사람들도 있지만 바로 “너”부터 거듭나야 한다고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충격에 빠진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그를 이해시키기 위해 바람의 특징을 빌어 성령의 임함과 구원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이렇게 말씀하심은 바람의 시작과 진행을 알 수 없듯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육으로 태어나는 것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분명이 알지만 성령으로 내어나는 것은 어느 순간 성령이 임하여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한때 유행했던 구원파들이 구원받은 날짜와 시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아무 의미 없는 말이 뿐입니다.
어찌되었던 이 말은 성령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당시 니고데모로서는 계속되는 어려운 말일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질문을 하였습니다.
9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니고데모는 어떤 형태의 예식이나 행위가 영생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신들은 율법을 준수해야만 가능하다고 여겼고 이방인은 할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전통적으로는 구약의 율법이나 제사제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람처럼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해하지 못하여 질문하는 니고데모에게 주님을 길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일단 10절부터 15절까지만 읽겠습니다.
[요] 3:10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요] 3:11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요] 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요] 3:13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은 12절에서 “땅의 일”과 “하늘의 일”을 분리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니고데모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땅의 일’이란 8절에서 말씀하셨던 ‘바람의 원리’입니다. 이 땅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하늘의 일’인 성령을 통한 영생의 일을 이해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지금도 그대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땅의 일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조금 배웠다는 사람들은 자신의 과학적 지식과 철학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종지만한 뇌로 결정한 판단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을 합니다. 눈에 보이는 우주 만물의 원리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간이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를 보면 하나님은 욥과 그의 친구들의 말을 책망하시는데 그들의 무지를 지적하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욥은 고백하기를 “깨닫지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42:3)라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자신의 노력이나 이해가 아니라 선물인 것입니다. 주께서 믿음을 선물로 주시기 않으시면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들린 놋뱀과 당신을 비교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높이 달아 바라보는 자들마다 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놋뱀을 장대에 달게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물어 사망을 당하게 했던 뱀을 심판하여 죽였으므로 더 이상 사망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실을 보고 믿는 자에게는 생명을 얻게 했는데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도말하신 것을 믿는 것으로 영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15절에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생은 인간의 노력이나 행위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졌음을 믿는 것으로 영생을 얻게 되는데 이 또한 성령의 은혜가 아니면 알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천주교의 이혜자 수녀가 요한복음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고백한 글이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가? 개신교 신자들은 “그렇다.” 하고 대답하지만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글쎄요?”가 대부분이다. 필자도 그랬다. 그러나 요한 복음을 통해 이미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생명의 싹이 자라고 있음을 믿게 되었다. 요한의 첫째 편지의 저자도 “내가 여러분에게, 곧 하느님의 아드님의 이름을 믿는 이들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1요한 5,13)이라고 썼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 즉 ‘영생’을 얻게 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 감사하며 그에 합당한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